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피아노 위의 지휘자 - 알렉산더 말로페예프 피아노 리사이틀

차이코프스키 영 아티스트 국제 음악 콩쿠르 우승, 국내 첫 리사이틀
글 입력 2022.09.1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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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말로페예프(Alexander Malofeev)는 2001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그네신 모스크바 음악학교를 졸업한 후 2019년 모스브카 국립 차이코프스키 음악원에 입성했다. 그는 2014년 차이코프스키 영 아티스트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국제적인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또한 2017년에는 첫 '젊은 야마하 아티스트'로 선정되기도 하였으며 정명훈, 발레리 게르기예프 등의 저명한 지휘자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오케스트라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했다.


9월 3일,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국내 첫 리사이틀 공연이 있었다. 지난 5월, 국립 심포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앞두고 그가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아 내한이 무산되었기에 더욱 반가운 내한이었다. 본 공연은 2부로 진행되었다. 이 역사적인 공연의 1부 첫 곡은 베토벤(Beethoven)의 피아노 소나타 17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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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소나타 17번은 작품번호(Op.) 31번으로 묶인 세 소나타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인생에서 힘든 과정을 겪고 있던 베토벤의 슬픔과 그를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집약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베토벤의 음악이 중기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며, 그 속에서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기법이나 그의 음악 방향성에 대한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주로 '템페스트'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그가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언급했다는 일화가 있기 때문이다.


17번 소나타의 세 악장 중 대중들에게 가장 익숙한 3악장이 끝난 뒤, 또다른 소나타가 공연장에 울려 퍼졌다. 메트너(Medtner)의 소나타 사단조였다. 메트너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작곡가이다. 그가 활동했던 1900년 당시는 후기 낭만주의 시대 이후 모더니즘의 물결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그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모더니즘과 고투했고, 러시아 풍의 낭만주의 작품들을 써냈다.

 

메트너의 소나타는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독창성이 뛰어나고, 복잡한 화성과 특색 있는 멜로디를 가진 곡이다. 그 중에서도 말로페예프가 연주한 피아노 사단조는 메트너의 창조적인 작곡 능력과 풍부한 감정 표현을 느낄 수 있다.


말로페예프는 두 개의 소나타를 1부에 편성했다. 그는 두 작품이 매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베토벤과 메트너가 공통적으로 방황과 불확실성의 시기에 맞서 싸우며, 그들의 소나타를 통해 각자의 캐릭터를 표현해냈다고 언급했다. 그가 말한 것처럼 1부의 두 곡은 전체적으로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며 공연장을 이끌어갔다. 하지만 템페스트의 3악장을 기점으로 과도기 속 방향성을 고민했던 음악가들의 고뇌가 두 곡을 이어주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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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의 프로그램은 스크리아빈(Scriabin)과 라흐마니노프(Rachmaninoff)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다. 두 작곡가는 모스크바 음악원 동기이자 경쟁자였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였다. 두 작곡가는 보편적이고 순수한 음악미를 본질적으로 추구하는 음악 양식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자신만의 개성이 매우 강한, 그들만의 세계를 창조한 독립적인 음악가이다.


스크리아빈이 활동했던 당시 19세기 초 러시아에서는 과학적 인식이 급속도로 발달함에 따라 인간의 존엄성 등이 상실되는 사태를 예견하는 허무주의가 등장했다. 이에 스크리아빈은 절대적 가치가 상실되는 시대의 해결을 신비주의에서 찾으려 했다. 그는 신비주의를 음악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가 중기에 등장하기 시작한 신비화음이라는 독자적인 화성어법이다. 그는 신비화음을 통해 인간과, 보다 높은 수준의 영적 실재인 신과의 교류를 표현하고자 했다. 이는 음악사적으로 후기 낭만주의에서 20세기의 무조성 음악으로의 선구자적인 역할에 기여했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된 스크리아빈의 프렐류드(전주곡)는 스크리아빈만의 작품 세계가 잘 담겨 있어 그의 대표 작품으로 꼽힌다.또한 즉흥곡은 풍부한 멜로디와 엇박 리듬을 보여주는 곡으로, 부드러운 느낌의 첫 번째 곡과 격정적인 감정의 두 번째 곡으로 구성되어 상반된 매력을 감상할 수 있다. 말로페예프는 스크리아빈의 초기 작품인 두 개의 즉흥곡과 다섯 개의 프렐류드는 오직 미래에 대한 예찬만을 보여주며, 그 지점에서 스크리아빈의 순수함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스크리아빈과 동시대에 활동한 음악가로, 낭만주의 음악들을 만들어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이후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지만 끊임없이 조국을 그리워했고, 그의 작품에도 역시 러시아적인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약 198cm의 큰 키와 30cm가 넘는 큰 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라흐마니노프의 손이 아니면 연주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만큼 어려운 기교의 곡들이 몇 존재한다. 그의 작품에는 스크리아빈이 구축한 독자적인 어법의 영향 역시 분명히 존재한다.

 

그는 대규모 작품을 주로 작곡했지만, 작은 규모의 독립적인 곡들에서도 역시 라흐마니노프의 진가를 발휘했다. 이번 공연에서 연주된 회화적 연습곡은 라흐마니노프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테크닉과 음악적 능력을 비롯한 시적 감성을 요구한다. '회화적'이라는 수식어가 꼭 맞는 뚜렷한 캐릭터를 가진 여러 짧은 곡으로 이루어져 있다. 말로페예프는 이 작품에 대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유산들 중 묘사의 정점을 담아낸 작품이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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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약 100분 가량 동안 자신의 모든 노력을 들여 공연을 완성해나갔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귀는 저 멀리 있는 관객들에게도 그가 얼마나 지금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는지 설명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이탈리아의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Riccardo Chailly)는 말로페예프에 대해 영재를 뛰어 넘어 모든 피아니스트들이 어려워하는 음악적 깊이, 테크닉, 음악성 그리고 기억력 모두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말처럼 말로페예프는 작곡가들이 담아낸 작품 속의 깊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 그가 갖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관객들에게 무사히 전달해냈다. 다른 연주자들이 가볍게 터치를 하고 지나가는 음들마저 말로페예프의 손끝에서는 알맹이가 있는 단단한 소리가 되어 들려왔다. 러시아 피아니즘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체화하고, 그 계보를 잇는 말로페예프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너무나도 만족스러운 공연이었다.

 

말로페예프는 공연이 모두 종료된 후 앵콜로 무려 여섯 곡이나 연주를 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연이 진행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로페예프의 표현이 더욱 풍부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맨 처음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할 때까지만 해도 왠지 모르게 긴장을 한 채 자신이 해석한 작품을 관객들에게 잘 전달해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공연의 마지막으로 치닫을수록 작곡가와 물아일체가 되어 작품을 '전달'하는 것이 아닌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잠시 들어갔다가 앵콜 연주를 하기를 여섯 번이었다. 공연이 다 끝난 후 긴장이 다 풀린 상태로 웃음을 짓기도 하며 여러 번 왔다갔다 앵콜 연주를 하는 그의 손가락은 정말 건반 위를 날아다닌다는 표현이 꼭 맞게 춤을 추고 있었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는 연주를 보고 있자니 나까지 절로 신나고 행복했다.

 

오른손을 연주하는 동안 허공에서 지휘하듯 손짓하는 말로페예프의 왼손이 기억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가끔 연주를 하다가 관객석을 쳐다보던 그의 순진무구한 얼굴이, 앵콜 도중 누군가의 "브라보" 소리에 웃으며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던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오는 10월 그는 프라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연주를 위해 다시 한번 내한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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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스톰프뮤직 SNS

스크리아빈의 『피아노 소나타 제5번 작품53』에 관한 연구, 이현진(2003)

 

 

[민시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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