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진입장벽을 부순, 적벽 [공연]

잔잔하고도 화려한
글 입력 2022.09.03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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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전시를 앞둔 탓인가, 요즘 머릿속에 온갖 인식되지 않는 이미지, 텍스트들로 가득 차 있다. 내용이나 형태가 뚜렷하면 해결하던가 회피하던가 할 터인데 그저 두루뭉술하게만 가득 차있으니 머릿속이 바글바글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요즘 들어 시각적으로나 의미적으로나 정확하고 깔끔하고 여백이 있는 것들에 눈이 간다.


햄릿, 서편제,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 등. 원작을 토대로 한 탓에 종종 현재의 사회와 맞지 않는 내용이 담겨있기도 하지만 밀도 깊은 해석을 더해 만들어져 그것들 안에서의 결속력은 뛰어나다고 생각한 작품들로 내가 요즘 필요로 하는 텍스트적 간결함과 시각적인 수려함을 모두 담고 있는 작품들이다.


운이 좋게도 여러 방면에서 뜻깊게 다가왔던 뮤지컬 <서편제>를 관람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판소리 뮤지컬 <적벽>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설렘도 잠시, 익숙한 뮤지컬 넘버에 판소리를 가미한 정도의 뮤지컬 <서편제>와는 조금 다르게 '판소리 뮤지컬' 이라고 딱 못 박아 놓은  <적벽>에는 약간의 망설임이 생겼다.


공연예술을 매우 좋아하지만, 내 머릿속에 있는 '판소리는 고전적이고 어렵다'라는 편견을 깨기 힘들었던 탓이다.


좋건 좋지 않던 이번 기회에 내 취향을 더 분명하게 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약간의 고민 끝에 생에 최초로 '판소리 뮤지컬'을 보러 가리라 마음먹었다.




화이트 큐브


 

우선 <적벽>을 보고 기억에 남고 마음에 드는 요소가 한두개가 아니다. 무대, 색, 의상, 소품, 앙상블, 악기, 배우 등 정말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하나하나씩 자세히 말하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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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가장 '현명하다'라고 생각 부분은 바로 '올 화이트'의 무대이다.
 

2층의 구조로 되어있던 올 화이트의 무대는 조조에 맞서는 유비, 관우, 장비의 강인함과 공명의 신비로운 지혜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조조의 비굴함을 더 효과적으로 느껴질 수 있도록 하였다.


흑, 백, 홍 이 세 가지 색만을 이용하여 사람과 감정을 나누고 분위기를 그려내기에 어떻게 봐도, 어디에서 봐도 '그 색'임을 명확하게 보여줘야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극인데, 이 부분을 올 화이트 무대를 사용하여 가장 쉽고도 효과적으로 나타내어 극의 현명함을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면적으로만 봤을 때 앙상블이 들어가기에 비좁아 보이고 답답할 것만 같았던 공간을 화이트로 가득 채움으로써 광활한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고 허전할 것만 같았던 무대 공간을 여백의 미로 채웠다.

 

또한 <적벽>의 올 화이트 무대를 처음 봤을 때, 전시의 가장 기본적이 공간이라 할 수 있는 '화이트 큐브'와 비슷한 생김을 한 공간이라고 느꼈는데 그 의식 덕분인지 극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장면 하나하나가 정지된 하나의 작품으로 기억에 남았다.


극 자체도 너무 좋았지만 무대에서의 공간과 색을 어떻게 활용했는지에 대해서도 (미숙하지만) 혼자 되새겨보게 하는 극으로, 극이 끝난 이후에도 극에 대한 몰입과 여운을 남겨주었다.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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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는 공연장 밖 포토존에서부터 보였기에 극을 보기 전부터 어떤 식으로 부채가 사용될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하였는데, 과연 부채는 <적벽>의 전부였다!

 

 
여닫음의 방식 / 쥐는 위치 / 보여주는 각도
 

 

이 세 가지의 변화로 부채는 적의 목을 겨누는 검이 되기 하고 배를 모는 노가 되기도 하고 적을 겨냥하는 활이 되기도 하며 불러일으킨 바람이 되기도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극에서 부채는 시각적으로 '어떠한 것'임을 나타내주며 극의 화려함을 더해준 것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채를 여닫을 때 나는 소리를 배우 스스로가 조절을 해나가며 부채에 감정을 담아 넣어 극의 분위기를 완화하기도 하고 고조시키기도 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들의 손에 들려져 있는 이 부채로부터 나오는 다양한 표현력은 가히 <적벽>의 트레이드 마크라 단정지을만하다.

  

+ 의상은 화이트와 블랙에 각각 대비되는 색의 굵은 선이 그어진 형태였는데, 이는 붓으로 한 획 한 획 힘차게 그은 듯한 느낌을 주어 장수들의 기백을 표현하기에 최적화된 의상이라고 생각했다. 의상 또한 무예에 가까운 <적벽> 특유의 움직임과 스토리 그리고 전체적인 분위기를 잘 담아내고 있어 어느 것 하나 무대에서 허투루 사용한 것이 없는 극임에 감탄했다.


++ 또한 <적벽>은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진행되는데, 덕분에 항상 남성으로 그려졌던 공명과 장비의 역을 여성 배우가 담당하는 낯선 장면을 연출되기도 해 익숙하기만 했던 기존 캐릭터의 한계를 비교적 쉽게 깨뜨린 느낌이라 공연을 더 개방적이고 능동적으로 볼 수 있었다. 젠더프리 캐스팅이 주는 쾌감이 생각보다 크다!! 다들 그 쾌감을 느껴보시길 적극 추천한다.




밴드


 

특이하게도 <적벽>의 밴드는 무대 깊숙한 중앙에 위치한 통창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약간 모험이라고 생각되는 모습으로 있어서 처음 막이 올랐을 때는 '과연 저 밴드가 극에 정녕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것인가?'하는 의구심을 품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유 있는 위치 선정이었음을 깨달았다.


판소리가 주가 되는 극이기 때문에 연주자와 소리를 하는 자의 호흡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극인 것을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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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창으로 된 공간에 들어가 무대 중앙에서 연주자들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쉼 없이 극을 같이 이끌어 가는데, 그 모습은 연주자와 소리꾼의 경계를 허물고 같은 위치에서 소리를 능동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극 마지막 즈음에 밴드 중 한 분이 북을 들고 무대로 직접 걸어 나와 소리꾼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함께 소리를 만드는 데, 무거움을 덜어내려 극 중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으려 했던 판소리의 정수를 본 것 같았다. 그때의 숨 막히는 고요 속에서의 호흡과 울림이 아직까지 나에게 닿아있듯 하다.




한 번의 도원결의



'판소리'가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니기에 재미있고 쉬운 내용을 담고 있어도 들어서기에 망설임이 있다는 것에 공감이 된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 말이다.


하지만 2017년 초연을 시작으로 2022년까지 계속적으로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이들에게 크고 작은 울림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직 주류라고는 확정 지어 말하긴 어려울 수 있는 장르의 공연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새로 그리고 다시 찾는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히 궁금함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가벼운 궁금증으로 찾아가 보는 것조차 헛되지 않은 발걸음이 될 만한 극이다, <적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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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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