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 이상 돌아갈 '할머니 집'이 없다 [사람]

글 입력 2022.09.09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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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돌아갈 '할머니 집'이 없다



서울.


엄마의 고향이며 외할머니의 고향이기도 했다.


사람도 많고 길도 복잡하여 잘못 발을 디뎠다간 어디론가 휩쓸려 갈 것 같은 도시. 어린 시절 서울에 대한 감상은 명절 귀경길에 머물러 있다. 일 년에 한두 번이었지만 내내 경기도를 떠난 적이 없었기에 서울은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졌다.


중요한 것은 나의 고향은 아니었다. 매년 명절이면 이모부의 작달만한 봉고차에 두 가구가 붙어 앉아 멀미 나는 도로 정체를 견뎌내야 했다. 유독 멀미가 심했던 나는 할머니가 손수 깔아준 이부자리를 피해 큰 방으로 도망쳤다. 나이 차이가 한참 나는 언니들의 대화에 끼지도 못하고 칼칼한 수정과로 목을 축였다. 그의 도움이 하등 필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할머니의 존재로 인해 모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안부를 묻고 우리의 안부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해가 바뀌어도 늘 방에 앉아 티브이만을 달고 살았던 나의 할머니. 쪼그라들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만큼 체구가 작고 앙상한 몸이었다.

 

이전에 기고한 글을 통해 외할머니의 부재를 알린 바가 있다. 할머니의 장례는 서울에서 치러졌다. 90세를 거뜬히 넘는 고령의 연세로 뒤늦게 찾아온 치매가 큰 외숙모를 내내 괴롭혔다. 요양원 문제로 엄마와 삼촌은 자주 다퉜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간 지 일 년도 안 돼서 할머니는 작고하셨다. 교회 권사였던 할머니에게 불교 신자인 엄마는 정성 들여 절을 올렸다.


그 날 빈소에는 슬픔 만큼 반가움이 몰려왔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직장인이 되었고 사촌 오빠는 딸바보 아빠가 되었다. 데면데면했던 학창 시절과 오랜 회사 생활을 겪어낸 그 사이에 잃어버린 시간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휴대폰을 켰다가 껐다가 닫아버렸던 마음들을 이야기했다. 이내 기름진 음식과 어른들의 참견 없이 대화를 나눠보자며 모임을 약속하였다. 슬픔으로 침전된 곳에서 반가움과 설렘이 기웃거리다니. 이번에는 할머니의 부재를 통해 모이려 하고 있었다.


또래끼리 통하는 이야기를 한 움큼 쏟아내었고 부모 이야기를 하면 형제간의 일화로 이어져 밤새 신랄하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나와 달리 평생을 할머니와 한 지붕 아래 살았던 사촌 언니는 할머니가 평생 오빠 하나만을 편애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몰래 투정이자 미움이었는데, 어쩐지 그리움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결국 서울 큰집에서 눈을 뜬 나는 아침밥까지 얻어먹자 괜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세상 물정 모르는 것들이 애도를 표할 줄 모르고 저희들끼리 신이 나 술이나 먹고 다닌다며 말이다. 그러나 한 데 입을 모은 것처럼 잘했다고 말했다. 나의 엄마도, 외숙모도, 삼촌도.

 

잘했다, 이제 그렇게 너희들끼리 만나야 해. 정말 잘한 거야.

 

 


부재(不在)



지난 5월,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도 코로나 확진자가 급격하게 늘었다. 함께 일하는 직원이 일주일의 격리 끝에 돌아오자마자 외조부상을 당한 것이다.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을 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근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꺾어 만류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게 내 진심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감당 못할 만큼 쌓인 업무들을 해결하기에 턱없이 모자란 내 체력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그에게 눈치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 나의 경우는 3일 내내 빈소를 지키고 발인이 끝나자마자 회사를 찾았었다. 주말도 반납해야 할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고, 슬픔은 잠시뿐이었으니 이제 일을 하러 갈 차례였다.


이야기는 추석을 맞이하여 다시 화두에 올랐다. 우리는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 사라진 공통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

 

어머니는 슬퍼하셨나요?

 

당연한 질문이었고 상냥한 대답이 돌아왔다.

 

엄마의 슬픔을 마주 봐야 한다는 것, 아무래도 그게 가장 슬픈 것 같다고. 유난히 다복한 가정에서 아낌없이 자랐으리라. 돌아오는 추석을 걱정하는 그는 따뜻한 사람이다. 나는 그처럼 하지 못했다. 엄마는 어떤 딸이었냐는 질문도, 꽃을 선물하는 일조차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후회하는 것은 나와 똑같은 실수를 안겨주려 한 것이 되겠다. 일은 제쳐두고 달려가 엄마의 곁을 지켜주라고,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각자 이어온 유대가 다르겠지만 우리의 할 일은 하나, 당신의 슬픔을 나누고 다독여주는 것이었으니까.


집안 어른의 부재는 죽음이라는 물리적 부재뿐만 아니라 가족을 하나로 모이게 했던 연결고리를 끓어버리는 느낌이다. 어색했던 기류를 참지 못해 달아났던 그 작은방이 때론 그립기도 했다. 분명 그대로 있는데 소실된 기분을 느낀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이라며 명명했던 장소는 매년 서슴없이 방문했던 발길을 붙잡았고 이제는 의무적으로 모일 이유가 사라졌다. 덕담을 나누고 안부를 나누고 또 훈기를 나누었던 몸짓들을, 더 이상은.


요양원 문제로 삼촌과 크게 싸운 뒤 큰집에 발길을 끊었던 엄마는 다시 큰집인 서울로 향했다. 단호했던 엄마를 다시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궁금증 끝에 달린 대답은 같았다.


가족이니까. 우리는 가족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모여드는 것이다.

 

 

 

엄마와 나의 서울



어릴 때는 도시를 벗어나 조용하고 정겨운 시골 정경 아래 한가위를 보내고 싶었다. 서울은 가까운 만큼 멀어지기도 쉬운 곳이었다. '시간 내서 들르면 되는 곳'이라는 이유로 소홀해졌다. 우리 집 식탁 위에 단출하게 올라오는 명절 음식 몇 가지만이 '추석'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엄마와 나는 나란히 누워 추석 특선 영화를 골랐다. 영화는 엄마와 유일하게 통하는 취미 생활로 명절이면 누구보다 진지하게 영화부터 선점했다. 종종 시간이 맞는 날이면 함께 영화관에 갔고 엄마는 별 말 없이 나를 따라와 주었다. 굳이 서울까지 나가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은 나의 고집이다.


현재는 폐관한 구로동에 한도 극장에서 외할머니를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엄마가 스무 살에 영화를 보러 한도 극장에 갔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니 외할머니가 앉아있었던 것이다. 연고도 없는 서울이었지만 나의 엄마의 엄마까지 우리는 둘러앉아 영화 보기를 좋아했다.

 

"어쩜 영화 좋아하는 건 너까지 닮았니."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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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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