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해자의 얼굴들 : 우리에게는 비밀이 없다

글 입력 2022.10.16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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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띠지에 그리 쓰여있었다. 『화차』와 『도가니』가 결합된 책이라고. 전자의 영화를 재미있게 보았던지라 무작정 읽고 싶었다. 확실히, 초반 설정은 닮았다. 사라진 와이프를 찾아 나서는 남편. 와이프의 행적을 따라가다가 마주한 거대하게 늘어진 벽. 끝도 없는 기다란 것에 문이라는 게 존재하는지 아니, 작은 틈이라도 있는 것인지 아연실색하기만 하다. 동시에 분노하고, 답답하고, 억울하고, 두려움을 느낀다. 와이프가 비밀이 많은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베일에 겹겹이 싸인 사람인 줄은 몰랐던 탓이다. 남은 가족이 없다던 것과 달리 어머니와 형제 하나가 있고,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았던 게 되레 흔적이 되어 서서히 진실에 접근한다.

 

그런데 변주는 『도가니』와 결합되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어떤 면 때문에 언급한 것인지 의도는 알겠으나, 적절한 예시라기엔 차이가 많긴 하다. 자극적으로 피해를 소비하는 형태가 아닌, 성폭행 피해자의 관점을 선명하게 그려낸 <믿을 수 없는 이야기(Unbelievable)>와 차라리 비슷하다고 느꼈다.

 

실화를 바탕에 둔 영화 속 주인공은 성폭행을 겪은 후 진술을 번복한다. 가해자를 묘사하는 것이나 시간 등이 말할 때마다 은근히 달라지다가 아예 사건을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 작은 동네에서 따돌림당하는 건 수순이다. 거짓말로 '무고한'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 든, 질 나쁜 애 취급을 받으며. 기저에는 공포가 서렸다. 자신이 조금만 허튼짓을 했다간 순식간에 경찰서로 찾아가 곤란한 일을 만들 거라고. 한창 미투 운동이 한국에서 커지기 시작했을 때 생각보다 흔한 반응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동선이 겹쳐 어깨나 팔이 스치면 '아, 미안. 이걸로 나 미투하는 거 아니지?' 웃음을 곁들인 농담.

 

우리가 일상에서 체감하는 건 눈에 보이는 것들이다. 버젓이 보이는 조롱, 의도가 분명한 괴롭힘, 자신은 가해자 취급을 받을 위험만 있지 피해자가 될 일이 없음을 단언한 태도.

 

그렇다면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현저히 높은 사람들, 그러니까 여성들은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을까? 피해 당사자가 아닌데도 당사자성을 지닌 사람들은, 가까운 이의 피해에 어떻게 반응하겠냐는 것이다. 소설의 주안점은 여기부터다.

 

 

*

아래부터 줄거리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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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소설이라서 인물의 이름과 별칭이 조금 낯설다. 모든 인물을 적으면 20명은 될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나오는 비중과 상관없이 이야기의 축에 있는 인물들을 정리해 봤다.

 

- 우신핑: 사라진 와이프. 가족 등 과거의 흔적이 거의 없는 베일에 싸인 인물.

- 판옌중: 우신핑을 찾아 나선 남편. 변호사. 전 와이프에게 폭행을 휘둘렀다는 소문이 있다.

 

- 젠만팅: 우신핑이 일하는 학원 선생님. 우신핑을 동경하는 동시에 가십거리로 소비한다. 마치 전혀 다른 세계 속 이야기인 것처럼.

 

- 나나: 이름만 나와서 그의 상황이 만드는 질문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피해자다움, 좋아하는 마음과 강간의 상관관계 등 책에서 보여줄 이야기의 화두를 던진다.

 

- 오드리: 우신핑과 인터넷에서 만난 친구. 풍족한 만큼 결핍이 많다.

 

-쑹화이구: 화이쉬안과 남매. 건실하고 성실하고 인기 많고 반반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우호적인 편.

-쑹화이쉬안: 화이구와 달리 위축되고, 조용하고, 은근한 선을 긋는다. 우신핑과 마찬가지로 무언가를 감춘다.

 

*

 

소설은 우신핑이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 것에서 시작한다. 남편 판옌중이 이리저리 발로 뛰며 흔적이랄 게 없는 우신핑의 사적인 영역에 들어선다. 둘의 결혼 생활을 생각하면 전혀 생각도 못 했을 일이다. 각자의 비밀스러운 면을 아는 체하지 않고 바람 하나 불지 않는 평온한 강물처럼 잔잔히 보내는 것. 그게 둘의 암묵적인 서약이었다. 망망대해에서 발자취를 쫓는 판옌중의 애씀 때문인지 사건의 실마리가 그를 통해서 펼쳐질 것만 같다. 실은 그렇지 않다. 남편은 일종의 맥거핀이다. 그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그가 변호사로서 만나게 된 고객이자 옛 친구의 아들의 사건은 이야기의 축을 보여준다. 열여섯 살 나나. 대만 법상으로 합의했다고 한들 성관계를 맺어서는 안 될 때로 간주한다. 남자애는 억울하다. 분명 나나가 좋다고 했고, 나나는 다른 남자들과도 이미 그러고 다니는 앤데. 왜 자신만 벌을 받아야 하느냐는 말이다. 판옌중은 아이에게 물을 뿌리며 정신 차리라고 일러둔다. 그래선 안 된다고. 너는 법을 어긴 게 맞으니 잘못을 수긍하고 뉘우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며.

 

지극히 모범적인 말이면서 피해자의 관점은 하나도 담기지 않은 조언이었다. 어찌 보면 여기서 드러났다. 판옌중은 이야기의 주축도, 서포터도 될 수 없다. 남성이면서 변호사인 그는 일평생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가정을 단 한차례도 하지 않았을 테니까. 오히려 가해자 측에 섰으면 섰다지. 그래서인가. 비밀의 심연까지 내려간 인물은 비슷한 형태의 아픔을 가진 이들이다.

 

책의 저자 우샤오러는 속임수를 철저히 사용한다. 우신핑이 실종되고 모든 관심이 그의 행방에 쏠렸을 때, '나'라는 화자가 등장한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다가 어머니와 오빠가 살아있었다는 게 드러나고, 유난히 자신에게 냉정한 어머니의 태도 또한 드러난다. 우신핑의 오빠가 자신의 동생을 감싸며 어머니를 진정시키려던 노력과 '나'의 오빠가 보여준 다정함이 겹친다. 그래서 무의식 중에 '나'는 우신핑이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처럼 조각조각을 한데 모을 생각은 중반을 훌쩍 넘어가며 깨진다. 앞뒤 정황을 맞춰서 누가 '진짜' 피해자이고, 누가 '진짜' 가해자인지 알아맞히는 추측 게임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해오던 그 게임을 경계하는 것이 의미라고 봐야겠다.

 

오드리는 우신핑이 성폭행 피해자라고, 다른 이들은 그가 가해자라서 쑹화이구 집안을 망쳤다고 본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우신핑에 관한 몇 가지 단서를 얻는다. 아버지가 화물 트럭 운전사였는데 사고를 당했고, 집안이 넉넉지 못하다. 그런데 '나'는 4층까지 있는 집에서 물질적으로 풍족하지 않았는가. 그럼, '나'는 누구지?

 

우신핑에게 적대심을 드러내던 쑹화이쉬안. 자신의 핏줄을 이상하리만치 보호하려던 모습. 우리는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유약함, 무너진 멘탈, 슬픔과 비애에 허덕이며 피폐한 몰골 등)을 강요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사람마다 표현은 다를 수 있다고. 그런데 조금만 상황이 혼탁하면 갈피를 잃는다.

 

여기엔 분명한 선입견이 작용한다. 피해자의 반응은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완전무결까진 아니더라도 도덕적으로 옳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지켜보는 이들은 생각한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말이 정반대로 나뉘고, 상황이 극으로 치달을수록 말이다. 이상하게 모든 과녁은 피해자의 순수성과 가해자의 악마성을 향한다.

 

가해자는 '가해'를 한, 쉽게 말하자면 나쁜 짓을 저지른 이다. 그래서 과거의 그가 얼마나 나쁘든 놀라울 게 없다. 오히려 가해자의 범죄 행위의 근거로 쓰인다. 그럴 만한 놈이 그런 짓을 했다고. 이때 평상시의 조용하고 착하고 성실했다는 말이 들려오면 사람들은 소름 돋는다며 놀랄 뿐이다. 사람 겉만 보고선 믿을 수 없다며. 이 생각의 굴레가 문제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정반대의 사람이라고 간주하기에 피해자의 삶엔 '나쁜' 반전 따위 있어선 안 된다고 여기는 거다. 겉도 속도 모조리 착하고 선해야 피해자일 수 있다는 듯이.


 

사람들은 대부분 눈을 감고 귀를 막는 것을 선택한다. 잘못을 인정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가해자들은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는 순간 자신의 인간됨이 말살되기라도 할 것처럼 군다. 피해자 입장에서는 그런 상대의 모습을 보는 것이 또 다른 종류의 짓밟힘을 당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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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한낱 인간일 뿐인데 유독 시시비비를 나눌 땐 신처럼 군다. 한 사람의 인생을 살펴보고, 그게 충분히 옳아야 긍정하고 지지하며 그렇지 못하면 매섭게 손가락질한다. 피해자는 사람이다. 실수하고 잘못하고 겁먹고 도망치는. 화이구가 처벌받을 수 있게 하려던 우신핑의 서툴고 진심 어린 노력도, 자신의 손으로 가족을 '또' 망칠 수 없다는 죄책감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화이쉬안도, 한낱 사람이기에 내릴 수밖에 없는 선택들이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들어왔다. 거짓말은 나쁘다고. 거짓말을 하면 혼나고, 거짓 대신 진실을 고하면 솔직함을 칭찬받는다. 그런데 삶이 그리도 단순했던가? 차라리 모를 때가 속 편한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다. 반드시 정의로움이 승리하는 세상이 아니기에, 돈과 권력이 기승을 부리는 번잡한 세상이기에, 때로는 거짓을 해야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그래서 우신핑은 화이쉬안이 겪은 일을 자신이 겪은 일이라 고했다. 그렇게라도 해야 몇 십 년간 화이쉬안을 채찍과 당근으로 길들이며 성폭행한 화이구를 감옥에 넣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그 사건들은 각기 단일한 사건이 아니라 '현상'에 가까웠다.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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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신핑의 친구 오드리도, 화이쉬안도 그루밍 범죄의 피해자들이다. 오드리의 선생님, 화이구는 다정하고 따스한 말로 두 사람 각각을 어르고 달랬다. 가장 불안한 때에 파고들어 자신에게 완전히 기대도록. 그래서 자신이 성범죄를 저질러도 그들이 누군가에게 알릴 생각도, 이게 문제라는 인지도 할 수 없도록. 서로를 위하는 마음으로 서로를 위했을 뿐이라며.

 

그들이 고통을 토로할 수 있는 건 사회적으로 약자에 속하는 이들뿐이었다. 10대 학생에 불과한 우신핑이 그러했고, 이제 막 교사 생활을 시작한 임시 담임 롄 선생님이 그러했고, 풍족한 집안에서 커다란 부담감을 안고 살던 오드리가 그러했다. 자신의 앞길을 제대로 간수하기 어려운 사람들이기에 서로의 말을 들을 수 있었고, 동시에 아무런 도움도 될 수 없었다. 돈과 권력, 명예 그 무엇도 가지지 못했으니까. 조금만 뒤틀리면 모조리 말살되는, 피라미드의 최하층.

 

계급제가 폐지되었다지만 성범죄가 발생한 경위는 언제나 위계에서 시작되거늘.

 

*

 

비슷한 사람끼리 연대감을 잘 형성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언제나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소설에서 이에 대한 완벽한 비유가 나왔다. 물속에 빠져서 죽은 시체 2구. 하나는 7살 아이의 것, 다른 하나는 그의 아빠. 아들이 빠진 걸 구하려다가 둘 다 죽고 만 것이다. 왜 건장한 아버지는 아이조차 살리지 못했을까?


 

죽어가는 인간의 본능을 얕보면 안 돼. 위로 올라가려고 끝끝내 상대를 붙잡고 놓지 않아. 그러다 목을 조르게 되기도 하고, 얼굴을 움켜쥐다가 손가락이 눈 안에 들어가고 그래. 외국에서 나온 익사 보고서를 봤는데, 물에 빠진 사람보다 그 사람을 구조하러 들어간 사람이 죽은 경우가 더 많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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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이쉬안이 우신핑을 납치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자신의 불행한 구렁텅이에 우신핑도 넣어 함께 불행해지자고. 우신핑이 불행하면 자신은 그만큼 행복해질 것이라며. 그러나 화이쉬안은 끝내 자신의 썩어 문드러진 마음을 포기한다. 되레 죽음의 코앞까지 당도한 오드리는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깨닫고, 우신핑은 그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었을 테고, 그들 피해 생존자들은 앞으로를 살아가겠지.

 

소설은 허상일 수 없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무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둔 이야기는 더더욱. 작가가 무수히 수집한 성범죄 사례들과 전문가들의 말, 그리고 피해자들에게 행여 상처가 될까 노심초사하며 적어내린 문장들. 모두가 명확하게 안다고 넘겼던 점의 숨겨진 부분까지 들춰낸 이 소설에 왜 그리 추천의 말이 쏟아졌는지 알 것 같다. 무엇을 어떻게, 누구의 관점에서 보느냐는 오롯이 나 자신에게 달려있음을 다시금 깨닫는다.

 

 

당신이 보는 것이 곧 당신 자신이다.

 

《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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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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