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비극 - 연극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

글 입력 2022.09.21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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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 줄 몰랐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와 같은 범죄자 지인들의 반응은 어김없이 기사화되고, 많은 이들의 공분을 사곤 한다. 범죄자의 선하고 인간적인 측면을 부각하며 마치 그의 범죄가 단 한 번의 실수였다는 듯 그려지는 데에는 나 역시 반대한다. 하지만 한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어떤 심리적 변화를 거쳤고 무엇의 영향을 받았는지 파헤치지 않고 어떻게 다음 비극을 막을 것인가.


극단 산수유의 18번째 정기 공연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에는 현장학습을 간다며 거짓말하고 어머니의 차를 몰고 나가 아이 둘과 아이 엄마를 치고 자살을 택한 아들이 나온다. 그의 행동을 타임슬립을 경험하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따라가 본다.

 

 

 

모두가 자기 세계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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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상을 보지는 않는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어떤 신념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같은 기사를 읽더라도 완전히 다른 해석을 내놓곤 한다. 세계는 하나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자신이 보는 세계가 각각 존재한다. 한집에 사는 가족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다.


현장학습이라며 셔츠를 찾고,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며 서둘러 나가는 아들의 모습은 여느 집과 다름없는 일상이다. 그러나 몇십 분 지나지 않아 미옥은 진우가 자신의 차를 몰래 몰고 나가 고의로 사고를 냈다는 끔찍한 소식을 듣는다.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충격을 받은 미옥의 집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조사를 받던 중 쓰러진 미옥은 사고가 일어나기 전 아침으로 타임슬립을 경험한다.


타임슬립이 몇 차례 반복될수록 중요해지는 것은 진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다. 그저 평범한 고교생처럼 보이던 진우는 두 번째, 세 번째 아침에서 이기적이고 어머니를 함부로 대하는 자식, 니체의 철학에 등장하는 ‘위버멘쉬(초월자)’에 깊게 빠진 광신도로 변모한다.

 

분명 같은 날 아침 같은 상황인데, 진우의 모습이 달라지는 건 우리가 누군가를 안다는 게 얼마나 불분명한 일인지 보여준다. 같은 사람의 사진이라도 어떤 각도에서 찍었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얼굴로 보인다. 평면에 붙박인 사진으로 계속 움직이는 존재인 사람의 외양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듯이, 인간의 내면 또한 그러하다.


이 극은 가장 가깝다고 여겨지는 가족조차 서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관과 철학이 진우에게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 안에서 꼭 이뤄야 하는 목표가 있었기에, 그날 아침 어머니의 키를 훔쳐 나가는 그의 마음은 순교자와 같았을 것이다.

 

그와 다른 세계에 있는 우리는 합당하고 옳은 일을 한다는 그의 믿음이 이상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나에게는 당연하고 선(善)이었던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나 낯선 것이었던 경험이 모두에게 있지 않은가. 진우는 괴물이 아니라 자신만의 논리에 너무 깊게 빠져든 보통 인간일 뿐이다.

 

 

 

안개처럼 가라앉은 일상 속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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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각자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지만, 진우의 철학은 일반적으로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관객은 자연스럽게 어머니인 미옥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홀로 열심히 키운 아들이 자신이 전혀 모르는 존재가 되었다는 당혹스러움과 공포심을 공유한다. 이때 등장하는 ‘현우’의 존재는 이 관계를 어머니가 아닌 아들의 입장에서도 볼 수 있게 한다. 진우의 형이자 미옥의 큰아들인 현우는 극 중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인물의 대사로만 언급되지만, 이 사건의 열쇠를 쥔 사람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에서 과거 미옥, 진우, 현우까지 세 사람이 같이 살았지만 2년 전 현우가 집을 떠난 이후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음이 드러난다. 게다가 미옥은 이상하게 현우를 ‘없는 자식’ 취급하며 진우를 그와 분리하고 싶어한다. 극 후반부에서 현우가 같은 남자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게 밝혀지며 의문이 풀린다. 모든 ‘비정상’의 세계를 배제하고 안전한 ‘정상’의 세계에 머물고자 했던 미옥은 현우의 세계를 수용할 수 없었고, 이내 그를 자신의 세계에서 지운 것이다.


그렇게 ‘평범’과 ‘정상’이라는 틀 안에 끼워 맞춰지기 위해 잘려나가는 것들이 있었고 상처 입는 존재가 있었다. 이 비극은 그 상처가 가장 나쁜 방식으로 곪아 터진 결과로 볼 수도 있다. 미옥이 이 사건을 계기로 애써 지우려 했던 자신의 과거를 기억해내고, 첫째와 달리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둘째 아들의 끔찍함을 발견해냈다면, 진우에게 엄마는 오랫동안 끔찍한 사람이었다. ‘행복한 척’이 곧 행복한 것과 다름없다고 믿었던 사람, ‘정상’의 세계에 머물기 위해 그 바깥의 아들을 내쳤던 사람.


현우와 있었던 일이 밝혀지며 앞서 절절한 모성애를 표현하는 것처럼 보였던 어머니의 대사는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너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자식이고, 네가 곧 나이기에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는 말에는 우리가 절대 분리될 수 없다는 집착이 서려 있다. 이 극은 어머니와 두 아들을 통해 부모와 자식이라는 일심동체 관계에서 어떤 비극이 발생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예정된 비극을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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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은 진우가 잠깐 이상한 철학에 빠진 건 현우의 영향이므로 그와 단절된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 믿는다. 타임슬립이 반복되는 중에도 미옥은 오로지 진우의 안위만 신경 쓸 뿐이다. 자기 자식은 친구를 잘못 만난 것뿐이라던 학교폭력 가해자 부모를 비웃던 그는 결국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본래 순하고 착한 우리 아들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설득에 몇 번 실패한 다음에야 미옥은 깨닫는다. 더 이상 아들을 자신의 세계에 편입시킬 수 없으며, 사건의 방향을 틀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들의 세계로 직접 가봐야 한다는 것을. 진우를 이 사건에서 분리하는 게 아니라 미옥 자신이 그 사건 한복판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 사건은 결국 진우의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고, 그 세계는 현우에게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두 사람은 2년 동안 만나지 않은 현우를 만나야만 한다.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미옥은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 거라는 말 대신, 진우가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 미지의 세계에 문을 두드린다. 늘 각자의 방에 머물던 이들이 공용공간에 나와 처음으로 함께 외출을 결심할 때 비로소 처음과는 다른 전개가 펼쳐진다. 어떤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기 시작한다.

 

연극을 다 보고 제목으로 돌아오면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에서 ‘당신’은 연극을 보는 관객 각각을, ‘아들’은 우리 각자가 매번 마주하는 타인을 일컫는 것처럼 느껴진다. 즉, '우리는 타인을 모른다'. 자신만의 논리와 가치관을 바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각각이 나와 다른 타인의 세계를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신은 아들을 모른다>의 비극이 '안다고 믿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면, 모른다는 걸 인정할 때에야 누군가를 진짜로 알게 되는 건 아닐까. 극장을 나서며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얼굴들을 떠올려 본다.

 

 

[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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