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의 합주실 공사일지 [공간]

오랫동안 방치된 밴드 동아리방 리모델링 이야기
글 입력 2022.10.0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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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나의 공사일지이다. 개강과 함께 지난 2년 코로나19로 멈춰있던 밴드 동아리 활동을 재개하기로 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동아리를 다시 일으켜보자며 야심 차게 신입부원 모집을 시작했다. 그리고 동아리방을 열자....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진동했다. 긴 시간 동안 방치된 공간은 처참했다.

 

이 일지는 그 동아리방이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게 된 비하인드를 담고 있다. 생각보다 힘들고 큰 규모의 공사를 하게 되면서 괜히 발을 담갔다, 단단히 코 꿰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 사이에 알게 모르게 동아리에 대한 애착이 싹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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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드 동아리인 만큼 악기 관리가 생명임을 알았음에도 비대면으로 진행되었던 지난 학기들로 인해 상태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다. 습기와 곰팡이에서 살아남은 악기들은 기타 셋, 베이스 둘, 그리고 버려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은 드럼 한 세트뿐이었다. 하얗게 핀 곰팡이를 물티슈로 닦아 내면서 한숨과 기침이 멈추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앰프와 라인 또한 다 고장 나 있어 다시 주문해야만 했다. 문제는 예산이었다. 시공업체를 부를 정도의 예산은 물론 없거니와 아직 신입부원 모집이 끝나지 않아 회비를 걷기에도 애매했다. 결국 셀프 시공을 해보겠다며 나를 포함한 임원진들은 머리를 싸매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예비 역장의 아이디어로 선배님들께 도움을 요청드려보기로 했다. 오랫동안 끊겨있던 고품이 다시 하나가 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현 동아리방의 상태와 필요한 자재 목록과 예산을 만들어 이제는 까마득한 선배님들만이 소통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도움 요청 글을 올렸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지만 글을 올린 뒤 이틀 동안 정말 수많은 선배분들에게서 연락과 도움을 받았다. 생각지도 못한 규모에 동아리방을 새롭게 그리고 볼만하게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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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재를 사용해 합주실 방음을 할 수 있을지, 예산을 어떻게 짜야 할지 고민하며 끙끙거리던 차에 20년 전 졸업하신 선배님의 등장으로 판도가 완전히 뒤집혔다. 너무나 감사하게도 전라도에서부터 달려오신다며 예산과 공사 설계도를 보내오셨다.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공사에 당황할 틈도 없이 선배님은 합주실 측정과 자재 구입을 요청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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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재를 구하려고 철물점을 돌아다니며 발품을 팔았다. 다른 윗기수 부원분들도 합세해 자재를 구해다가 공사 당일에 배송을 받기로 했다. 얼마나 큰 공사가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아 불안했다. 스티로폼 벽이 뜯어지고 남은 자리에는 지난 시간이 가득 느껴지는 시멘트벽과 1991년도의 영자신문이었다. 이 큰 벽을 어떻게 다시 메꿀지 막막하긴 했지만 주말이면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란 희망도 함께했다. 공사 준비를 무사히 마치고 선배님이 공지하신 준비물은 단 하나, "건강한 body..."였다. 긴장 반 설렘 반으로 시간이 후딱 지나 주말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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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곱시 학생회관 앞으로 집합. 몇몇 늦잠에 빠진 이들을 제외한 넷이서 트럭으로 배달된 자재들을 지하로 옮기기 시작했다. 힘쓰는 일들은 대부분 건장한 분들에게 맡겨져 안절부절 어떤 걸 해야 할지 몰랐다. 당황한 것도 잠시 일사천리로 일을 분배해 주시는 선배님의 지휘로 은박 테이프로 각목 뼈대 사이사이 틈을 메꾸는 역을 맡았다.

 

그래도 고양이 손으로 옮기고 정리하고 치우다 보니 오전 공사는 골격을 다 세우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점심과 저녁 메뉴를 골라 주문하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작업 속도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덕에 두 식사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사색의 광장 앞에 앉아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그보다 더 뜨거운 짬뽕을 먹은 기억은 오래도록 그 온도로 기억에 남아 있을 것 같다.

 

골격이 완성된 다음은 석고 보드를 하나하나 벽에 맞춰 잘라 넣는 것이었다. 답답해도 마스크를 꾹 눌러쓴 채로 보드를 붙였다. 방음이 제발 잘 되길 바라면서. 자정까지 계속된 작업은 석고보드를 마무리하고 편백 루바로 덮을 준비를 한 뒤에야 마무리되었다.

 

지친 공사 멤버들은 선배님이 사주신 소고기를 먹고 내일도 나와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좀비처럼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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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작업할 예정이라 어제 먹고 온 아침보다 더 챙겨 먹고 기숙사를 나섰다. 곰팡이 냄새가 좀 가신 느낌이 드는 동아리방. 오늘 안에 벽 공사를 다 마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부지런히 편백 루바(나무 벽)을 옮기면서 자연스레 일을 시작했다. 조립형인 루바는 얇은 쇠못을 쏘는 타카건으로 손쉽게 고정할 수 있지만 문제는 합주실 벽의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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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밑 공간에 위치해 양쪽 벽이 평행사변형의 모양인 합주실 벽에 루바를 붙이기 위해서는 일일이 길이를 재 잘라내야 했다. 자재를 여유 있게 구입한 편도 아니고 다시 주문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라 세심한 계산이 필요했다. 하나하나 옮기고 재보며 벽을 하나하나 채워나가다 보니 금방 또 시간이 지났다.

 

에어컨이 붙어있는 한 쪽 벽을 제외하고는 제법 빠르게 완성이 되었다. 이제는 위험한 타카 건도 슝슝 잘 쏠 수 있게 된 것이 뿌듯하기도 했다. 휘날리는 편백나무 가루향이 곰팡이 냄새를 다 덮어주어 좋기도 했지만 그 향 자체도 강하게 인상에 남았다. 가끔 편백나무 향을 맡으면 자연스레 이 공간이 떠오를 것 같이. 루바 작업을 마치니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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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도 같은 선배님이 가시고 남은 작업은 임원진과 실기수 선배들이 마무리했다. 장판을 구해와 바닥을 메꾸고 악기들을 수리점에 맡겼다. 대학교 동아리임을 내세우며 잘 부탁드리는 것은 총무인 나의 일 중 하나였다. 수많은 영수증 처리는 나중에 걱정하기로 하고 이리저리 발품을 팔며 악기를 다시 세팅하고 필요한 물품들을 주문했다.

 

장판을 깔고 뒷정리까지 마치니 어엿한 스튜디오 하나가 완성되었다. 시작할 때에는 그저 울고만 싶었던 공간이었는데 이렇게 달라질 줄 미처 기대하지 못했다. 이케아에서 구입해온 스튜디오용 조명까지 달자 동아리에 대한 애정이 마구 샘솟는 기분이 들었다. 또 언제 내 손으로 공간이란 것을 만들어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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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우리의 동방 공사일지


특히 이제 새로 들어올 부원들이 이곳에서 합주하며 즐거운 추억을 쌓아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조금 나이 든 학번이 티가 나지만 그래도. 밴드 동아리를 만들어보겠다며 지하 공간에 시멘트 벽을 쌓아 동아리방을 만드신 1기 선배님들의 마음이 이러셨을까 감히 헤아려본다. 공간에 대한 애착은 스스로 공간을 만들 때 가장 강하게 생겨나는 것 같다. 이전에 있었던 추억은 추억으로 놔두고 새롭게 벽을 덮어 또 새로움을 맞이하는 것. 짧지만 강하게 남을 기억일 것이다. 부디 오래 버텨주길 나의 청춘이 묻은, 그리고 앞으로도 뼈를 묻을 고려품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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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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