[Opinion] 적당한 복숭아 [문화 전반]

글 입력 2022.11.2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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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딱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그 무엇도 쉽사리 고를 수 없는 두 개의 선택지 사이에서 고뇌하는 '밸런스 게임'은 유행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토맛 토마토'와 '토마토맛 토', '팔만대장경 다 읽기'와 '대장내시경 팔만 번 하기', 당신의 선택은?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무엇도 고르고 싶지 않지만, 이 게임의 핵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가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호불호 논쟁은 MZ 세대의 유명한 '밈' 놀이다. '팥붕(팥 붕어빵)'과 '슈붕(슈크림 붕어빵)', '민초단(민트초코)'과 '반(anti-)민초단', '물복(물렁한 복숭아)'과 '딱복(딱딱한 복숭아)'까지. 이때, 자신과 동일한 호불호를 지닌 상대방에게는 '역시' 하며 하이 파이브하고, 다른 호불호를 지녔다면 '아 뭐야~'라며 야유해야만 이 유쾌한 놀이의 완성이다.

 

이제 흑백논리는 하나의 오락이자 콘텐츠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이 같은 흑백 논리적 질문이 일종의 게임을 넘어 개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시도로까지 확장되는 현상이다. 예컨대 '물복 vs 딱복'의 선택지에서, 우리는 단순히 취향을 묻는 순진한 호기심이 아닌, 스스로를 '물복파' 또는 '딱복파'로 정체화하라는 강력한 요구를 마주한다.

 

 

 

스펙트럼 위 복숭아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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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복 vs 딱복 논쟁을 살펴보자. 맛있는 여름 과일 복숭아는 경도에 따라 당도와 식감이 달라진다. 물렁한 복숭아는 과즙이 흘러넘치고 비교적 더 달콤하며, 딱딱한 복숭아는 깔끔하고 아삭하니 씹는 맛까지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과일 앞에 ‘물렁물렁함’과 ‘딱딱함’이라는 형용사가 붙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예컨대 사과는 원래 딱딱한 과일이므로 굳이 ‘딱딱한 사과’라고 부를 이유가 없다. 사과가 물렁해지면 신선도가 떨어졌다는 신호로 버리는 것을 추천한다. 그 누구도 ‘물사’와 ‘딱사’를 두고 논쟁하지 않는다.


과일 앞에 형용사가 붙는 경우를 떠올려 보자. ‘잘 익은’과 ‘덜 익은’은 식용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이 같은 기준에서 ‘덜 익은’ 과일은 수용될 수 없다. ‘씨 있는’과 ‘씨 없는’, ‘파란(아오리 사과)’과 ‘빨간(홍로)’은 애초부터 서로 다른 두 품종 간의 독립된 성질이다. 그런가 하면 ‘단’과 ‘덜 단’은 모호하다. 사람마다 달콤함의 정도를 다르게 느끼기 때문에 과일 자체의 성질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처럼 복숭아를 수식하는 '물렁한'과 '딱딱함'이라는 형용사의 존재는, 복숭아의 단일한 이데아를 상정하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복숭아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다양성이 허용됨을 뜻한다.


이 같은 다양성은 인간에게서도 관찰된다. 생물학적으로 같은 종이라지만, 그 사실을 차마 믿을 수 없을 만큼 인간 군상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복숭아의 물렁함과 딱딱함은 사실상 인간의 MBTI나 마찬가지다. 이성과 감성, 계획과 즉흥, 그리고 물렁함과 딱딱함.

 

그런데 MBTI의 모순은 물복 딱복 논쟁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이 논쟁은 복숭아의 성질을 단단함과 물렁함 중 단 하나로 정의할 수 없음을 방증하면서도, 동시에 무한한 다양성을 단 두 개의 틀로 축소하여 규정하는 아이러니를 빚기 때문이다. 예컨대 인간이 얼마나 이성적인지를 단순히 '예/아니요'로 규정할 수 없으며, 이는 복숭아의 물렁함과 딱딱함도 마찬가지다. 즉, 아이러니의 출처는 연속적 스펙트럼 위 존재를 불연속적 기준으로 구획하려는 구분 짓기다.

 

물복이냐 딱복이냐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망설이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딱딱하기만 한 복숭아도 싫고, 그렇다고 해서 아예 물처럼 흐물거리는 것도 싫으니까. 그렇지만, “어 그러니까... 저는 적당히 물렁하고 또 적당히 딱딱한 복숭아가 좋은데요?” 라고 답하면, 퍽 재미없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정체성을 범주화하여 규정할 때 안정감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은, 모든 인간에게 꼭 들어맞는 그 어떤 틀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군상의 셀 수 없이 다양한 변주는, 인간을 규정하는 틀이 견고해질수록 그 틀에 맞지 않는 잉여의 존재 가치가 무시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뿐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물복인가 딱복인가를 질문하고, ‘적당함’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왠지 모를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니까 적당하다는 게 대체 어느 정도인데? 얼마나 적당한데? 그래도 딱 하나만 골라봐.


 

 

적당함을 위하여



그 누구도 타인을 칭찬하기 위해 ‘너 적당히 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기왕 칭찬하려면 ‘너무’, ‘무지’, ‘엄청’, ‘무척이나’ 같이 유난처럼 보일 만큼 극단적인 부사를 사용하는 게 좋다. 적당하다는 말은, 달리 바꾸어 말하면 그 무엇에도 특출나지 않으며 개성이 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적당하다’의 사전적 정의는 ‘꼭 들어맞는다’로 긍정적인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꼭 들어맞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넘쳐흐를 것을 요구한다. 상대평가 제도하에서, 학생들은 잠시의 여유도 맘 편히 즐기지 못한 채 밤새워 전전긍긍한다. 대학에서는 적당한 학생이 아닌 1등급인 최고의 학생을 선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끔찍한 점은, 최고지상주의가 대학 입시를 끝낸 후에도 여전히 우리 삶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당함에 대한 사회적 불만족은 쉽게 나에 대한 자기 불만족으로 이어진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던 분야에서 ‘너무’ 잘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성공한 사람들의 ‘엄청’ 뛰어난 삶의 족적을 바라보면서, 내가 그저 적당했을 뿐이라는 사실에 좌절하기도 한다. 물론, 이 좌절은 종종 위선 같다. 때로는 내가 ‘너무’ 못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으니까.


적당함은 능력에만 부여되는 형용사가 아니다. 나는 자주 적당하지 않은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예컨대 친구들은 나를 ‘담백한’ 사람이라고 말해 주었는데, 이것은 칭찬이었고 나는 이 단어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다만 담백함이라는 표현을 도출해 냈던 나의 어떤 면들은, 내가 나를 아쉬워하게끔 만든다. 예를 들어, 나는 가끔 사람들을 웃길 수는 있어도 항상 웃긴 사람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매일같이 사람들을 빵 터지게 하는 유머를 장착한, ‘무척이나’ 재미있는 친구들이 있다. 이들에 비하면 내가 자신을 스스로 재미있는 사람으로 정체화하기에,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적당하다. 누군가의 특출난 개성과 색깔은 적당함이 아닌 ‘너무’, ‘무지’, ‘엄청’, ‘무척이나’에서 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당히 물렁한 복숭아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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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적당함은, 특색 없고, 재미없고, 그저 모호하기만 한 것일까? 그래서 물복파도 딱복파도, 당최 그 어디에도 '적당히 물렁한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리는 없는 걸까?

 

세상의 이분법에 속하지 못한 채 유유히 떠도는 이들을, 마냥 비극의 테두리에서만 바라볼 필요는 없다. 이들은 물복파도 딱복파도 아니지만, 다행인 점은 둘 중 그 누구도 딱히 이들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이들은 변주의 스펙트럼 위에서 살아가므로 투쟁하지 않아도 되며, 따라서 그 누구도 미워할 필요가 없다.


예컨대 물복파는 식탁 위에 딱복이 놓이면 ‘너무’ 슬퍼하거나 분노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과의 식사 자리에서는, 서로 대화해 보기도 전에 어떤 복숭아를 꺼낼지부터 걱정하고 긴장할 필요가 없다. 이들은 서로의 텃밭에서 기른 과일을 경계심 없이 마음껏 나눠 먹을 수 있으며, 딱복파의 식탁에도 물복파의 식탁에도 초대받을 수 있다.


넘쳐흐르지 않으면 어떠한가. 적당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렵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적당함만의 매력이 있다. 미워하거나 미움받지 않으면서, 모든 복숭아를 달콤하게 맛보면서, 우리는 그렇게 '적당히' 행복할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 내게 물복파인지 딱복파인지 질문할 때마다 생각한다.

 

'어 그러니까... 저는 적당히 물렁하고 또 적당히 딱딱한 복숭아가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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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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