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제주가 품고 시선으로 낳은 [미술/전시]

제주현대미술관 <김보희: the Days>전
글 입력 2022.10.07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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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심드렁했다. 잿빛 구름이 듬성듬성 끼어 밝지도, 그러나 지나치게 흐리지도 않은. 하늘은 그렇게 온종일 약간 울먹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이 짓는 작은 우울의 표정을 만끽하기 위해 미술관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쌀쌀한 바람이 나를 따라 움직였고, 나는 겉옷을 여몄다.


저지문화예술인 마을 안에 자리 잡은 제주현대미술관은 적요했다. 언제나 여행객으로 붐비는 소란스러운 관광의 섬이지만 그 이전에 생업과 삶의 터전이기에, 사실은 제주 곳곳에서 흔한 고요함이 전부 이곳에 몰려든 것만 같았다.

 

제주의 또 다른 얼굴처럼 무뚝뚝하지만 어쩐지 다정한 표정의 돌들이 서로의 몸통과 얼굴이 되어 여행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따금 작고 느린 인기척이 주위를 잠시 메우다 사라졌다.

 

마음껏 우울하기에, 또 한동안 고요하기에 적절한 장소라고 생각하며 잠시 주변을 거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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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입장해 처음 한 일은 양치질. 속을 헹구고 개운한 느낌으로만 채워야 할 것 같은 공간의 침착함에 취하면서 안내문을 살폈다. 50여 년 동안 작품 활동을 이어온 한국화가 김보희의 기획 전시 <김보희: the Days>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티켓을 끊고 전시장에 들어가 작품들을 천천히 둘러봤고, 어떤 작품에서는 유난히 오래 머물렀다.


<김보희: the Days>전은 작가 김보희의 시선을 따라간다. 제주의 모습을 시선에 담고, 그 형상과 색채를 구현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고민하고, 끈기 있게 붓질한 흔적이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제주를 보는 멀고 가까운 시선들. 밝고 화창한 제주의 흐릿한 뒷면을 닮은 차분한 색감으로 표현해낸, 내가 보지 못했던 제주의 빛을 잡아내는 작가의 시선 자체가 예술의 개념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듯 보였다.


눈길을 끄는 몇몇 작품의 제목은 towards, 혹은 untitled로 반복되고 있었다. 어떤 것을 ‘향하여’ 진행되던 예술이 과연 어디쯤에 도달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감상에 맡긴다는 기분 좋은 무책임함, 혹은 도저히 스스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함부로 정의하지 않겠다는 창작자의 따뜻한 겸손이 느껴졌다.


전시장을 채운 작품들 중 절정은 단연 수평선을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대형 캔버스 위 확실하게 그어진 수평선 위아래로 동일 계통의 색이 다채로운 색감과 질감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거꾸로 뒤집어도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무한히 뻗으며 차분히 섞이고 말 것만 같은 하늘과 바다의 그림. 이 작품의 제목 또한 toward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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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실제와 상상을 뒤섞어’ 그려낸 씨앗들은 각각 역동의 패턴과 정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었다. 역동도, 정지도, 모두가 탄생과 생장 의지의 한 방식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잠시 멈춰있는 나도, 한껏 움직이는 당신도, 꿈틀대고 비틀대고 휘청이면서, 어쨌든 살아내고 있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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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씨앗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싹을 틔우고, 언젠가 삶이자 이상향인 공간 안에서 이토록 거대하게 피어날 테다. 흐릿하게, 혹은 화려하게, 저마다의 무언가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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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희의 시선에서 잉태된 작품들은 일상과 상상,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 방식을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말한다. 야자나무 위로 살짝 뜬 조각달도, 자동차 후미등의 깜빡임도, 화려한 색감의 하늘과 바다도, 가만히 멈추고 들여다보면 일상의 풍경 모두가 절정이라고. 그렇게 사실성과 추상성의 경계에서 절정이 된 삶의 구체성은, 언젠가 예술로 태어난다고.


 

* 사진은 <김보희: the Days>전 작품을 직접 촬영한 것으로,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이 불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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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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