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이야기는 무엇보다 재밌어야 해요." - '발가락 육상천재' 김연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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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뚱하고 발랄한데 은근히 그로테스크하다. 연극 <발가락 육상천재>는 그런 작품이었다. 바닷가 마을 초등학교 육상부, 매번 1등을 차지하는 정민과 그런 정민에게 일등을 빼앗긴 ‘전 1등’ 호준, 만년 2등인 상우와 꼴찌만 하는 은수까지. 현실 어디에선가 있을 것 같은 이들에게 공감하고 있으면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캐릭터인 인어가 불쑥 나타나 이야기를 더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경쟁 상황에서 느끼는 질투심과 열등감 같은 보편적인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환상적인 방식으로 펼쳐진다.
지난 8일, <발가락 육상천재>의 매력적인 세계를 만들어낸 김연주 작가를 만났다. <양질의 단백질>과 <육시내고향>의 작연출을 맡고, <자전거도둑헬멧을쓴소년>을 각색하기도 했던 그는 심오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무엇보다 재밌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는 연극에 국한되지 않고 앞으로 계속 재미있고 대중적인 이야기를 쓰고 싶다. <발가락 육상천재> 속 무대를 뛰어다니는 인어처럼, 세상 곳곳에서 김연주 작가의 이야기와 마주칠 날을 기대해본다.
다리 달린 인어가 나오는 이야기
“모든 인물에 제가 조금씩 들어 있는 것 같아요.”
반갑습니다. 먼저 간략한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극 연출 전공 후 연극 대본과 시나리오, 드라마 대본 등 다양한 글을 쓰고 있는 김연주입니다. 지금은 영상원에서 시나리오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발가락 육상천재>는 어떤 작품일까요?
계속되는 경쟁 속에서는 매번 이기는 사람과 지는 사람이 생기는데 그들이 각자 받아들여야 하는 몫이 무엇일까, 그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발가락 육상천재>는 그런 고민을 해보는 이야기입니다. 경쟁에 대한 고민은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는 것이지만, 열두 살이라는 나이는 경쟁에서 실패의 쓴맛을 처음 경험하는 나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처음 겪는 감정들을 열두 살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대처해갈까 고민하며 쓴 작품이에요.
<발가락 육상천재>는 2020년에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초연되고 여러 지역 공연을 거쳐 올해 소극장판으로 돌아왔는데요, 처음과 비교해서 달라진 게 있다면 무엇일까요?
이 작품을 쓰기 시작했을 때는 1등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전학생에게 1등을 빼앗긴 호준의 입장에 몰입했어요. 1등이 아니면 재미가 없는 호준이가 어떻게 다시 달릴 수 있을까 많이 생각했죠. 재연하면서 보니 은수와 상우에게 눈길이 가더라고요. 1등인 정민이와 어울려 다니는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 사회생활을 한다는 느낌도 들었고, 그렇게 친구를 인정해주는 게 일종의 스포츠맨십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번 공연에서는 호준의 1등 집착보다 은수와 상우가 보여주는 스포츠맨십에 더 초점을 맞추려 했습니다.
연극의 배경이 바닷가 마을의 초등학교 육상부라는 것이 독특했어요. 배경을 정하게 된 계기나 이유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바다와 육상을 연결했던 건 아니에요. 단순하게 경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별다른 도구 없이 맨땅에서 맨몸으로 달리며 경쟁하는 육상의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경쟁이 계속되는 육상부에서 한 아이가 거짓말을 한다면 어떤 거짓말을 할까, 육상은 달리는 종목이니까 다리가 없는 인어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인어는 거짓말에서 탄생한 거니까 한 번 더 꼬아서 꼬리 대신 다리가 달린 인어가 나오면 어떨까 생각했죠. 인어가 나오려면 바다가 있어야 하니 자연스레 바닷가 마을 초등학교 육상부가 배경이 되었습니다.
<발가락 육상천재>는 네 명의 개성 있는 인물이 돋보이는데요, 작가님이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 있다면 누구인가요?
모든 인물에 제가 조금씩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1등을 질투하고 패배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호준이한테 많이 이입했는데, 나중에는 은수에게도 공감이 되었어요. 친구들과 경쟁하거나 뭔가 갈등이 있을 때 그걸 피하고 싶어서 입버릇처럼 ‘맞아 맞아’ 하고 그냥 넘어가는 모습이 제게도 있거든요. 상우도 그래요. 앞에서는 아닌 척하면서 뒤에서는 질투하고, 연습해보자는 은수의 제안에도 어차피 결과는 정해져 있다고 말하는 현실적이고 염세적인 모습에서 제가 보이기도 합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고민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발가락 육상천재>를 만들며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다면 들려주세요. 만들면서 어려웠던 부분이나 고민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주제의식이 납작해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게 힘들었어요. ‘1등이 최고야’라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에요.’ 같은 뻔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죠. 1등하면 재미있고 기쁜 건 사실이니까요. 1등이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 같은 결론이 아니라 경쟁 상황에 놓인 아이들이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변화를 겪는지 보여주고 싶었어요. 마지막에 이르면 매번 1등을 하던 정민이조차도 실패를 경험해요. 모두가 발가락을 똑같이 하나씩 잃어버리기도 하고요. 그렇게 실패를 경험하고 나면 이들이 다시 한번 달릴 동력이 생길 수도 있을 거라 믿었어요.
저는 인어의 존재가 주제를 납작하지 않게 만들고 연극을 예측 불가능하게 이끌어가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해요. 인어의 외양이나 성격은 어디서 영감을 받으셨나요?
인어가 희생양이나 제물처럼 정적인 존재로 보이기를 원치 않았어요. 게다가 이 극에서 인어는 호준이의 거짓말로 탄생한 존재이기에 그 거짓말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보니 흔히 생각하는 인어와는 다른 외모에, 말투나 행동도 톡톡 튀는 캐릭터가 탄생했어요. 사실 인어의 디테일한 부분은 인어를 연기하신 박창욱 배우님이 찾고 완성해주신 게 많아요. 배우님이 실제 대사를 읽는 걸 보며 거기에 맞게 제가 대사를 수정하거나 추가하기도 했습니다. 무대 위에서 볼 수 있는 인어의 생동감 넘치고 발칙한 모습은 배우님이 다 살리신 거예요. (웃음)
여러 차례 실제 초등학생 앞에서 공연을 한 적도 있는데요, 기억에 남는 반응이 있었을까요?
수원 공연이었는데, 부모님과 함께 연극을 보러 온 어린이들이 많았어요. 그 친구들이 연극을 보면서 일어나기도 하고,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이러면 안 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해설을 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완전히 몰입했다는 의미잖아요. 사실 요즘 초등학생은 성인 못지않게 다양한 정보를 빨리 접하니까 연극을 유치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즐거웠습니다.
이미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서 멀어진 작가님이 열두 살 아이들의 이야기를 만드는 건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작가님이 어떤 방법으로 이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들어보고 싶어요.
처음에 열두 살의 이야기를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는 인터넷으로 열두 살과 관련된 온갖 기사와 자료를 찾아봤어요. 그런데 그렇게 얻은 정보로 열두 살의 이야기를 쓴다면 너무 피상적인 이야기가 되겠더라고요. 그런 식이라면 열두 살 아이들이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더 낫겠죠. 그렇다고 제가 열두 살이던 때를 생각하며 이야기를 쓰자니 제 또래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지금의 열두 살이 그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어요.
애초에 열두 살 친구들과 시간을 오래 보내지도 않는 데다가 주변에 아는 열두 살도 없으니, 열두 살이라는 나이에 너무 연연하지 말고 제가 가진 고민 중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공감할 만한 걸 찾아보기로 결심했어요. 당시 대학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어요. 그런 종류의 스트레스는 나이와 상관없이 항상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렇게 <발가락 육상천재>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적인 작가가 되겠다는 다짐
“관객이 보는 게 가장 정확해요.”
작가님은 어떤 청소년극이 좋은 청소년극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엄청 어려운 질문인데요. (웃음)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저는 일단 이야기가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재미가 있다는 건 이야기가 관객과 뭔가 통했다는 의미잖아요. 재미가 없다면 거기에 아무리 좋은 의미를 넣어도 관객이 끝까지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발가락 육상천재>는 어떤 청소년극이 되기를 바라나요?
실제로 열두 살 즈음인 관객들은 무대 위 인물들을 보며 자신이 하는 고민이 전혀 불편하고 이상한 게 아니라는 걸 느꼈으면 좋겠고, 성인 관객이라면 자신의 열두 살을 회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해요. 무엇보다 나이와 성별에 상관없이 대중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여지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영상을 공부하고 계시고 시나리오도 쓰신다고 하니 극작가에 한정되기보다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작가님이 이야기를 쓰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원래 연극원 연출과에 다니면서 기존에 있는 대본으로 연극을 만들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유명하다는 작품을 봐도 제가 크게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극 공부를 하는 저도 그렇게 느끼는데, 관객은 더하겠구나 싶었죠. 제가 직접 재밌는 걸 써보고 싶어졌어요. 그냥 다른 사람이 좋다니까 앉아서 보는 게 아니라, 진짜 재밌어서 극장에 앉아 있을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극작을 시작했는데, 연극이라는 장르 특성상 만날 수 있는 관객의 범위에 한계가 있더라고요. 더 다양한 사람에게 쉽게 다가가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영상쪽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작가님의 요즘 관심사는 무엇인가요? 써보고 싶은 주제가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요즘은 이 경쟁 속에서 작가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해요. 쓰고 싶은 시나리오도 열등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경쟁, 그리고 경쟁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열등감 같은 게 지금의 저한테는 굉장히 중요한 주제예요.
작가님 꿈은 무엇인지도 들어보고 싶은데요.
저는 꼭 연극이 아니더라도 대중적인 작가가 되고 싶어요. 예를 들어 관련된 공부를 한 특정 소수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기보다 그냥 우연히 공연을 보러 온 관객이 재밌다고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쓰길 바라요. 다양한 사람을 포용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발가락 육상천재> 관객분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제가 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시면 좋겠습니다. 관객들이 보는 게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웃음) 관객 각자의 방식대로 연극을 즐겨주시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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