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호그와트에는 못 가더라도 외계인이랑 여행은 꼭 해야겠어요 [드라마]

SF 드라마 <닥터후> 파헤치기
글 입력 2022.11.07 15:46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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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무늬 흉터가 있는 소년의 이야기를 읽고 나서 부엉이의 방문을 애타게 기다린 아이가 나 혼자만은 아니리라 확신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엉이가 아니라 그가 물어다 줄 입학 통지서를 기다린 것인데, 그 통지서는 아무 학교의 입학 통지서가 아니다. 마법 지팡이를 들고, 하늘을 나는 빗자루를 타고, 상상 그 이상의 모험이 펼쳐지는 별세계로 끌어들이는 초대장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 초대를 끝끝내 받지 못했다. 입학할 나이가 지나고도 몇 년간은 이런저런 이유 탓에 입학이 미뤄지는 것이라 자위했으나, 입학은 무슨, 졸업할 나이도 지나버린 현재에 이르러서는 마법 학교의 만학도가 되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해리포터>의 마법 세계로 떠나겠다는 소망은 고이 접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유치한 상상을 그만두고 현실에 집중한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까지도 기다리고 있는 별세계로의 초대가 남아있으니, 바로 외계인 ‘닥터’와의 여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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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후> 뉴시즌1 포스터 ⓒBBC

 

 

 

외계인과 함께하는 시공간 모험기 <닥터후>


 

<닥터후>는 외계인 주인공 ‘닥터’가 지구인 동반자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에피소드 위주의 영국 드라마다. 1963년에 처음 방영된 <닥터후>는 과거 여행에서는 역사를, 미래 여행에서는 과학을 가르치는 교육용 드라마였으나 점차 인기를 끌면서 드라마, SF, 모험 장르의 성향을 띠게 되었다. 영국 대중문화의 대표 격으로 자리 잡은 이 드라마는 1990년부터 휴방기를 맞았지만 공백 기간에도 TV 영화, 소설, 오디오 등의 스핀오프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리고 2005년, ‘뉴시즌(New Season)’으로 일컬어지는 새로운 시리즈로 돌아와 지금 세대에까지 인기를 끌고 있다.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한 드라마가 운영될 수 있었던 데에는 SF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설정의 공이 크다. <닥터후>에는 ‘재생성’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이는 닥터의 종족이 가진 고유 능력이다. 닥터는 위험한 상황에서 죽음 대신에 재생성을 선택하고 새로운 몸을 얻는다. 그렇게 얻은 신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외모와 인격을 지니지만 기존의 지식과 기억은 여전히 유지한 채다. 재밌는 사실은 이 설정이 드라마 제작 전부터 있던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닥터를 연기했던 배우가 예정되지 않은 하차를 하게 되면서 급조해낸 개념이라는 점이다. 궁여지책으로 만들어진 설정이지만 이후 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가 자연스럽게 바뀔 수 있도록 하며 드라마 닥터후의 장수 비결 중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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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에 방영한 <닥터후> 시즌1과 1대 닥터 ⓒBBC

 

 

 

시공간을 초월해 사랑받는 외계인을 만드는 작가들


 

<닥터후>의 또 다른 장수 비결은 드라마의 방향성이 유연하게 바뀐다는 점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할 뉴시즌 <닥터후>는 지금까지 총 13 시즌 제작되었고 그 과정에서 3명의 메인 시나리오 작가를 거쳤는데, 각기 다른 특색을 뽐내며 시즌을 완성했다. 세 명의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에 열 개가 넘는 시즌이 이어지더라도 반복적이거나 진부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새로운 시즌의 문을 연 러셀 데이비스는 시즌1부터 시즌4까지의 메인 작가를 맡았다. 러셀은 SF보다는 정서적인 면에 치중하여 스토리를 구성했다. 그가 담당한 시즌에서는 닥터의 초월적이고 영웅적인 면모가 잘 드러나고, 영웅이 겪는 고통이나 인물 간 갈등과 감정을 주로 다룬다. 2000년대 이전의 닥터후와 성향이 달라 기존 팬들의 불만이 많았으나 러셀은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며 대중들도 그만의 닥터후에 빠져들게 했다. 9대 닥터와 함께 시작한 러셀은 10대 닥터와 함께 하차하였고, 그 이후 스티븐 모팻이 메인 작가를 맡아 시즌5부터 시즌10까지를 만든다. 


스티븐 모팻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영국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 <셜록>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탐정 드라마인 <셜록>에서 치밀한 전개를 보여준 것처럼, 모팻은 시공간을 오가는 닥터의 특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밀도 높은 스토리를 흥미진진하게 써낸다. 도전적일 정도로 독창적인 전개 탓에 기존의 설정에서 과도하게 벗어난다는 평을 받기도 하지만, 판타지나 SF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가장 재밌게 볼 이야기들을 완성한다. 그는 11대 닥터의 탄생과 12대 닥터의 끝을 장식하고 크리스 칩널에게 메인 작가 자리를 넘긴다. 


크리스 칩널은 전 시즌을 통틀어 처음으로 여성 닥터를 내세움으로써 화제성 있게 시작했으며, 이어지는 에피소드에서도 여러 사회 문제를 꾸준히 언급한다. 방영 기간이 긴 시리즈물이 품을 수 있는 고질병인 구시대성을 타파하기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그러나 교훈을 전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지, 재미가 반감되었다는 후기가 많다. 칩널은 시즌 11부터 13까지를 모두 13대 닥터와 함께 운영하고 2021년, 함께 하차했다. 이후 시즌14는 아직 방영 전이지만, 뉴시즌의 초기를 담당하던 데이비드 러셀의 메인 작가 복귀가 확정되어 팬들의 기대가 커지고 있다.

 

 

 

외로운 외계인과 그 손을 잡아주는 지구인 동반자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끊임없이 변모함에도 불구하고 <닥터후>에 장기적인 팬이 있는 이유는, 그 변모 속에서도 주인공에게 일관적인 특징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테다. 재생성을 하는 닥터는 앞서 설명한 대로 외모와 인격이 바뀌지만, 어떤 모습을 취하더라도 항상 인간에게 호의적이다. 이 특징은 닥터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보여지며 해당 닥터의 매력으로 자리매김한다. 

 

9대 닥터는 가장 가까이서 이끌어주는 멘토라는 느낌을 주고, 10대 닥터는 대의를 지킬 만큼 강하지만 결국에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한계적 존재임이 드러난다. 11대 닥터는 호기심 많은 동생과 연륜 있는 노인의 분위기가 동시에 나서 보살핌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신통한 친구 같다. 예외적으로 인간을 싫어하는 듯했던 12대 닥터조차도 시즌이 진행됨에 따라 점차 인간 친화적으로 변해, 조금씩 사람의 손을 타기 시작하는 가여운 떠돌이 개처럼 보인다. 마지막으로 13대 닥터는 인간에게 호의적이면서도 잊을만하면 초월적인 언행을 해 친근하면서도 절대 만만하지 않은 캐릭터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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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서부터 9대, 10대, 13대, 11대, 12대 닥터 ⓒBBC

 

 

인간을 좋아하지만,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이 존재들은 홀로 하는 여행이 외로워 인간 동반자와 함께 다닌다. 닥터마다, 그리고 시즌마다 동반자가 여럿 등장하는데, 이들은 우리처럼 평범한 삶을 살다가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일상에 끼어든 닥터로 인해 인생 설계 전체가 뒤흔들리는 경험을 한다. 닥터와의 위험천만한 여정이 두렵지 않다는 건 거짓말이겠지만, 그 위험을 무릅쓰고도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이니 닥터가 내미는 손을 거절할 리 없다.

 

 

 

에피소드 맛보기: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는 결국 우리?


 

닥터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뉴시즌4 10화 ‘미드나잇(Midnight)’이다. 어느 미래의 어느 행성에서, 닥터가 탑승한 관광 우주선이 갑자기 멈추고 밖에서는 알 수 없는 충격이 가해진다. 사람들의 공포가 점점 커지는데, 한 승객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따라 하는 발작 같은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그 승객을 우주선에서 추방하려 하고, 닥터는 그들을 막고자 하지만 이미 패닉에 빠진 사람들은 닥터마저 의심한다. 그러던 중 이상 증세를 보이던 승객은 언젠가부터 닥터의 말만 흉내 내기 시작하더니, 결국 남의 말을 반복하는 증세는 닥터에게로 전이되고 만다. 이를 본 사람들은 미지의 위협이 닥터에게 옮겨갔다고 생각해 그를 추방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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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언어 능력을 잃은 닥터, 그리고 그를 추방하려는 사람들 ⓒBBC

 

 

이 에피소드는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태도를 취하던 10대 닥터가 인간에게 배신당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메인 작가는 러셀 데이비스였지만 이 에피소드는 스티븐 모팻이 쓴 각본으로, 두 작가의 성향이 적절히 섞여 감정으로 인해 일어나는 혼란과 SF 환경에서 느끼는 스릴이 잘 버무려져 있다.

 

위험한 상황에서 혼자 이성을 잃지 않는 닥터를 도리어 의심하고 협박하는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더러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지막에 사건을 해결한 인물의 이름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점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기는커녕, 무시당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과 겹친다. 이 에피소드는 사람들을 위협한 무언가의 정체가 끝까지 밝혀지지 않으며, 진정 위협적이었던 것이 다른 게 아니라 군중이었다는 점이 특히 인상 깊다.


이처럼 <닥터후>는 특수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당장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상황을 비추는 에피소드가 많다. 이런 이야기는 지루하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 현실적인 문제를 흥미롭게 풀어줄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게 하여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 사실 이러한 강점은 SF 장르 전체의 특성이기도 한데, <닥터후>는 매 에피소드에 새로운 캐릭터와 집단이 등장할 수 있어 더욱 다양한 이야기를 푸는 것이 가능하다.

 

 

 

파란색 공중전화부스를 기다리며


 

<해리포터>에 ‘9외 3/4 승강장’이 있다면, <닥터후>에는 닥터의 타임머신인 ‘타디스’가 있다. 타디스(TARDIS, Time And Relative Dimension In Space)는 파란색 공중전화부스라는, 꽤 시대성 짙은 외형을 띠면서도 시공간을 따지지 않고 항상 태연하게 등장하는 뻔뻔함이 매력이다. 닥터의 초대를 받은 동반자들이 처음 타디스 안으로 들어설 때, 시청자들도 함께 들어가며 닥터의 세계로 입장한다. 현실과 SF의 경계를 부숴주는 동반자들과 타디스 덕분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드라마 속으로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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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를 가로지르는 타디스 ⓒBBC

 

 

특히 나처럼 과도한 몰입을 하는 경우에는 언젠가 나도 이 동반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을 품게 된다. 한 가지 말해주자면, 타디스와 닥터는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주변을 살펴야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내 앞에 나타날 파란색 공중전화부스를 나는 여전히 기다린다.

 

 

[김지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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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  
  • 정수안
    • 맞긴한데 진심 카팔디까지가 마지노선인듯..
      카팔디까지는 기대가 됐는데 조디부터는 스토리가 더 이상 기대가 안돼
    •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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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수안
    • 또 저는 러셀시절은 Blink
      모팻시절은 사일런스 편을 제일 좋아합니다
    • 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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