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새로운 눈을 단 미술 감상자 - 기울어진 미술관

글 입력 2022.10.1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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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미술관


 

모두가 미술관과 박물관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여행계획을 세울 때 지역의 미술관을 방문 1순위로 세우는 나와는 달리, 미술관이나 박물관에는 전혀 흥미가 없는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미술관, 박물관, 공연, 전시 등의 문화생활은 모두가 사랑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는 사실이 내게는 굉장히 놀라웠다.


어릴 적의 나는 선생님과 부모님께 직접 선물과 편지를 만들어 드리는 걸 좋아했다. 알록달록하게 색칠하고, 클레이를 뭉쳐 반지를 만드는 일은 나와 받는 사람 모두 쉽게 행복해지는 방법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미술관을 좋아하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왜 미술관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두 가지 가설



*가설 1: 미술과 미술관이 내게 주었던 강렬한 감정 때문에


그랜드 캐니언을 그린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을 보고 느꼈던 웅장함('더 큰 그랜드 캐니언'). 현대미술관에서 본 김환기 화백의 푸른 그림(산울림 19-II-73#307). 박정민과 진영 배우가 나오던, 영상만이 아니라 조명과 공간과 울림이 하나의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미지에서 온 소식: 자유의 마을`).


미술관에 갈 때마다 매번 감동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커다란 미술관에서 작품을 대면하며 느꼈던 몇 번의 감동이 너무나 강렬하여 거기에 중독되어 버린 것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개인적으로 강한 감정을 동력으로 많이 성장하는 성향이기에 그런 순간을 툭툭 만나게 되는 미술관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설 2: 알록달록한 색깔을 좋아하기 때문에


두 번째로 색깔을 좋아하기에 미술관도 좋아하는 것 아닐까 하는 가설이다. 나는 매 계절의 색깔을 분명하고 선명하게 느끼고 이를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다. 인식하는 정도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으로 보자면 알록달록한 색깔들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첫 번째 가설의 예시 작품들도 '색'이 미친 영향이 컸다. 미술작품이 주는 깊은 메시지를 떠나 '다양한 색깔들이 어지럽지 않게 잘 모인 공간'이어서 미술관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가설을 세워 보았다.

 

 

 

내가 미술을 바라보는 방식을 넘어서 : <기울어진 미술관>


 

이처럼 나에게 미술관과 미술, 그리고 이 둘을 소비하는 방식은 단순하고 직관적이고 개인적이었다. 그 자체로 즐길 뿐, 전시된 작품과 전시회의 의미를 생각해보거나 사회적인 시선으로 조목조목 따져보지 못했다.


그림은 필연적으로 창작자의 생각과 시대의 요구가 반영되어, 순수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제작될 수 없다. 당연히 작가의 사심과 가치관, 사회적 배경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과거의 나를 성찰해보면 나는 이를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못했다. 어쩌면 비판 없이 들어오는 정보들을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는데, 책 <기울어진 미술관>은 내가 미술관에 가고 미술 작품을 볼 때 가지면 좋을, 새로운 눈을 달아주었다고 생각한다.


'미술 작품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은 이해하지만, 어떻게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독자들에게 이 책 <기울어진 미술관>을 추천한다. 명쾌하고 유익하고 논리적으로 정돈된 글을 통해 미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배워볼 수 있을 것이다.


 

(P. 9) 미국의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역사는 잘못 지어진 콘서트홀과 같아서 음악이 들리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는 글을 남겼다. 그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하자면, 오늘날의 눈에 맞춰서 옛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권력자의 시각에 맞춰서 서술되어온 미술사의 사각지대에 한 줄기 빛을 비추는 것과 같을 터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기울어진 미술관>을 살펴보기


 

기울어진 미술관_표1(귀도리).jpg


 

책 <기울어진 미술관>을 읽다 보면 익숙한 작품들의 '기울어짐'을 비로소 인지하게 된다. 생각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생각 없이 지나치던 가구 앞에 멈춰 서서 경첩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그 모양이 나비 모양이었음을 처음으로 인지하게 되는 것처럼 미술 작품을 멈춰 서서 낯설게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나의 예로 툴르즈 로트레크가 그러했다. 작가에 대해 알게 되며 작품이 다르게 보인 대표적인 예시다.


 

(P. 85) "툴르즈 로트레크의 그림은 성매매 여성을 '타락의 증거'로 묘사하거나 성적 대상으로 미화하지 않고, 인간적인 모습 그대로 그려낸다는 평가를 받았다. (…)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툴루즈 로트레크가 성매매 여성의 일상을 자세히 그릴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이야말로 성매매 장부 최상단에 올라가 있는 '특급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창가에 한 번 가면 몇 주일씩 머물 만큼 돈이 많은, 백작 가문 도련님이었다."

 


이외에도 <기울어진 미술관>은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하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 차근차근 이야기한다. 여성, 장애인, 동물, 성소수자, 노인, 유색인종, 어린이, 가난한 자, 그리고 병에 걸린 자. 다루어져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술 작품이라는 소재를 엮어 정돈된 글로 섬세하고 논리적으로 풀어낸다.


마치 증거를 기반으로 판사가 작성한 판결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시대적인 가치관과 이념이 담겨있는 미술 작품을 근거로 과거의 한계를 고발하고 현재를 질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P. 240) 요즘 거리에는 커샛의 후예들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적어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막는 제도적 장벽은 없다. 하지만 남성들만큼 여성들에게 길거리는 편안한 공간일까. 

 

여성들이 남성만큼 한적한 둘레길을 안심하고 혼자 걸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성들이 모임을 마친 후 서로의 귀갓길을 염려하며 "집에 도착하면 문자해"라고 인사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 김현경에 따르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장소'를 갖는다는 것이고, 그 자리를 주는 행위가 바로 '환대'다. 과연 여성들은 거리에서 '환대'받고 있는가.

  

 

책 <기울어진 미술관>은 감상자의 위치에서 작품을 받아들일 때 어떤 것들을 고려해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해주는 책이다. 생각해보지 못했던 작품 속 존재들을 마주하게 해준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가 있다. 기울어져 내려가 있는 쪽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감상자들이 새로이 눈을 달고 기울어짐을 인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앞으로 미술관에 가서 미술작품을 감상할 때 나의 태도를 바꿔 놓을 만큼 영향을 미친 책으로 많은 독자에게 추천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진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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