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 [미술]

소개하고 싶은 작가의 작품
글 입력 2022.06.24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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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인화하고 스캔은 다른 거야. 그니깐..... 종이 사진을 뽑으려는 거지? 그러면 한 30분은 걸려요.”


‘그럼 기다릴게요’라는 대답을 내뱉음과 동시에 머쓱함이 몰려왔다. 뉴욕에서 돌아와 한국에서의 첫 외출은 필름 카메라의 사진을 받아보는 일이었다. 살던 동네에서 버스를 타야 나오는, 유일하게 필름을 인쇄할 수 있는 사진관. 그곳에서 첫 카메라의 첫 사진을 뽑게 되었다. 현상과 스캔, 인화의 차이를 이제야 알게 되면서 말이다.


곳곳에서 녹색들이 춤을 추는 여름에, 나는 하릴없이 콜드브루 한잔과 사강의 소설을 읽으며 공백을 메꾸었다. 다시 30분이 지나고 도착한 사진관에는 이미 다른 손님들이 있었는데, 남녀노소 상관없이 누구나 사진을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은 너무 해맑았다. 그 좁디좁은 사진관 안에 있는, 작은 텔레비전 안에 흘러나오는 뉴스가, 영화 속 소품같이 파랗게 돌아가는 아주 오래된 선풍기가, 사진을 뽑느라 덜컹 소리를 내는 인화기의 소리가 듬뿍 시간의 아름다움을 먹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약속된 시간이 훌쩍 지나도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말에, 기다리는 데에는 썩 재주가 없던 내가 몇 시간이고 기다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 순서가 되었을 때는 친구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담긴 사진, 풍경이 잘 나온 컷들을 아주 신중히 고르고, 또 고르며 종이 사진으로 받기를 기다렸다. 테가 없는 안경을 끼고 예민하게 작업을 하시는 사장님은 투박한 말투였지만 다정하셨고, 이런 필름은 뽑을 수 없겠냐며 거듭 묻는 50대 손님의 말투에도 순수함이 묻어나왔다. 사진관을 나서며 감사하다는 내 소박한 인사에, 사진을 두고 열정적으로 토의하던 두 어른은 잠시 대화를 멈추고 ‘잉-조심히 가요~’ 라는, 무심하지만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셨다.

 

어른들의 표정, 말투에서 이전에는 깊이 몰랐던 다정함이 마구 보여서, 나는 따뜻하고 묵묵한 사랑들을 다시금 꺼내 기억해본다.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지하철에서 서서 가끔 졸기도 했었는데, 아직 정거장이 남은 어떤 어르신들은 내 팔을 굳게 잡고 당신 자리에 앉게 해주셨다. 얼굴도 모르는 학생이 뭐가 예쁘다고, 기어코 앉으라며 배려해주실까. 지나고 나니 더 크게 느껴지는 배려들은 나도 모르는 새 깊숙이 자리 잡아, 부끄러우리만큼 나를 선하게 만들어준다.

 

 

131.jpg

양정욱,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FATIGUE IS ALWAYS WITH THE DREAM)>

2013년, 나무, 모터, 실, PVC, 2500x3300x2500(h)(mm)


 

삶의 초콜릿 같은 이런 사소한 배려와 사랑들을, 작품으로 전달한 작가가 있다. 양정욱 작가님의 작품,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 이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나너의 기억》展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보자마자 동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들 수 있다. 사진관의 오래된 소음처럼 전혀 시끄럽지 않게. 삐그덕거리는 나무막대들과 유리병들이 경쾌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이 세계에는 존재하지도 않을 것 같은 골동품 가게 안으로 이동시킨다. 작품 내부 중심에서부터 작은 빛이 뿜어져 나와 그림자를 드리우고, 점점 더 커져 나가 전시장 안 신비로운 분위기를 형성한다.


작가는 가상의 이야기를 덧붙여 이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래는 그 일부이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졸고 있었다.

학생이 되고, 회사원이 되고, 가장이 되어서도

그는 졸고 있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날 때 꿈을 꾸었다.

일등이 되는 꿈, 승진이 되는 꿈

넓은 집에서 가족과 웃는 꿈같은 것을 말이다.

그는 이제 졸면서도 같은 꿈을 꾼다.

아마도 그 꿈은 아침에 꾸었던 것과

같은 것이 아닐까?

그는 고개를 아슬아슬하게 끄덕거린다.

어느 순간 고개를 떨구고 다시 꿈을 꾼다.

그는 언젠가부터 꿈을 꾸고 있었다.

 

-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 작가 설명 중

 

 

이야기의 꿈은 실제 잠을 자다 드는 꿈. 현실에서 이루고 싶은 꿈. 두 가지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어떤 꿈을 꾸는가에 상관없이 글 속 어른은 참 오랫동안 피곤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작품의 배경은 밴드 잔나비의 <굿바이 환상의 나라>라는 곡을 통해서도 선명히 느낄 수 있다. 마치 놀이공원 폐장 시간을 알리는 불꽃놀이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담아내고 있는 이 곡은 이야기 속 어른의 울렁이는 마음을 깊이 전달한다.

 

 


 

 

이러한 배경과 함께 겹쳐 보면, 이 작품은 일상의 고단함을 달래주고 평온하게 잠들도록 도와주는 장치인 듯하다. 상상을 더 해보자면 현실과 꿈나라의 경계에 있는 정거장 같기도 하고, 또 나아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같기도 하다. 작았던 빛이 큰 전시 공간을 비추듯이, 작은 배려와 묵묵한 다정함들이 모여 따뜻한 온기로 가득 채우고 있기에.


어쩌면 지금을 냉소적인 사회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작가는 냉소적인 사회상을 반영하는 더 차가운 작품 대신, 사회 속 다정하며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네의 삶을 아주 따뜻하게 담아낸다. 심지어 작품을 보지 않고 작품의 제목만 곱씹기만 해도 위로를 전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 “피곤은 언제나 꿈과 함께” - 오늘 하루의 모든 피곤함의 끝에 평온한 꿈이 있기를. 노력했던 피곤한 날들이 모여 곧 당신의 달콤한 꿈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


우리도 오늘만큼은 스스럼없이, 조금도 아까워하는 마음 없이 다정함과 웃음을 선보여보는 건 어떨까. 양정욱 작가의 작품처럼 맑은 소리를 내며. 행복으로 물든 잔잔한 빛을 내며. 더 다정함을 나누자.


P.S. 작품의 여운을 더해줄 아래 곡을 들어보세요.

 

 "Believe you're be alright

– 잔나비, <Bluebird, Spread your wings!> 가사 중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양정욱 - 우리 이웃과 일상의 관찰자 (헬로! 아티스트, 네이버문화재단)

 

 

 

심은혜.jpg

 

 

[심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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