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한 세계 속에서 우리를 찾아가는 일

글 입력 2022.06.2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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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시간이 흐를수록 편견과의 싸움은 선명해진다. 나와 다른 당신이 바라보는 대성당이 궁금해지지 않은지도 꽤 오래되었다.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은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기 일쑤이고, 당장 앞에 마주 앉은 사람과는 가벼운 이야깃거리만이 오갈 뿐이다. 세상과 어떠한 인간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보다 나를 더 필요로 하는 나만이 남는다. 최근의 만남 중에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있었던가? 곰곰이 생각해보지만 이내 그만둔다. 언젠가는 이해되지 않았던 이해타산 속의 어른들이 이해되고, 그 안에 굴려지는 삶이 편하게 느껴진 건 언제부터였을까. 내가 마주하는 대성당은 과연 어떤 모습인가. 그 사이에서 잃은 것들은 무엇이며, 또 나의 대성당은 얼마나 변화했는지 나 자신도 가늠할 수 없다.

 

*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처음 읽었을 때 메모장에 적어두었던 기록이다. 열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을 열 번 읽는 것이 더 값진 일이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었던 문장이 떠오른다. 내가 열 번을 읽어낸 책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열 번을 읽어낼 책이 될지도 모를 《대성당》을 읽으며 나와 사람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본다. 물질만능주의. 자본주의. 성과주의. 개인주의. 이미 그 안에 종속된, 앞으로도 종속되고 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생각한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 시대를 지나오는 동안 그 아무리 혼자인 게 편한 사람일지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소통과 이해 없이 살아내는 삶의 지루함을 깨달았을 것이다. 간간이 마주하던 친구들과의 모임, 새로운 만남이 외부적 요인으로 차단되는 상황을 마주하고 나니, 이전의 내가 아무렇지 않게 자처하던 단절의 세계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보게 되었다.

 

그 세계 안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소통과 이해의 단절이 가져오는 빈틈은 매우 크지만 매일 마주하는 얼굴들을 통해서 그 빈틈을 실감하기란 쉽지 않다. 물론 상대방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안정감도 존재한다. 때로는 그런 빈틈이 감사하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물리적으로 또 타의적으로 사람들과 멀어지게 되었던 시간 동안은 그 빈틈이 조금은 무서웠다. 희미하고도 선명한 인간관계들을 카카오톡 메신저의 친구 목록에서 찾으며, 이중 내가 진정으로 이해하고,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지 머리를 굴리게 되는 것이다.

 

 

[크기변환]대성당.jpg

 

 
“언젠가 나는 맹인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자기가 내뿜는 연기를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이유에서였다. 겨우 그 정도, 맹인에 대해서는 겨우 그정도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맹인은 꽁초가 될 때까지 담배를 피우고는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대성당》 속 ‘나’에게서 찾은 나의 모습은 선명하고 부끄럽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결국엔 인정하게 된다. 편견이라는 것은 무섭고, 잔인하지만 결국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과 또 많은 상황, 모두 다른 모습과 양상을 띠고 있지만 단순히 다르다고 말할 수 없고,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인간과 사회를.

 

소통의 단절, 이해의 단절에 대한 문제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지만 우리는 어디서든지 연결될 수 있다. 휴대폰 화면을 켜는 것만으로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연결되는 것처럼. 이해에 대한 깊이가 얕아지더라도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는 것처럼. 《대성당》은 ‘우리’라는 틀을 벗어나 살 수 없는 지극히 다른 각자들이 모인 이 아이러니한 사회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대성당》 속 ‘나’는 TV를 틀어놓은 채 로버트와 앉아있다. 로버트는 맹인이다. ‘나’는 TV에서 방영되는 대성당의 모습을 맹인인 로버트에게 설명한다. 꼭 그래야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참을 대성당의 모습에 대해 설명해보지만, 눈으로 보는 것과 말로 설명하는 것의 한계를 느낀 ‘나’는 자신에게 설명하는 재주가 없는 모양이라며 양해해달라 말한다. 로버트는 그때 펜과 종이를 가져올 것을 요구한다. 로버트와 ‘나’는 함께 펜을 잡고는 대성당을 그려 나간다. ‘나’는 눈을 감은 채 로버트와 맞잡은 손을 멈추지 않는다. 계속해서 대성당을 그린다. “보고 있나?”, 로버트는 묻는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의 혐오와 편견을 마주한다. SNS는 어쩌면 가장 이로운 발달이지만, 무서울 정도로 우리를 갈라놓기도 한다. 예를 들면 코로나바이러스가 확산되던 시점에 인종과 대륙을 넘어선 혐오가 바이러스보다도 무섭게 창궐했던 상황을 들 수 있겠다. 국내에서도 특정 지역을 향한 혐오 감정이 불거지지 않았던가. 비단 바이러스뿐만이 아니라 성별과 인종, 외모와 성적 지향, 종교와 정치적 성향 등 다양한 이유로 남발되는 오해와 편견, 계속되는 이해의 단절은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고되고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오해와 편견을 가진 사람도, 편견을 퍼뜨리는 사람도, 맞서 싸우고 이를 풀어내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우리’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는 《대성당》 속의 ‘나’가 로버트와의 만남을 계기로 세상을 대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생겼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이기적인 개인이며, 나 역시 결국 눈에 보이는 세계를 사는 사람이라는, 조금은 비관적인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또한 나의 생각일 뿐, 그들이 변했는지 혹은 변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더욱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었다. 혹시 나도 이 책을 열 번쯤 읽었을 때는 안주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행동하는 사람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않은가. 세상을 보다 따듯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직도 《대성당》을 처음 읽었을 때 뒤통수를 맞은 듯한 기분을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작가가 이야기 속에서 진짜 눈먼 이가 누구였는지 말해보라고 닦달하는 것만 같았다. 단 한 권의 책을 읽었다고 해서 삶의 변화가 생기는 그런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분명 내 세계는 조금 넓어졌다. 어쩌면 변했을 ‘나’와 나를 기대하며, 너와 내가, 우리가 사는 아이러니한 세상 속으로 돌아간다.

 

 

[김윤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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