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동궐도, 기록과 역사 [미술/전시]

기록과 기록의 부재로 보는 동궐도
글 입력 2022.07.12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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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그림으로, 경복궁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한 궁궐들을 그렸다고 하여 동궐도라 이름 붙여졌다.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각 한 점씩 전하고 있으며, 고려대학교 박물관의 소장본은 16권 화첩의 형태이고,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은 병풍 형식이다. 두 점 모두 동일한 화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궁궐의 건축적 연구 등 고증적 자료로써도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은 동궐도는 1995년 보물 제596호에서 국보 제249-1호, 제249-2호로 지정 승격되었다. 국보로 지정된 유물 중에서도 특히 동궐도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림의 내용이 궁궐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궁궐의 지도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점에 있다.



[크기변환]동궐도 고려대학교.jpg

 〈동궐도〉, 16첩, 비단에 채색, 전체 273.0×576.0㎝, 각첩 45.7×36.3㎝, 국보 제249-1호, 고려대학교박물관.

 

 

세로 약 270cm, 가로 약 560cm 이상의 크기, 가늘고 반듯한 필선과 선명한 채색은 장대하면서도 정교하고 화려한 면모를 자랑한다. 넓은 공간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건물들은 위에서 비껴 내려다보이는 평행 사선 부감법을 적용해 효과적으로 그려 넣었고, 궁궐을 둘러싸고 있는 산수는 남종화법을 따랐다.

 

부드럽게 묘사한 낮은 구릉과 적절히 섞어 배열한 소나무, 활엽수는 명도가 낮은 채색과 어우러지며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차분하게 이끈다. 수많은 건축물들은 직선의 담장으로 정확하게 구분시킨 뒤 각 건물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 또한 장독대, 우물, 해 시계, 돌조각 등의 작은 물건들까지 세밀하고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은 놀랍지 않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림이 제작된 시기가 1830년경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동궐도는 비행기가 없던 시대에 그린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실제로 동궐도에는 창덕궁의 건물 배치뿐만 아니라 건물 사이의 거리까지 완벽하게 재현되어 있다. 일제 강점기 이후 손상된 창덕궁과 창경궁의 복원에 결정적인 역할이 되어준 것도 바로 동궐도이다.

 

 

 

기록의 부재


 

하지만 동궐도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누가 그렸는지, 왜 그렸는지, 또 누가 그리게 했는지 단 한 줄의 기록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건축물이 새로 건립되거나 화재로 소실되었던 기록을 근거로 제작 시기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1824년 화재로 허물어진 경복전은 그려져 있지 않고, 1928년 지어진 연경당은 그려져있다. 또, 1830년 화재로 소실된 환경전, 경춘전, 양화당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동궐도는 1828년에서 1830년 사이에 그려진 그림으로 추정된다.

 

그림의 장대한 규모와 치밀한 묘사로 미루어 보아, 동궐도는 출중한 실력을 가진 화가들이 그렸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역시 그림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당대 최고의 화원들이 모여있던 왕실의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시 왕실의 도화서 화원들을 집합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나라를 이끌고 있던 효명세자뿐이었다.

 

 

 

효명세자와 동궐도


 

궁궐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가까운 나라인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도 궁궐을 이렇게 자세하게 그린 회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다. 궁궐의 설계도라고 해도 믿을만한 이런 그림이 노출되었다면 왕의 목숨이 위협당했을지도 모른다. 궁궐을 이렇게 자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두었던 목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당시 왕은 정조의 아들인 순조였지만 실제 나라를 다스리던 인물은 그의 아들이었던 효명세자였다. 효명세자는 당시 세도정치에 잠식된 조선을 구할 유일한 희망으로 여겨지며 대리청정을 명 받았다. 효명세자의 개혁 의지는 대단히 강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때문에 동궐도가 당시 복잡한 정국을 전환시키기 위한 효명세자의 왕권 강화책의 일부라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제작 목적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시기 외에도 동궐도를 주문한 자가 효명세자라는 단서는 그림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동궐도에 그려진 규장각을 살펴보면 규장각이 실제 크기보다 여덟 배 이상 크게 그려져 있다. 규장각은 정조가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설치한 기구로, 수만 권의 책을 갖춘 도서관이기도 했지만 도서관의 역할을 넘어 개혁 정치의 중심이 되었던 곳이다.

 

효명세자는 어려서부터 정조를 본보기 삼아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고자 했던 인물로 전해진다. 따라서 규장각이 실제보다 크게 그려진 것은 효명세자가 조부였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규장각을 중요시했으며, 개혁 의지가 강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동궐도의 섬세한 필치와 반듯하고 정확히 묘사된 담장, 건물들은 마치 효명세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보여주는 듯하다.

 

 

[크기변환]동궐도 동아대학교.jpg

〈동궐도〉 16첩 병풍, 전체 273.5×561cm, 국보 제 249-2호, 동아대학교박물관.


 

그 자체로 기록이지만, 어떠한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동궐도. 그린 사람도, 주문한 사람도, 그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더 묘하고 장대하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효명세자의 개혁 의지는 짧게 끝났을지 모르나, 동궐도는 후대의 우리에게 큰 역사적 산물로, 또 당시의 회화성과 가치를 증명하는 자료로 남아있다.

 

 

[김윤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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