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폭풍이 지나간 후에 삶을 모색하는 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의 이보람 작가

글 입력 2022.10.1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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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이 지나간 후에 삶을 모색하는 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의 이보람 작가

 

 

같은 학교 친구인 주리와 윤아가 옥상에서 마주한다. 주리가 말한다. "너 아주 대단한 엄마 뒀더라?" 그리고 윤아는 주리의 휴대폰을 빼앗아 주리의 엄마에게 말한다. "아줌마네 아저씨가 우리 엄마랑 바람났어요.” 그렇다. 주리의 아빠와 윤아의 엄마가 바람이 났고 윤아의 엄마는 임신했다. 그 사실을 주리도, 윤아도, 주리의 엄마도 알게 됐다. 이미 부모의 부정(不正)이 벌어진 상황이다. 없었던 일처럼 묻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주리와 윤아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리고 이들의 부모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2021년 정식 초연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1년 만에 다시 돌아온 <옥상 위 카우보이>는 두 주인공의 성장담과 미처 자라지 못한 어른들의 이야기를 유쾌하면서도 뭉클하게 무대 위에 펼친다. 더불어 수어와 자막, 음성해설이 있는 회차를 운영하고, 휠체어 사용 관객을 위한 전동리프트를 구비하고 있으며, 접근성에 대한 사전 설문 조사를 받는 등 연극의 물리적 장벽을 허물려는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 <옥상 위 카우보이>는 서울 공연에 이어, 부산, 대구 무대에 오르고 지방 연극인들을 위한 배리어프리 워크숍까지 같이 진행할 예정이다.

 

연극을 제작한 '보편적극단'은 <옥상 위 카우보이>의 집필자 이보람 작가가 대표로 역임하는 극단이기도 하다. 그는 연극의 언어로 소년범(<소년B가 사는 집>), 독재 정권 의문사 유가족(<두 번째 시간>), 성범죄 피해자(<여자는 울지 않는다>) 등 사회, 역사 속 개인의 삶을 날카롭게 포착해 왔다. 그리고 서사 내적으로는 소수의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에게 가닿도록 하는 동시에, 서사 외적으로는 지금껏 객석에서 소외됐던 소수의 관객에게까지 이야기가 가닿도록 연극 작업을 해 오고 있다. 작가와 극단의 지향성이 담긴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의 서울 공연 폐막을 며칠 앞둔 날, 이보람 작가를 만나 그 일련의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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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날 수 없는 싸움, 어른이 되는 순간의 이야기


 

연극 <옥상 위 카우보이>가 2015년(선돌극장), 2021년 정식 초연에 이어, 2022년 공연으로 서울, 부산, 대구에서 공연됩니다. 연극이 이렇게 여러 차례 올라오는 게 쉽지 않은데, 작가님의 소감이 궁금합니다.

 

이 희곡의 운명은 저보다는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2015년 공연의 경우에는 정식 초연은 아니었고, 연출님(정현 연출)의 데뷔를 위해 학교 다닐 때 썼던 희곡을 드린 거였어요. 2021년에는 마땅히 공연할 만한 희곡이 없어서 선택된 거였는데요. 지원 사업에서 떨어졌다가 추가 합격되면서 공연을 올릴 수 있었는데, 반응이 좋았죠.

 

어릴 때 쓴 희곡이라 저는 빈 구석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만큼 참여하는 사람들이 신나게 이것저것을 넣을 수 있으니까 오히려 동시대적이면서도 재미있게 나온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 연출, 스텝, 디자이너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판을 하나 만들어주는 게 어쩌면 좋은 이야기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작년 공연을 끝내고 올해는 쉴 계획이었는데요. 극단원 중에 제가 데뷔 때부터 인연을 맺어온 김진복 배우님이라고 계세요. 그분이 '협동조합 아트컴퍼니 드레'라는 곳을 통해 예술공간 혜화 극장을 운영하시는데 그곳에서 극단 공연을 올리자고 제안해 주셨고,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사업까지 되면서 공연을 올릴 수 있었어요. 그래서 소감이라 하면 역시 세상은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그냥 사람들 뜻에 맡겨서 어찌어찌 흘러왔다, 이 공연은 참 운이 좋다(웃음). 

 

 

그럼 희곡은 2015년 이전에 집필하신 거겠네요?

 

그렇죠. 2014년 정도에 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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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작가님의 여타 작품에 비해 <옥상 위 카우보이>는 두 가정 내부에서 일어난 비교적 사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은 어떤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을까요?

 

제가 심리학과를 나와서 대학 때 상담 심리 수업을 많이 들었는데요. 실제 사례를 보면서 '만약 내가 상담자라면 이 내담자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를 배우는 수업이었어요. 한 4년 정도 수업받으면서 제일 많이 느꼈던 게 '바람을 너무 많이 핀다'였어요. 부모의 바람 때문에 찾아오는 아이들이 많았거든요. 부모는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다 아는 거예요.


한 남자분이 여자친구랑 유원지에 놀러 갔다가 아버지가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애의 손을 잡고 젊은 여자랑 놀러 온 걸 본 사례도 있었어요. 아버지의 오랜 불륜을 알고 내담자가 놀랐고, 어머니에게 이걸 말해야 하나 고민했었죠. 내담자의 인상 깊었던 말 중에 하나가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였거든요. 저는 그게 아버지를 미워했던 한 소년이 어른이 되는 순간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밉기만 했던 나의 아버지를 하나의 남자로서 보게 되는 순간이 인상 깊었고, 그런 순간을 담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죠.

 

 

<옥상 위 카우보이>의 주리 아빠와 주리 이야기의 설정이 거기서 시작된 거군요.

 

그렇죠. 근데 제가 여자다 보니 남자 이야기로 쓰기는 조금 어려웠고, 그래서 (주리와 윤아의 설정을) 여자-여자로 썼던 거예요.

 

 

주리-윤아의 성별이 원래 남자-여자였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더라고요.

 

원래 희곡에서도 여자-여자였어요. 그런데 2015년 공연 때 연출님이 여자 배우를 구하기 어렵다고 남자 배우로 해도 되냐고 물으셨고, 그렇게 하라고 말씀 드리면서 남자-여자로 공연된 거였죠.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제 희곡 중에 (캐릭터 설정을) 여자로 썼는데 남자 배우가 연기하거나, 남자로 썼는데 여자 배우가 연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성별을 바꿔서 하고 싶어지나 봐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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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원제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옥상 위 카우보이’로 제목이 바뀌면서 서부극의 분위기가 더해진 걸까요? 윤아와 주리 사이의 초반 갈등이 서부극의 액션, 격투 같이 표현돼서 재미있었습니다.

 

제가 습작할 때 혼자서 노트북에 갖고 있던 제목이 ‘내가 있어야 할 자리’였어요. 그게 주제였거든요. 어린 시절에는 그렇잖아요. 가정 안에 엄마 자리, 아빠 자리, 내 자리가 딱 정해져 있는데 엄마 아빠가 어느 날 이탈해 버리면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나는 어디 앉아 있어야 하지? 그런 게 주제였기 때문에 (그 제목을) 쓴 거였죠. 

 

희곡을 쓰고 나서 주변 작가 언니들한테 보여 줬는데 다들 제목을 바꾸라고, 제목이 이해가 안 되고 재미없다고 그러는 거예요(웃음). 그러다 한 언니가 옥상에 여자애 둘이 서 있는데 왠지 한 명은 죽어야 할 것 같다고, 죽어야지 끝날 싸움 같다고 하면서 ‘옥상 위 카우보이’라는 제목을 지어 줬어요. 2021년 공연 때 권지현 연출님이 카우보이 느낌이 더 나면 좋겠다 해서 음악 등이 알맞게 들어간 거고요.

 

 

카우보이처럼 자기 터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면서도, 할리우드 전통 남성 서사인 서부극과 달리 두 여자가 대립한다는 점에서 참 재밌는 제목이라고 생각했어요.

 

맞아요. 재밌죠. 그 언니가 제목을 참 잘 지어 준 것 같아요(웃음). 물러날 수 없는 싸움인 거고, 사실 이 두 여자의 입장이 마찬가지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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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작품은 2019년 4월에 개봉한 영화 <미성년>으로도 선보여졌는데요. 영화와 연극이 각기 다른 매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희곡을 쓰신 입장에서 두 작품을 각각 어떻게 보셨을까요?

 

영화 시나리오도 제가 썼기 때문에 큰 차이는 모르겠어요. 다만 저는 '내가 쓴 것처럼 안 느껴질 때' 공연이 잘 나왔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생각했던 대사나 이미지 등에 연출이든 배우든 누군가의 색깔이 잘 입혀졌을 때 공연이 잘 나왔다고 생각해요. 영화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미성년>은 김윤석 감독님의 색깔이 많이 들어가서 그런 재미가 있었고, <옥상 위 카우보이>에는 극단의 색깔이 잘 입혀져서 좋았어요. 만든 이의 각기 다른 색깔이 들어가면서 달라진 점들이 재미있었어요.

 

 

영화의 결말과 연극의 결말이 메시지는 같지만 그 표현에는 차이가 있어요. 이런 부분도 의도적으로 다르게 쓰신 건지 궁금했어요.

 

연극 결말부에 타임캡슐을 만드는 장면 같은 경우에는 제가 고등학교 때 친구들하고 타임캡슐을 묻었다가 스물일곱 살 때쯤 꺼낸 경험이 그대로 들어간 거였어요. (연극에서도 표현된) 김 방부제 같은 게 실제로 들어 있기도 했고요(웃음). 시나리오 작업할 때는 세월호 이슈가 저에게 굉장히 크게 다가오기도 했고, 이 아이들이 타임캡슐을 묻는다는 게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영화에서는 부모님 비중이 커져서 이들을 어떻게든 해결해 줘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타임캡슐을 묻는 행위가 마치 모든 걸 다 묻어버리는 느낌이 있어서 끝에 대한 고민이 엄청 많았죠. 


그리고 시나리오를 수정하다가 윤아랑 주리가 입술 박치기를 한 번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런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그게 애정의 표시는 아니지만, 주리한테는 굉장히 강렬한 기억일 테고 그 촉감이 오래 남아서 다양한 의미를 만들어내지 않을까,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건 어쩌면 몸의 감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결말부에서 윤아와 주리가 죽은 동생의 뼛가루를 우유에 타서 마시는 것도) 끔찍하면 끔찍할수록 기억이 오래 남을 것 같았고,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결말에 대해서는 반응이 반반이었던 것 같아요. 연극이었으면 사람들 반응이 이렇게까지 거세지 않았을 것 같은데(웃음) 나중에 고칠 걸 그랬나? 딴 걸 쓸 걸 그랬나? 그런 생각도 했죠.

 

 

 

아주 '특별한' 예술마을과 '보편적' 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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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작가님께서 창단하신 ‘보편적극단’에 대해서도 여쭤보고 싶습니다. 극단이 어떤 점을 지향하고 있고,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소개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일단 제가 작가로서 혼자 글을 써서 오래 연극을 하는 게 상당히 힘든 일일 것 같았고, 그래서 같이 작업했던 좋은 사람들과 인연을 오래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극단을 만들었어요. 그전부터 ‘아주 특별한 예술마을’이라는 아동극 극단 작업을 했었는데, 권지현 연출님이 성인극 극단을 만들면 ‘보편적극단’으로 이름 짓는 게 어떻냐고 해서 결정된 이름이에요. ‘아주 특별한 예술마을’도 그분이 지은 이름인데, 영어로 장애인에 대해서 ‘Special’이라는 표현을 쓴대요. 권지현 연출님은 '소수자성이 더 이상 스페셜하지 않고 보편적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극단이었으면 좋겠다 생각해서 이름을 보편적극단으로 지으신 거죠. 앞으로의 활동, 작업 방향이 그 이름과 딱 맞지는 않겠지만 소수자성이 있는 이야기들이 조금 더 보편화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 것, 전혀 상상해 보지 않았던 사람들의 삶을 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주는 것, 그게 지금의 목표예요.

 

 

말씀해 주셨듯 작가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예술마을’을 통해 장애 아동이 편히 볼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 오셨는데요. 이런 작업을 하시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2012년도에 학교(한예종)에서 진행했던 카자흐스탄 해외 봉사에 가서 권주리(아주 특별한 예술마을의 대표)라는 친구랑 친해졌는데요. 그 친구가 장애 아동, 특히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아동을 위한 아동극을 만들고 싶다고 했어요. 장애 아동들이 공연장을 무서워하고 소리 같은 것들이 너무 커서 힘들어한다는 거였죠. 그래서 시작하게 된 거였는데, 공연을 하다 보니까 되게 좋았어요. 그 아이들과 부모님들에게는 이게 (공연에 대한) 첫 경험인 거예요. 그분들의 표정을 보면서 공연이라는 게, 이야기라는 게, 창작물이라는 게 결국에는 관객을 만나서 완성되는 거구나 느꼈고, 그런 매력으로 인해서 작업을 계속해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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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옥상 위 카우보이>는 수어와 자막, 음성해설이 있는 회차로도 공연되고, 전동리프트, 사전 설문 조사 등 접근성 부분에서도 섬세하게 배리어프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배리어프리 공연을 시도하는 데에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을 것 같아요.  

 

아동극 같은 경우에는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지원 사업을 통해서 올렸기 때문에 관객을 정말 적게 받아도 됐거든요. 한 5명만 와도 그 아이들이 행복하게 공연을 보면 우리도 행복해요. 그런데 성인극 같은 경우에는 일단 관객 모객이 힘들어요. 사실 비장애인 중에서도 연극 관객이 적잖아요(웃음). 관객 모객이 어려운데 제작비는 더 들어요. 수어 통역 같은 것도 생각보다 품이 많이 들더라고요. 인력도 부족하고요. 그런 것들이 어렵죠. 

 

 

저는 2021년 <옥상 위 카우보이> 공연을 음성해설 회차로 봤는데, 그것도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진짜요? 다행이네요. 저도 그런 음성해설은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우리 음성해설을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랬어요(웃음). 

 

 

<옥상 위 카우보이> 투어 공연과 함께, 배리어프리 공연 제작 워크숍도 함께 진행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떤 목표로 기획하신 건지 궁금합니다. 

 

이번에 예술경영지원센터 지원 사업에 배리어프리적 장점을 갖고서 지원서를 냈고 그렇게 해서 진행하게 된 사업이에요. 또 저희 연출님이 특수교육과를 나오셨어요. 특수교육사를 하다가 러시아에서 장애인 연극 관련 공부를 하고 오신 분이라 그쪽에 굉장히 전문가세요. 그래서 한다면 이건 우리밖에 없다, 우리가 제대로 해야 된다(웃음). 그런 생각으로 진행하게 됐죠.

 

서울은 배리어프리 지원도 확실하고 꽤 있는 편인데, 지방은 아직 활발하지 않대요. 제작자, 창작자분들도 경험이 별로 없으시니까, 배리어프리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실질적 제작 방식에 대한 워크숍을 하게 된 거죠. 지방에 있는 장애인 관객들도 연극을 볼 수 있도록 통로를 마련하고 싶었어요.

 

 

 

사건 이후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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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작가님의 여러 작품에서 이야기의 초점이 ‘사건 그 자체’보다는 ‘사건이 일어난 후’에 맞춰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옥상 위 카우보이>도 ‘불륜’이라는 사건이 벌어진 후의 이야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사건 이후’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사람이 살면서 큰 사건을 겪는 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불행처럼 논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특히 비극적인 사건은 내가 어떻게 해서 겪는 일이 아니잖아요. 갑자기 찾아온 돌덩이 같은 것인데, 그런 일을 겪었을 때 인간은 슬퍼한다든지 좌절한다든지 그것에 대한 반응밖에 할 수 없는 것 같아요. 근데 어쨌든 폭풍이 지나간 후에 살아야 되잖아요. 저는 그 후에 삶을 모색하는 게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쨌든 사건을 겪었는데, 그 후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게 재밌어요. 


어쩌면 전공이랑 상관있는 것 같기도 해요. 큰 사건을 겪은 후에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서 피를 토해내는 심정으로 상담에 오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럴 때 살아낼 방법을 찾아내는 것, 저는 거기서 인간성이 나오는 것 같아요. 인간만이 보여 줄 수 있는 품위랄까? 실제 사례들을 보면서도 그런 데서 많이 감동했던 것 같아요. 모든 사람이 큰일을 겪고 난 후에 극복해내는 건 아니잖아요. 한 열 명 중에 8~9명은 그냥 고꾸라지는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기어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 순간이 저는 너무 멋있었어요. 이야기가 사람의 저런 순간들에 대해서 다룰 수 있다면, 그리고 그걸 관객이 볼 수 있다면 살면서 언젠가 만나게 되는 어떤 힘겨움 앞에서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런 주제를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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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주인공들이 대체로 주변인이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까요?  <두 번째 시간>에서 故 장준하가 아닌 그의 부인이 주인공인 것처럼요.

  

그냥 그게 우리인 것 같아요. 장준하 같이 유명한 사람은 (우리에게) 멀고 거리가 지어지잖아요. 근데 관계성에서 사람을 만나면 나도 누군가의 와이프일 수도 있고, 누군가의 와이프가 나의 엄마일 수도 있으니 상상하기가 수월하고 이입해서 들어가기 쉬운 것 같아요. 

 

 

다수의 작품과 워크숍을 통해 ‘역사 속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2020년에 문화비축기지에서 진행하신 구술 생애사 자료를 활용한 쇼케이스 등). 거대 역사 혹은 사회 문제 속 개인에 주목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소년B가 사는 집>, <옥상 위 카우보이>처럼 이야기를 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했다가, 점점 <두 번째 시간>이나 <네 번째 사람>처럼 (사회 문제로) 관심사가 커진 것 같은데요. 역사적 사건들이 어느 순간 반복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특히 폭력 같은 경우는 굴레라고 할 만큼 나아졌다가 다시 고꾸라졌다가 하죠. 왜 그럴까? 역사를 배우는데 인간은 왜 같은 것을 반복할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우리가 역사를 하나의 거대한 플롯으로만 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역사 속에서 개개인들이 무엇을 봤고, 무엇을 겪었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했는가를 알게 되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사람'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구술 생애사 같은 경우에는 일제 강점기 때 태어나서 독재 정권과 민주화 운동을 겪고 지금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생애에 대해 공부하고 캐릭터를 만든 거였거든요. 우리가 배운 그 시대의 사건들도 개인의 입을 통해서 얘기를 듣다 보면 좀 달라요. 그게 굉장히 복잡하고 재밌더라고요. 과거를 볼 수 있는 다른 눈, 그리고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다른 시선들을 찾을 수 있겠다 싶어서 극단 안에서도 워크숍 형식으로 작업을 계속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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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공연 사진 ⓒ 사진 박태준

 

 

일전 연극인 기사를 통해 말씀해 주신 것처럼, “오늘날 연극을 한다는 건 그 이유를 끊임없이 자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일 것 같은데요. 어떤 마음으로 연극을 계속하고 계시는지도 궁금합니다. 

 

연극인이 아닌 사람들한테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연극 왜 해요?”거든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일을 하면 월급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고, 돈이 안 되면 명예라도 있어야 할 텐데 명예도 없으니까(웃음). 어릴 땐 ‘열심히 연극하는 사람 힘 빠지게 저런 얘길 왜 하는 거야?’ 이랬는데, 요새는 영상 작업과 연극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직업이 프리랜서이다 보니까 나는 그대로이고 주변 환경은 갑자기 휙휙 바뀌는데, 저한테는 연극을 하는 게 저를 지키는 방식인 것 같아요. 처음에 이야기를 왜 쓰게 됐고 이야기를 왜 아직도 쓰고 있고, 그런 고민의 답이라고 해야 되나? 항상 그런 고민을 하면서 희곡을 썼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그래요. 계속하던 걸 계속하는 게 나를 지키는 방식이라고. 우리는 기브 앤 테이크에 엄청 익숙해져 있잖아요. 내가 노동력을 들인 만큼 결과가 오지 않으면 실패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사실 사는 게 그렇진 않거든요. 인간관계도 그렇고요. 연극이 그런 면에서 유사한 것 같아요. 내가 들인 만큼 정확히 오지 않는데도, 점점 내가 하는 것에 대해서 애정과 의미가 쌓이잖아요. 그런 게 좋은 것 같아요. 

 

 

2013년 연극 <그날>로 데뷔하신 이래, 어느덧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앞으로의 계획, 혹은 목표가 있으시다면 듣고 싶습니다. 

 

어쨌든 계속 글을 쓰고 있어요. 극단 내부적으로는 내년 신작을 위해 글을 쓰고 있고요. 아주 특별한 예술마을 작업도 계속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공연을 올리겠죠?

 

 

[김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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