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150년을 건너온 이야기가 욕망에 대해 던지는 물음표 - 뮤지컬 ‘테레즈 라캥’

테레즈 라캥, 그녀의 욕망은 실현될 수 있을까?
글 입력 2022.10.10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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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에밀졸라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으로 지난 19년도 초연 이후 올해 재연으로 돌아왔다. 이 이야기는 각자 다른 욕망을 가진 4인의 인물이 어떻게 ‘욕망’이라는 허상에 물들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엄격한 고모의 집에서 유약하고 병든 사촌 까미유의 보모 역할을 하다가 애정 없이 그와 결혼까지 해야할 상황에 놓인 테레즈가 까미유와는 정반대의 완숙한 남성미를 가진 로랑에게 마을을 빼앗겨 결국 까미유를 죽이고 부부가 되는 이야기, 간략한 줄거리만 놓고 보면 막장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작품이 보여주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는 그러한 뻔하고 자극적인 스토리 안에 깔려 있다. 극이 진행되는 내내 어쩌면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이 인물들은 대체 어디까지 스스로를 나락으로 몰고 갈 것인가? 극이 절정에 치닫을수록 자신의 욕망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일말의 조절장치도 없이 달리는 기차처럼 불행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의 모습은 어쩌면 조금은 낯설고 징그럽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 무엇도 그들을 붙잡아줄 장치가 없을 때 우리 인간이 욕망 만을 바라보며 어떻게 망가져갈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본 우리는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 깃든 욕망을 어느 정도까지 표출하고, 또 어느 정도까지 드러내며 그것을 추구해야 할까? 테레즈 라켕의 이야기와 공연이 던지고자 했던 물음표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우리 내면의 아이러니를 목도하면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이 아닌 과학자의 실험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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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왓챠

 

 

항상 소극장 뮤지컬을 보러 갈 때 일종의 루틴이 있는데, 표를 받은 뒤 캐스팅 보드와 포토존을 촬영하고, MD 부스에 방문하여 재관람 도장을 만들거나 굿즈를 구경하는 것이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에서는 다양한 MD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그 중 나의 눈길을 잡아 끈 것이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이었다. 사실, 부끄럽게도 나는 MD 부스에서 그 책을 발견하기 전까지 이 공연에 원작 소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알고 보니 이 원작 소설을 필두로 하여 <테레즈 라켕>은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의 모티브로 작용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원작 소설이 또 아주 흥미롭다. 서사 속 테레즈와 로랑은 강렬한 육체적 욕정에 사로잡혀 서로를 탐하는데, 이러한 내용을 쓰면서도 에밀 졸라는 이 책이 독자들의 정서적 반응을 일으키기 위해 집필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하여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해 행한 것 뿐”이라는 말을 남겼는데, 이를 미루어 보아 에밀 졸라는 테레즈와 로랑의 로맨스를 서술할 때 조차도 이 인물들을 그저 실험 대상자를 대하는 과학자처럼 아무런 감정도 개입시키지 않고 관찰하듯 묘사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있는 그대로를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그의 이러한 서술법은 자연주의 소설로 칭해지기도 했다.


에밀 졸라는 왜 그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을까? 어쩌면 그는 테레즈 라캥의 이야기를 접하는 독자들이 테레즈, 로랑, 까미유, 라켕 부인에게 몰입하여 스토리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들과 오히려 거리를 두게끔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 거리감은 독자들로 하여금 끊임 없이 이야기를 읽고 있는 현실 속의 나를 잊지 않도록 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나의 욕망’에 대해 집중 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을까?

 

 

 

뮤지컬 <테레즈 라캥>으로 재구성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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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에는 그러나 분명한 한계점이 존재했다. 그는 테레즈와 로랑의 애정을 기계적으로 서술하기 바빴던 나머지 소설의 방향성을 한 가지로 정하지 못하고 인물을 왜곡하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1867년에 집필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2022년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이 소설이 얼마나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뮤지컬 <테레즈 라켕>은 이러한 원작의 한계점을 잘 다듬은 공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 중 가장 충격적이었던 장면을 꼽아보자면, 점차 서로의 욕망으로 인해 망가져 가던 로랑, 테레즈가 불구가 되어 버린 라캥 부인을 마치 그들의 반려견인 양 다루며 집 안에서 소풍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이 장면은 너무나 낯선 나머지 섬뜩하게까지 느껴졌는데, 모든 것을 파멸로 몰고 가 불행 속에 몸을 던진 순간까지도 그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말도 안되는 상황에서 그것을 자행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억압되어 왔던 환경에서 벗어나고자 자유를 욕망했던 테레즈, 까미유가 가진 안정적인 재산과 가정적 위치를 욕망했던 로랑,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것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욕망했던 까미유, 안정된 ‘가족’이라는 허상적 욕망을 지녔던 라캥 부인은 극의 초중반까지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자신의 내면에 숨겨둔 거대한 빙산 같은 욕망을 조금씩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이들의 위험한 줄다리기는 로랑과 테레즈가 자신들의 관계를 유지하고 서로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까미유를 죽이면서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이제 이들은 자신의 욕망을 더 이상 절제하지 않는다. 가감 없이 욕망을 드러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처럼 군다. 그 속에서 결국 그들이 가진 어떠한 욕망도 실현될 수 없음을 그들은 알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끊임없이 서로를 수렁으로 빠뜨리는 이들의 모습은 끔찍하다 못해 피폐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결국 라캥 부인은 불구가 되어 자신의 아들을 죽인 이들이 누구인지 아는 순간에서도 그저 온 몸을 부들 부들 떠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고, 테레즈는 여전히 자신을 억압하는 집 밖으로 한발자국도 나갈 수 없었으며, 로랑은 그가 얻고자 했던 살아있는 여자 테레즈와 안정적인 가정적 위치 그 어느 것도 가지지 못했다. 극의 마지막 순간 로랑과 테레즈가 차라리 독이 든 술을 마시고 죽기를 선택했던 것도 현실이 지옥 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연예술 만이 표현해낼 수 있는 방식으로 물음표를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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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한다 프로덕션

 

 

이렇듯 공연을 보는 내내 소름이 돋을 만큼 테레즈 라캥의 이야기는 나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고, 4인의 인물이 망가져가는 장면을 목도하며 자연스럽게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어떠한 제동 장치도 없는 상황에서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것은 종래에는 나의 내면 속 존재하는 욕망들은 어떤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으며 그것이 과연 적절한지에 대한 생각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공연이 시사하는 바는 이러한 관객들의 반응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는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연은 끝이 나지만, 그것이 관객들에게 어떠한 의문점을 던지고, 관객이 그것을 내면화 하는 순간부터 그 공연은 또 다른 형식으로 살아있게 된다. 이것이 가능했던 데에는 뮤지컬 <테레즈 라캥>의 구성과 표현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테레즈 라캥>의 무대 세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단연 중앙부를 차지 하고 있는 액자이다. 이것은 로랑이 그린 까미유와 테레즈의 초상화를 거는 데에도 이용되고, 때로는 까미유의 침실을 비추며 또 때로는 테레즈의 모습을 비추기도 한다. 액자 속 인물들의 행위는 마치 그들의 행위가 전시장에 전시된 일종의 영상물처럼 느껴지게 한다. 일상적인 대화와 몸짓을 하고 있는 중에도 그들 안에 숨겨진 욕망은 관객이 그러한 장치를 통해 인물과 또 한 겹의 거리감을 쌓음으로써 객관적으로 관찰되곤 한다.


또한, 공연 중간 중간 비춰지는 디테일한 설정들을 통해서 테레즈 라캥의 스토리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예를 들면 테레즈가 까미유의 약을 챙기기 전 꼭 자신이 먼저 한 입 먹고 건낸다는 점, 그것은 테레즈를 억압하는 집안의 규칙을 단면적으로 보여주며 또한 테레즈를 온전히 자신 ‘소유’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까미유의 욕망을 보여준다. 그것을 알아챈 로랑이 “아파서 약 먹는 거에요?”하고 묻는 대사를 통해 로랑이 어떻게 테레즈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욕망을 꿰뚫어 내는지도 단번에 보여주는 것이다.


뮤지컬 <테레즈 라캥>은 이렇듯 공연예술 만이 할 수 있는 생생한 표현 법과 사소하지만 디테일한 무대 구성을 통해 1860년대 탄생한 테레즈 라캥의 스토리를 재가공하여 2022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선보인다. 그것을 접한 우리는 뮤지컬이 던진 물음표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이 공연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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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다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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