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빌런은 악당이나 범죄자였다. 고담시티를 마음대로 활개치며 베트남을 약 올리는 조커나 손가락 하나로 세계의 절반을 날려버린 타노스 같은 악당. 사실상 평범한 나 같은 사람들은 희생양으로도 운이 좋아야 마주할 수 있는 스타성 있는 빌런들이다. 그 빌런들을 마주하면 99%의 확률로 죽거나 겨우 1% 미만의 확률로만 히어로에게 구출당하겠지만 어쨌든 ‘빌런’이라는 글자에 흐르는 매력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악당들.
그런데 21세기 빌런들은 어딘가 조금 다르다. 21세기의 빌런은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회사에서 출몰한다.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소소한 빌런들이 21세기의 악당이다. 빌런이라는 단어의 무게도 그만큼 약해져서 이제는 조커나 타노스는 빌런이 아니라 빌런 조상쯤은 되는 것 같다.
내 일상 속의 빌런은 다음과 같은 장소에 도사리고 있다.
[지하철] 내리는 사람을 밀치며 지하철을 타는 사람들. 임산부석에 앉아있는 남자. 다리를 벌리고 앉아있는 아저씨. 이어폰 없이 시끄럽게 게임을 하는 사람.
[길거리] 길을 걸어가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 반려동물의 변을 치우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는 사람. 인도로 운전하는 오토바이. 여러 명이 늘어서서 함께 걷느라 길을 막는 무리. 술에 취해서 아무 곳이나 붙잡고 토하고 있는 사람. 사람이 길을 건너고 있어도 머리를 들이미는 운전자.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오토바이.
[회사] 특정될 수 있어 생략.
짜증을 유발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는 상식 밖의 사람들을 나는 21세기 빌런(Villain)이라고 부르고 있다. 세상의 존멸을 두고 싸워야 하는 대규모 전투에 휘말리지는 않아도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작은 전쟁을 치르고 산다. 그러니 어떻게 보면 조커보다 당장 내 앞에서 담배연기를 휘날리며 일명 ‘길빵’을 하는 저 아저씨 빌런이 더 악독하게 느껴지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인류에 크나큰 위해를 끼치지도 않지만 나에게는 한없이 유해한 스몰 빌런. 게다가 매력적이지도 않으니까.
오늘만 해도 6명의 길빵 빌런을 마주했다. 운동하러 나가는 길에는 잔뜩 술을 먹고 휘청거리는 만취 빌런과 어깨를 부딪혔다. 주말 동안 친구들을 보면서 충전한 인류애가 바닥까지 쭉쭉 닳아 없어지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다.
빌런들은 이곳저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내가 여유가 사라지고 웃음이 사라질 때쯤 떡하니 앞에 서서 내 삶을 갉아먹는다. 친구들이 말하는 빌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톡방에 그대들의 빌런이 무엇이냐 물으니 각양각색의 빌런들이 튀어나왔다. 말 끊는 사람, 하기 싫은 것 하라고 강요하는 사람, 날 화나게 하는 사람, 예의없는 사람, 비효율적인 사람 등. J는 상사의 이름을 대기도 했고 S는 대뜸 욕을 했다.
우리가 마블 세계관에 살지 않아서 다행인 것은 당장 내 집을 부수거나, 내 가족을 인질로 잡아놓는 빌런이 없다는 점이고, 21세기 서울 세계관에서 살아서 불행한 것은 사소한 빌런이 내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있다는 것일 테다. 그러니까 조금 더 넓고 유해진 빌런의 정의와 경계는 ‘싫은 사람’, ‘이해가 도무지 되지 않는 사람’,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사람’ 쯤이지 않나.
길빵 빌런, 실내 노마스크 빌런, 영화관 관크(공연 및 영화 관람을 방해하는 모든 행위) 등 공공의 빌런을 마주했을 때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은 하나다. ‘대체 왜 저러지?’ 답을 바라는 질문은 아니다. 순수한 궁금증일 뿐. 대체 그러니까 왜...저러지? 왜 그들은 어디서 배워오기라도 한 듯 유사한 행위들로 사람들을 당황스럽게 하고,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것인가.
그래서 그런지 빌런을 다룬 소설이나 영화의 최근 트렌드는 빌런을 교화시키기보다는 주인공이 ‘각성’한 후 더 한 레벨의 악인이 되어서 그들을 처치하는 구도를 많이 사용한다. 통쾌하기는 그쪽이 더 통쾌하다. 선이 악을 이기는 구도는 아름답지만 뻔하니까. 그러나 악이 악을 이긴다는 구도는 자극적인 동시에 어딘가 찜찜하다. 그래도 악인데, 응원해도 되는 건가...싶다. 현실에서 사이다 대처라고 불리는 것들도 대처가 과하거나, 옳지 못한 방향인 경우도 많으니까. 무작정 응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에에올)에 나오는 조부 투바키 역시 21세기형 빌런이다. 빌런이라기엔 조금 안타깝고, 또 짠한 모습이니. 빌런이라기보다는 그냥 때로의 너와 나 우리의 모습같다. 무력감과 허무함,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는 삶은 굳이 모든 우주를 다 경험한 조부 투바키가 아니더라도, 익숙한 감정이다. Nothing matters.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게 무슨 소용이람. 이런 것들 말이다.
영화는 한 사람 몫의 세상의 무너짐을 막는 벽으로 다정(多情)을 제시한다. 다정은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이 많은 상태를 뜻한다.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었던 열쇠가 마음 한 톨이라니. 너무 뻔하고, 너무 완벽하다.
스크린 너머로 바라본 에블린 멀티버스의 다정은 너무나도 단단하고 완전한 감정이라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다정함이 최강의 방패고, 최고의 무기다. 그 사실은 덩달아 21세기 서울 멀티버스의 나도 무적으로 만들어줄 것만 같았다.
날 선 감정을 품고 살다 보면 결국 가장 많이 베이는 것이 나라는 것은 언제나 잊지 않고 살기로 하지만 쉽지만은 않다. 누구를 미워하는 것도 힘든 일인데, 그 힘든 일을 꼬박꼬박 하고 사는 것도 징그럽다. 이상하게도 다정함은 가끔 오지랖이라는 누명을 쓴다. 나도 그렇게 내가 기꺼이 내 준 다정함을 오지랖으로 오해하기도 했다. 그만큼 내 주변과 나는 메말라 있었던 것 같다.
- 너는 가끔 그렇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선의를 베푸는데, 또 어떤 순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냉담해. 그러니까 넌 이상한 박애주의자야.
영화를 보고 나니 K가 해준 말이 생각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K에게 전화를 했다.
- 나 이상한 박애주의자 말고 이상하고 다정한 사람 할래. 그게 좋은 것 같아.
- 두 개가 뭐가 달라? 넌 지금도 다정해.
- 다정함을 무기로 쓰면 진짜 최강일 것 같아.
- 그치 다정하게 구는 사람한테 어떻게 못되게 굴어. 그게 진짜 기 센 거야. 근데 왜?
나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집까지 뛰어갔다. 다정함을 무기로 쓰다니, 멋지지 않은가. 무기와 다정함이라는 단어의 조합에서 오는 이질적인 감각이 잘각잘각 부딪히면서 따뜻한 열을 냈다.
어디에나 빌런은 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 어딘가에도 다정함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다정함을 맞대면 조금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가끔 길을 잃으면 내 세상은 무너져도, 네 세상은 온전하길 바라는 어이없을 정도로 무모한 에블린의 다정함을 힐끔거리면 된다.
올 앳 원스는 아니더라도, 시차가 생기더라도 각자의 우주에 다정의 씨앗이 심기면 좋겠다.
아무리 허무하고 기댈 것 없어도 결론은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조그만 다정함에도 날 세운 마음이 무뎌지기를 바란다. 바닥없는 다정함과 21세기 빌런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너무 허무맹랑한 저 먼 우주의 이야기가 아니기를. 그리고 날 메마르지 않게 해주는 여러 우주의 당신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바닥없는 다정함을 가져주세요. 여러분도 같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