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 [미술/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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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는 조선시대 문인이자 화가였던 추사 김정희가 길고 척박했던 제주도 유배 시절, 변치 않는 우애를 보여주었던 제자 우선 이상적에게 선물한 그림이다. 빈 초옥과 소나무, 측백나무만을 묘사한 간결한 화면이지만 표제부터 그림, 제시의 길이까지 포함하면 약 15m에 이르는 대작이며,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김정희, 〈세한도〉, 조선 1844년, 두루마리, 종이에 먹, 23.9×108.2cm, 2020년 손창근 기증, 국보 제180호, 국립중앙박물관.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를 개발하고 서화, 교육활동, 관직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지만,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는 것은 바로 이 〈세한도〉이다.
동지사 부사가 내정되었던 55세 당시, 김정희는 세도정치의 알력과 견제 사이에서 안동 김문의 모함에 휘말려 제주도 유배를 떠나게 된다. 갑작스러운 위리안치에 김정희의 심정이 어땠을지 감히 상상하기 힘들다.
당시 김정희의 제자 우선 이상적은 제주도에 홀로 남은 김정희를 위해 중국에서 수입된 귀한 책들을 두 차례나 선물하고, 변함없는 우애와 존경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아무도 없는 제주도 울타리 안에서 이상적이 보내온 책들은 큰 위로가 되었으리라.
쓸쓸했던 시절, 변함없이 자신의 옆을 지켜준 제자를 위해 김정희는 공자의 『논어』속 한겨울의 추운 날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측백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안다’는 구절을 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그 우정과 절개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화면은 중앙의 빈 초옥과 측백나무, 소나무 몇 그루가 그려졌을 뿐이지만, 물을 거의 쓰지 않은 갈필과 여백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간결한 구도는 어딘가 담담하고 굳은 기운을 내비친다. 김정희의 외롭고 쓸쓸했던 마음과 이상적에 대한 고마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듯하다.
그림을 전해 받은 이상적은 청나라 출장길에 세한도를 가져가 친분이 있던 청나라 문인 16명에게 제시를 받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대부분 군자의 우애와 절개에 관한 것이다. 가장 뒷부분에는 각 1914년, 1949년에 〈세한도〉를 감상했던 오세창, 정인보와 같은 근대의 지식인들이 남긴 제시가 남아있다.
그림에 얽힌 감동적인 서사 또한 〈세한도〉가 조선시대 문인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손꼽히는 이유 중 하나이지만, 이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역시 김정희의 뛰어난 표현력과 치밀함에 있다. 마른 붓질로 표현된 강가와 빈 집, 양옆으로 자리한 소나무와 측백나무는 얼핏 간단히 슥슥 그린 듯하지만, 그 구도에서 느껴지는 치밀함은 김정희의 복잡했던 마음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우측 상단의 〈세한도〉라는 제목 옆에는 이상적에게 주는 그림임을 확실히 하듯, “우선 보시게나. 완당(藕船是賞 阮堂)”이라 적어두었으며, 우측 하단에는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뜻의 ‘장무망상(長毋相忘)’인장을 찍었다. 인장을 통해 이상적에 대한 김정희의 마음을 표현함과 동시에 그림을 받는 상대를 명확히 설정했다는 점에서 김정희의 치밀함과 섬세함이 엿보인다.
이밖에도 김정희는 교육 활동에 굉장히 적극적이었고, 김정희의 제자로 알려진 사람만 해도 30명에 달한다. 그중에서도 소치 허련과 소당 김석준을 유독 아꼈으며, 소당 김석준에게는 본인의 글씨를 궤짝으로 실어갈 만큼의 글을 써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세한도〉가 독보적으로 특별한 위치를 가지게 된 이유는 역시 관람자들 또한 작품을 보며 화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제주도 위리안치라는 특수한 상황과 이상적의 변함없는 우애가 아니었더라면 〈세한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간결하면서도 빈틈없이, 섬세하게 구성된 화면과 김정희의 추사체, 그림에 담긴 서사만 해도 〈세한도〉는 김정희가 추구하는 사의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임에 틀림 없다. 김정희로 시작해 청대 고증학자, 근대 한국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중국, 조선, 한국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글이 총망라되어 있다는 점 또한 작품의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8년 4개월에 달하는 긴 유배 기간 동안 김정희가 느낀 쓸쓸함과 더불어 이상적과 나눈 우애의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김정희의 〈세한도〉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한겨울 지나 봄 오듯 - 세한歲寒 평안平安” VR전시를 통해 언제든지 감상할 수 있다.
[김윤비 에디터]<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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