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50%의 환상 [도서/문학]

글 입력 2022.10.10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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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휘두르며 주문을 외어 눈앞에 물건이 나타나게 하고,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공간에서 서로의 얼굴과 발밑을 확인하거나 외형을 바꾸는 세계가 있다. 용서받지 못할 저주로 상대를 지배하거나 목숨을 빼앗는 이들과 사랑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저주에 대항하는 이들이 공존하는 세계다.


또, 옷장 문을 열고 들어가면 다른 차원의 공간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거에 사자가 창조했고 현재는 수호하고 있는 그곳에서 평범했던 소년, 소녀들이 새로운 삶을 구축해나간다. 키는 작지만 큰 발을 가진 주인공의 뜻밖의 여정에 함께하는 요정, 마법사, 난쟁이들을 볼 수도 있다.


반면, 버스나 지하철 창문 밖으로 매일 똑같은 풍경을 지나치며 도착한 곳에서 주어진 일을 해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밝은 면에 초점을 맞추면 규칙적이고 통제할 수 있는 삶이라 칭할 수도 있으나 무료한 일상의 반복에서 비롯된 권태도 분명히 존재한다. 통제 가능한 삶을 어째서 긍정적이라 평가하는지. 가 본 적 없는 장소가, 경험해본 적 없는 삶을 사는 이들이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하늘을 향해 날아갈 수 없는 새장 속의 새처럼 정해진 틀에서 벗어날 기회와 용기가 없는 처지가 아닌가. 애초에 통제가 가능하다는 전제가 잘못되었다며, 당장 몇 초의 미래도 예상할 수 없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 인생이라며 고개를 내젓는 사람들이 느낄 권태다.


만약 부엉이가 초대장을 물어다 주고 호그와트행 열차가 9와 4분의 3 승강장에서 기다리고 있다면, 망설임 없이 열차에 몸을 실을 사람들. 숨바꼭질이 시작되면 옷장이 있는 구석진 방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기어 나니아의 눈을 피부로 느끼고 잔인함으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종족들과의 끝없는 전투가 일어날 세계로 뛰어드는 사람들은 새로움을 원하고 모험을 원한다.


하지만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에서 빗자루나 자동차, 날개 달린 괴생명체가 날아다니는 현상이 현실이 될 수는 없고, 그것을 정말 ‘진지하게’ 바라는 이는 없다. 그저 좋아하는 영화 속 사건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동심과 터무니없는 상상을 통해 지속적인 피로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도피하고 싶다는 욕망의 소심한 표출일 뿐이다.


긴 일생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지는 상상은 눈앞에 닥친 과업을 해결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동력 정도는 되어준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지친 마음과 상처를 되돌아보고 보듬기에 영화는 배경, 주인공, 언어, 사건을 모두 포함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다르다. 그러니까, 현실과 100% 다른 판타지보다는 50% 정도의 차이가 우리에게 더 와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임선우 작가의 단편집 ‘유령의 마음으로’가 그렇다. 내 감정이 온전히 반영된, 또 다른 나라고 할 수 있는 유령이 갑자기 삶에 들어온다던가, 사람들이 해파리로 변하기 시작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는 너무나도 익숙한 배경을 가지고 살면서 한 번쯤은 마주쳤을 법한 사람들에 의해 전개된다. 일상에 더해진 50%의 환상이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유령의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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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 ‘유령의 마음으로’에서는 빵집 카운터에 엎드린 채,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던 주인공 ‘나’가 갑작스러운 추위를 느끼며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추위는 추위와 함께 나타난 ‘유령’과 가까워질 때 사라졌으며 ‘나’는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유령과 함께하기로 한다.


유령과 매 순간을 함께 살아가며 깨달은 것은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감정들이었다. 알고 있었지만 알고 싶지 않았던, 같은 자리에 미동 없이 잠 들어 있는 연인에 대해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감정들을 똑바로 마주하게 된다. “정수에 대한 내 사랑이 소멸해 버렸다는 사실”“정수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정수와 헤어지기 위해서 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버렸다.


아픈 연인이 눈을 떴을 때, 이별을 고해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마저도 기적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실망이 쌓이면 분노가 되고, 분노는 결국 체념이 되니까.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는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누구나 이해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현재의 기분과 감정을 알아주고 적절한 때에 격려와 위로를 주는 존재를 원한다. 밖으로 꺼내놓지 않으면 아무도 볼 수 없는 내면을 꼭꼭 숨겨놓고 들키기만을 기다리는 모순적인 태도를 이해해주는 유령. 유령은 감정을 마주하기 두렵고, 그것에서 비롯될 일들을 책임지기 힘들어 미루고 미뤄왔던 역할을 기꺼이 맡는다.


 

자꾸만 쏟아질 것 같은 마음을 붙잡으려고 눈을 감았다. 문득 느껴지는 온기에 눈을 뜨자, 유령이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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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령의 우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나에게 도달하지 못한 감정들이 전부 그 안에 머무르고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유령의 두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손에 닿지는 않았지만 분명 따뜻했고, 너무나 따뜻해서, 나는 울 수 있었다. 대체 어떤 유령이 눈물까지 흘리는 거야. 내가 말했다. 나는 유령이 아니니까. 유령은 우는 와중에도 그렇게 말했다. 잠시 뒤에 유령이 나를 끌어안았는데,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 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전한 이해였다. 여기까지인 것 같아. 안긴 채로 내가 말했을 때 유령은 그래, 라고 대답해 주었다.

 

p.28

 

 

한 번 터진 댐은 넘치는 물을 감당할 수 없다. 혼자 보냈던 밤의 외로움과 ‘나’를 보기 위해 빵집으로 찾아오는 인연에 대한 고마움, 병원의 서늘한 형광등으로부터 도망치고 난 뒤의 비애, 부끄러움, 그리고 후련함까지 ‘나’는 오롯이 느낀다. 묵혀 두었던 감정을 해소하는 것은 당장은 괴로울지 몰라도 언젠가는 꼭 이루어져야 했을 일이고 그 과정을 유령과 함께 견뎌내며 ‘나’는 비로소 혼자서도 따듯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빛이 나지 않아요]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고 있다는 재난 경보가 울리며 시작되는 영화 대신, 소설 ‘빛이 나지 않아요’는 온몸이 물집으로 뒤덮여 결국엔 해파리로 변하는 사람들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로 시작한다. 이 섬뜩한 현상의 원인은 바닷속에서 푸른빛을 내어 사람들을 유인하는 해파리로, 유인에 성공한 대상을 촉수로 휘감아 해파리로 만드는 것이었다.


좀비가 나타나도 대한민국의 회사원은 출근하고 학생은 등교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처럼, 좀비 해파리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간다. 해파리가 발견되는 해수욕장을 폐쇄하기만 하면 그만이기에.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멈춰 있는 듯한 ‘나’와 ‘구’는 몸담았던 밴드가 기울어지고 서울의 월세를 감당할 수 없어 시골로 도망쳐 작은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누구보다도 자신이 서울과 음악을 떠난 적 없으며 “이곳까지 떠밀려 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람들은 역시 겁이 많다. 어쩌면 해파리들에게 신, 좀비, 세계 멸망 같은 의도 따위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그저 최선을 다해 반짝이고 있을 뿐일지도. 문제는 해파리가 아니라 사람들이다. 누구에게나 어둠은 무서우니까, 자신의 어둠조차 견딜 수 없는 이들이 빛에 다가서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역시 선글라스를 벗고 해파리를 바라본 적은 없었다. 그 빛에 넘어가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p.60

 

 

그래서일까. ‘나’가 해파리를 바라보는 관점은 주류의 것들과 사뭇 다르다. 사람을 직접 유인하는 현상은 “자신들이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있었다”는 뜻이며 해파리는 주체성을 가진 존재임을 알려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서울과 음악을 떠나야 했던 ‘나’는 밝게 빛을 내며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는 해파리를 동경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를 옥죄어 오는 금전적인 문제는 ‘나'가 해파리로 변하고 싶어 하는 사람의 소망을 들어주는 회사에 취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해파리 촉수로 만든 알약을 삼키고 수조에 들어가 해파리로 변하기까지의 100시간 동안 곁을 지키는 일. 고객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감내하고 물을 떠다니며 살 수 있도록 주기적으로 진통제와 수면제를 투여하는 일이 ‘나’의 업무였다.


‘나’는 도우미로 일하면서 “무언가를 사랑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계속해서 사랑하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만난다. 해파리의 삶을 선택한 가족의 결정을 끝내 말리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음악을 포기했던 그때의 심정으로 이해한다. 변화 과정에 문제가 생겨 해파리가 되지 못하고 빛이 나지 않았던 ‘지선 씨’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계속 이어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포기하지 않은 마음이 그를 “영원히 해파리가 아닌 지선 씨로 남게”할 것임을 깨달았다.


결국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돈도 아니었으며 ‘구’의 사랑과 해파리의 평온한 삶도 아니었다. 사랑하는 무언가를 떠나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 있는 마음의 힘을 느껴야 했다. 그 힘으로 앞으로의 결과와 상관없이 서울로 돌아가 다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는 빛을 생각하며, 떠내려가지 않고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사는 익숙한 일상에서 한 꼬집의 비틂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선사하고 풀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제의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던져준다. 물론 그 어긋남을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 위한 비유로 보는 것이 타당할지도 모른다.


‘유령의 마음으로’에서의 ‘나’가 유령에게 온전한 위로와 이해를 받았던 것은 바로 그 유령이 ‘나’이기 때문이며 나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방법으로 탄생한 유령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빛이 나지 않아요’ 속에서 해파리로 변하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의 외형 변화보다는 목표와 열정, 의지까지 포기하고 내면의 빛을 잃어가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루지 않은 또 다른 단편 소설 ‘여름은 물빛처럼’ 속 ‘나’의 방에서 나무가 되어버린 낯선 남자는 누군가에 대한 미련과 털어내지 못한 사랑에 파묻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상태에 대한 비유다.


하지만 때로는 숨은 의미를 찾는 것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오랜 기억으로 머무른다. 나도 알아채지 못한 감정을 알려줄 나와 똑 닮은 존재를 꿈꿀 수 있으며 해파리가 되는 것이 아닌, 이루어내고 싶은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는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날을 50%의 환상 속에서 기다릴 수 있다. 그 기다림이 무료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머지 50%의 현실 속에서 늘 그랬듯이 예측할 수 없는 삶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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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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