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삶으로 완성한 예술 - 윤형근에 대하여 [미술/전시]

“예술은 성실한 인간의 기록일 뿐”
글 입력 2022.07.09 07:5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윤형근의 작품을 처음 만난 건 지난해 겨울 초입 즈음이다. 삼청동 PKM 갤러리에서 진행했던 '윤형근의 기록展'에 다녀왔던 것이다. 당시의 나는 화백 윤형근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전시는 생전 윤형근이 메모, 화첩, 서신 등에 남긴 글들을 엮은 단행본 출간을 기념하며 열린 것으로 전시장 곳곳에서 그의 그림과 함께 소박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고요하면서도 부러지지 않는 고목의 기개가 엿보이는 그의 그림처럼 글 역시 담담하지만 올곧은 성품이 그대로 드러났다.

 

크지 않은 규모의 전시였지만 몇 점의 그림과 글만으로 나는 윤형근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전시장을 빠져나온 뒤 한동안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KakaoTalk_20220706_231109409.jpg

 

 

 

검게 토한 시대적 울분


 

당대 우리나라 화가들이 으레 그랬듯, 윤형근 역시 근현대 한국사의 격동을 온몸으로 견뎌야 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은 그의 그림에 큰 전환점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유신 체제의 삼엄함이 살아있던 1973년, 윤형근은 미술교사로 재직하던 숙명여고의 부정입학 비리를 고발한 것이 문제가 되어 형무소에 수감되는 고초를 겪었다. 이에 대한 분노와 독기 서린 마음을 그는 캔버스 위에 어두운 먹빛으로 덧칠해 토해내기 시작했다.

 

일명 '다-청 회화'로 불리는 이 작품들은 하늘을 뜻하는 청색(Ultra matine)과 흙 빛깔의 암갈색(Umber)을 사용해 그의 굽히지 않는 꼿꼿한 내면을 드러내고 있다. 마포나 면포 위에 자연스럽게 번지듯 그려진 그의 그림은 수묵화 혹은 서예를 떠올리게 한다.

 

수많은 상념과 감정을 다스리며 붓질 한 획에 이를 담아내듯 윤형근의 절제된 먹색 기둥에는 그의 울분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KakaoTalk_20220706_231109409_02.jpg

 

 

 

예술은 곧 삶의 흔적


 

한국 단색화의 거목으로 잘 알려진 윤형근이지만 그는 담백한 그림만큼 소탈하고 선비 같은 면모를 지닌 사람이었다고 한다. 고고한 성품의 그는 부러질지언정 휘어지는 법이 없었다.

 

1947년 국립 서울대학교 설립안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제적을 당하고, 1950년에는 보도연맹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1956년에는 전쟁 중 피란 가지 않고 서울에서 부역했다는 이유로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 외에도 위에 언급한 숙명여고 부정입학 비리 사건 등 파란만장한 생애를 겪는 동안 그는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예술에 관해서도 윤형근은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작품 활동 내내 관철했다. 작품과 작가 개인의 사생활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지 않던 그는 “인간적인 척도가 곧 예술의 척도”라며 “예술은 그 무슨 의식이 아니라 성실한 인간의 기록일 뿐”이라 말했다.

 

즉, 윤형근의 예술 세계는 그의 삶 자체가 투영되어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KakaoTalk_20220706_231109409_01.jpg


 

작년의 나는 첫 직장에서 실패를 겪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에 괴로웠고 확고했던 나의 신념과 상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한동안 주저앉아 있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만난 윤형근 화백과 그의 작품은 내게 위로로 다가왔다. 소탈하지만 강직한 그의 내면을 그대로 반영한 먹색 기둥이 고요한 위안을 선물한 것이다. '거목'이라는 화려한 이름에도 “내 그림은 푹 찍어서 푹 그어버린 것”이라 말하는 그의 태도는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나를 비롯해 자신의 중심을 지키기 어려운 많은 이들에게 윤형근의 정갈한 삶과 그 흔적으로 남은 작품들은 하나의 곧은 지침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다.

 

 

[이혜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8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