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 우리는 왜 우리를 숨겨야 하나

성폭력 피해 사실이 비밀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비밀이 없다.
글 입력 2022.10.18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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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라는 말이 있다. 용의 머리처럼 화려하게 시작해 뱀의 꼬리처럼 초라하게 끝난다는 뜻의 사자성어다. 특히 창작물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라도 처음이 중요하다. 영화도 처음 10분이 강렬해야 보고 소설도 첫 문장을 인상 깊게 시작해야 읽는다.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은 사두용미에 가까웠다. 특별할 것 없는 시작에 한 권을 다 읽는 게 힘겨우리라 짐작했는데, 정신을 차리니 새벽 5시,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책을 닫았다.

 

책을 닫고 나서도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결국 잠을 설쳤다. 여운이 오래 간다. 무엇이 이렇게 잠 못 들게 하는지 생각해보니, 흡인력 있는 전개와 두 가지 추리 요소, 현실을 기민하게 다룬 섬세한 관찰력, 생각할 점을 계속해서 던지는 문장과 스토리 구성이 그렇다.

 

소설의 시작은, 변호사 판옌중의 비밀스러운 아내 우신핑이 갑작스럽게 연락을 받지 않고 사라진 것에서 시작된다. 판옌중은 둘의 결혼 관계에 매우 만족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 비밀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캐물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만큼 상대가 가진 비밀을 묵인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우신핑이 사라지면서 아늑한 판옌중의 세계가 무너지고, 아내의 많은 비밀을 파헤친다.


 

비밀이란 그런 것이다. 비밀의 존재를 숨기고 없는 척할수록 그 비밀이 인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다. 어디를 가도 그 비밀이 따라온다. 시간이 쌓이면서 그 비밀을 지키고 싶기도 하고 없애버리고 싶기도 한 두 가지 생각이 끊임없이 경쟁을 벌이며 우리를 기진맥진하게 만든다. 111쪽

 

 

비밀이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원해서 비밀을 만든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극 속 인물들의 많은 비밀이 드러나며 진행되는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바로 이 흡인력 있는 전개가 가장 매력적인 소설이다. 책의 뒷장이 줄어들면 독자는 비밀을 모두 읽게 된다. 끝나면 비밀은 사라지고 충격적인 결말만 남는다.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는 두 가지 추리 요소를 지니게 된다. 소설의 흐름을 따라가며 우신핑이 대체 왜 사라졌는지 추리하는 것이 첫 번째고, 익명의 일인칭 시점의 이야기가 대체 누구의 이야기인지 추리하는 것이 두 번째이다. 처음에는 당연히 이 사람이라 짐작했다가, 갈수록 반대되는 성격에 그럼 대체 누구인지 고민하게 되고, 다시 저 사람인가 생각하다 보면 궁금증이 커져 책을 읽는 속도가 빨라진다. 그러다 첫 번째 추리 요소와 두 번째 추리 요소가 마주치는 순간 경악하게 된다. 그쯤부터는 결말까지 손에서 놓을 수가 없다.

 


오드리는 그 글에서 어떤 문장을 거듭 읽었다. “코끼리는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간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기억력이 좋은데, 어떤 코끼리는 십몇 년 전에 지나갔던 수원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갈증에 시달리는 무리를 이끌고 그곳을 찾아가기도 한다. 그러니 코끼리는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을 영원히 잊지 않는다.” 이 문장을 마지막으로 읽고 오드리는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았다. 180

 


책 뒤편에는 “현미경으로 세상을 들여다보는 듯한 작가”라는 홍보 문장이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다루는 이 소설은 현실에서 보아온 익숙한 상황이 많이 보인다. 가해자의 미래를 안타까워하면서 감싸는 방식, 피해자가 먼저 꼬셨을 거라는 비난, 집안의 수치라며 가해지는 폭력. 대만의 작가가 대만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 이렇게 한국의 현 상황과 맞아떨어질 수 있나 싶다.


 

신핑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피해자였다. 그날 신핑의 옷차림이 그랬고 술에 취해 의식이 없었던 것도 그랬다.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에게 문제가 있었다고 몰아가기 쉬운 요소다. 사건이 일어난 이후의 정황도 그랬다. 신핑은 처음에 힘들어하면서 눈물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판옌중은 불안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신핑이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는 데까지 걸린 시간이 너무 짦았다……. 298


 

우신핑이 성적인 폭행을 당했던 사람처럼 보인 적이 있었던가? 그런데 어떤 모습이어야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 192

 

 

위 두 문장이 그렇다. 성폭력 피해자가 고소를 진행할 때 ‘성폭력 피해자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심을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과하게 괄괄하다, 당차다 따위의 말로 피해자는 어떤 형태를 지녀야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피해자가 아니라며 가해자의 죄를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모습이어야 그런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 당장 폭행으로 다리가 부러진 사람도 똑같이 행동할 리 없다. 그렇다고 폭행당한 사실이 의심받은 적이 있을까.

 

소설은 끝까지 어떤 모습이어야 성적인 폭행을 당했던 사람처럼 보이는지, 그런 모습이 있긴 한 건지 질문을 던진다. 누구보다 피해자를 믿고 지지하던 사람이 단 하나의 장면을 보고 신뢰를 잃어버리는 모습은 단순히 성폭력 피해자는 어떤 모습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편견까지 끄집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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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이며 노력한 변호사인 판옌중이 수사를 하는 방식과 폐쇄적으로 살아온 오드리가 수사하는 방식이 정반대인 부분도 작가의 관찰력이 드러난다. 단순히 질문의 형태에서 차이가 나는 것만이 아니다. 판옌중은 능수능란하게 자신을 속이거나 상대의 호감을 끌어내지만 오드리는 불안에서 야기되는 과장된 행동으로 오히려 상대의 입을 틀어막는다. 사소하지만 완벽하게 다른 방식을 보여주면서 캐릭터의 차이와 살아온 인생을 짐작하게 만든다.


 

친구의 상황이 자신보다 훨씬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사람들은 곧잘 질투심에 사로잡혀 불행감을 느낀다. 팔자 좋은 친구라고 생각했던 친구에게 불운이 닥쳤을 때 사람들은 그 친구도 결국 비슷한 처지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친구의 불운을 떠올리며 은밀한 행복감까지 느낀다. 이럴 때 그들의 우정은 허위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더없이 진실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156

 

 

우신핑의 직장 동료 젠만팅도 그런 캐릭터이다. 우신핑의 조용함과 비밀스러움을 동경하고 좋아했으면서도 그에게 흠이 있단 사실을 깨닫자 마자 흥분해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전혀 관심 없는 남편 스더구이나 처음 본 오드리에게 우신핑과 그의 가족에 대한 비밀을 털어놓으며 즐거워하는 젠만팅은 언뜻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만 현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캐릭터다.

 

작가는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하나씩 표현하고 위와 같은 문장을 쓰면서 젠만팅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한다. 이런 음침한 감정을 한 번도 품어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 싶다가도 외면하는 나는 젠만팅과 얼마나 다른 사람일까.

 

다양한 장치 덕에 인물이 입체적으로 보인다. 마치 바로 옆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 각색의 매력이 있는 인물은 낯선 이름에도 불구하고 캐릭터의 구분을 확실하게 돕는다. 나아가 캐릭터가 느끼는 불편함, 애틋함에 공감하게 한다. 여러 인물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살아있다니. 얼마나 많이 관찰하고 고찰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너무 외로웠으니까요. 그녀의 대답에 장중쩌는 콜라를 마시다 말고 멍하니 그녀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순간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서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두 발은 바닥에 단단히 붙어 있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했다. 그는 마음이 움직였던 것이다. 그 말을 내뱉은 순간 오드리의 목소리가 장중쩌의 마음을 관통했다. 너무 외로웠으니까요. 그녀는 장중쩌가 오랫동안 이 세상에 대해 품고 있던 이해하기 힘든 당혹감을 한마디로 정리해버렸다. 246

 

 

현실을 그대로 옮겨둔 듯한 관찰력은 한 사람의 이중성과 객관적이지 못한 진술을 하는 이유, 위의 문단처럼 연대의 시작 등에 이르도록 많은 현상에 이유를 묻고 작가는 나름대로의 답을 적는다. 정답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답니다. 기민한 관찰력이 섬세하고 공감되는 문장을 만들어낸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고 풀어낼 수 있는지. 밑줄 친 문장이 많아 연필을 한 번 갈아야 할 정도다.


 

판옌중은 장궈구이가 한 번쯤 시간을 내어 의뢰인의 말에서 진위를 가려내는 방법을 교육해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담당 사건이 늘어나면서 장궈구이가 아무 말도 해주지 않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이 피해자라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래야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이 죄상을 부인하는 것은 단순히 심상의 악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의 선량하고 정직한 일면에 비련을 버릴 수 없어 뻔뻔스레 사실과 다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131

 

 

우리에겐 비밀이 없다는 말은 다양한 방식으로 읽힌다. 위의 이야기를 보면 판옌중은 비밀이 없다는 말에서 모순을 느낀다. 사랑하는 사람인 우신핑의 비밀을 지켜주어야 할지 아니면 파헤쳐야 할지 갈등을 느끼기도 한다. 한편 판옌중도 우신핑에게 차마 말하지 못한 비밀을 안고 산다. 둘은 결혼 후에도 오랫동안 마주하기 두려운 비밀을 안고 서로에게 숨기면서, 비밀이 있어도 없는 척 넘긴다. 없다고 말하면 없어지는 것이다.

 

한편 성폭력 피해자의 입장에서도 이 문장을 읽을 수 있었다. 비밀이 없는 마을에서 자란 우신핑은 대학교에 입학해서도 말도 안 되는 비난에 시달렸고, 결국 과거를 철저히 지우기로 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우신핑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경멸한다. 비밀이 없는 마을은 피해자에게 더 가혹하다. 순결을 잃었다며 딸에게 손찌검을 하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묵인하는 가족은 끔찍하지만 기시감을 준다. 이 상황에서 비밀이 없다는 사실은 전혀 좋은 것이 아니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 비밀이 없기 때문에 가해 사실을 숨기고 피해자를 지우는 일이 빈번하다. 이 소설은 이런 지워진 피해자를 되찾는다. 사회적 시선 때문에 현재의 평화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서, 혹은 다양한 많은 이유로 숨어든 여성을 끄집어낸 이 소설은,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를 억압하며 비밀로 만든 많은 시선에서 자유롭게 풀어준다.

 

피해자의 비밀이 지켜지고, 또 한편으로는 비밀이 없을 수 있는 세상. 소설의 제목은 꼭 그런 바람이 담겨있는 듯 하다.

 

 

한편 나를 오랫동안 고민스럽게 한 것은 이것이 나만의 문제인가 하는 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정말로 다들 하나의 얼굴, 하나의 생각, 하나의 논리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일까? 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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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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