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남의 연애가 뭐 그렇게 궁금하다고 [미술/전시]

글 입력 2022.10.10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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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리티 연애 프로그램 《환승연애》의 인기가 절정이다. 사귀다 헤어진 10명의 남녀가 한집에 모여 새로운 사랑을 찾는 프로그램이다. 당사자들만 알 수 있는 남녀 관계의 앞날을 예상하면서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러나 정작 내 연애는 정체기인데 남의 연애가 궁금한 이유는 도대체 뭔가. 게다가 좋아하는 연예인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일반인들이 보여주는 전 애인에 대한 절절한 미련이나 새로운 사람에게 갖게 되는 호감 따위는 바쁜 생활 속에 안중에도 없는 게 당연하다.

 

내 친구의 연애사도 아니고 뭐 어쩌라고 싶은 마음 반, 남의 연애에 과하게 몰입해서 구구절절 훈수를 두거나 욕하는 모습이 이상한 간섭처럼 느껴져 프로그램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몰랐겠지) SNS에 들어가기만 하면 영상 클립이 돌아다니는 바람에 《환승연애》 홍수에 빠진 기분이다. ‘도대체 왜 이렇게 난리야?’ 싶어서 몇 개 보다 보니 나도 걸렸다. 《환승연애》 중독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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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들은 《환승연애》를 보면서 타인의 경험을 통해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이해하고 나아가 공감하면 좋겠다는 기대를 한다. ‘나만 이러는 것은 아닐 것’이라든지 ‘나도 저랬는데’ 같은 느낌과 생각들을 출연자들에 빙의해 감정이입한다. 보다 보면 시청자들과 프로그램이 공유할 수 있는 삶의 면적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애쓰는 제작진들의 고민이 엿보일 때도 있다.

 

‘출연진의 서사와 그들의 감정은 이런 식인데, 아마 당신도 한번쯤은 비슷한 걸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나와 그 때를 다시 돌아보면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며 계속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미술사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도 누군가의 스토리가 재미있고, 그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내 삶에 반영되기 때문인데 《환승연애》도 비슷하다. 탄탄한 스토리라인에 빠져 ‘이런 걸 대체 왜 보는 거야’라던 내가 ‘해은 언니 제발 울지 말고 행복하세요’라며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한참을 푹 빠져서 보는데 새로운 남자 출연자(현규)가 등장했다. 6년이나 사귄 첫사랑을 잊지 못해 상처받고 매일 울기만 하는 여자 출연자(해은)를 웃게 해주는 인물이다. 알콩달콩한 둘의 모습과 내내 해은을 찬밥 보듯이 대하더니 이제서야 질투하는 모습을 보이는 전 애인(규민)의 모습이 대비되며 이건용 작가의 〈달팽이 걸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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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라고 한다. 하지만 이건용은 “인생은 짧고 예술도 짧다”고 단언한다. 그래서인지 이건용의 작품은 많은 것들이 퍼포먼스 작품이다. 행위를 수행하는 동안에만 작품의 실체가 존재할 뿐, 퍼포먼스가 끝난 후에는 그 흔적을 담은 사진이나 영상 같은 잔재로만 남게 된다.

 

지난 10월 8일까지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그림의 탄생》전에서 이건용 작가의 〈달팽이 걸음〉 신작을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특히 2022 버전은 대형 퍼포먼스로 길이가 22m에 이른다. 1979년 남계화랑 개인전에서 처음 공개한 〈달팽이 걸음〉은 같은 해 《제15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서 선보이며 작가의 대표 퍼포먼스가 됐다.

 

맨발로 쪼그려 앉은 작가는 오른손에 분필을 쥐고 좌우로 팔을 휘저으며 몸 앞에 선을 긋는다. 동시에 쪼그려 앉은 몸을 지탱하던 발을 조금씩 앞으로 움직인다. 좌우로 긋고 있는 선 위를 양쪽 발이 지나가면서 선이 지워져 번진 자국만 남는다. 일정 거리를 움직이면 다시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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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걸음〉은 디지털 시대 문명의 빠른 속도를 자연에서 살아가는 달팽이의 느린 걸음으로 가로질러 보자는 의도를 담고 있다. 발표 당시 당대 권력에 의해 상처 받은 작가의 신체를 연상시킨다고도 한다. 느리지만 쉬지 않고 꾸준히 움직이는 달팽이처럼 걸어간 뒤 남는 흔적은 오히려 힘차고 강인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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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는’ 행위와 ‘지우는’ 행위가 동시에 일어나는 역설적인 모습이 해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어찌됐든 그려지고 지워지는 것에 관계없이 중요한 건 계속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면서 지우다니 참 무의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용 작가의 퍼포먼스도 그렇고 《환승연애》에서 새삼 느끼는 것은 ‘무용한 것의 유용함’이다. 예술에 정해진 한 가지 정답이 없듯이 연애에도 정답이 없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도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 같다. 숲 속에 난 두 갈래 길 중에서 한 길만 걷는 걸 아쉬워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한숨 쉬며 미련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덜 지난 길을 택했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우리 삶이 무너지거나 세계가 멸망할 일은 없다. 출연진들이 사랑싸움하는 모습을 보다 보면 너무 피곤해서 오히려 연애하지 않는 지금이 가성비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전에는 미처 알지 못한 삶의 기쁨과 슬픔, 깊이 정도는 아주 분명하게 배울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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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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