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해받지 못하는 중독들 [문화 전반]

김지효 외, 인문잡지 《한편》 7호: 중독, 민음사, 2022.1.
글 입력 2022.06.02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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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그토록 뿌옇고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나의 바쁜 기분과 피로의 원인에 조금이나마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목표란, 마땅히 어떠한 보상에 대한 기대로 이어지기 마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나는 즉각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무언가를 향해 달리는 것에는 쉽게 지치는 성격이었다. 감정에 휩쓸려 냅다 확 다 그만둬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또 그럴 정도로 간이 크지는 않아서 그나마 피신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 당장 내 앞에 있는 화면 너머의 세계로 섣불리 주의를 돌리곤 했다.

 

그렇게 문화예술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SNS의 업데이트를 수시로 확인하며 얻는 단편적인 지식과 정보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아졌다. 일정 시간이 되면 웹툰 앱과 배달 앱, OTT 서비스들을 강박적으로 틀었고, 심지어는 그렇게나 거북해하던 양산형 광고를 보고도 게임을 다운받아 자투리 시간에 무의미한 실행을 반복하는 나날들을 이어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재밌다거나 의미가 있어서 하는 행동들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저 간단한 인터랙션만으로 보상 심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에 혹했을 뿐이었다.

 

 

 

시간의 덫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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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시간 부스러기(Time Confetti)’라는 용어를 새로 접하게 되었다. 비생산적인 멀티태스킹을 하면서 잃어버리는 몇 초와 몇 분이 시간을 잘게 쪼개고 예측 불가능하게 만들어 최종적인 시간의 질을 떨어트린다는 개념이다. 눈앞의 일에서 다른 어떤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활동으로 주의를 돌렸다가 현재로 돌아오는 데에는 ‘인지적 회복’을 위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시간이 부스러기로 변하면 결과적으로 사람들은 실제로 주어진 것보다 시간 빈곤을 실제보다 크게 느낀다고 한다.

 

나에게는 달성에 대한 의지로부터 잠시나마 나를 해방시키고 도파민을 만끽할 수 있게 해줄 어떠한 자극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본연의 목표와 책임감과는 자연스레 멀어졌고, 반발성으로 눈을 돌렸던 시간 부스러기들에 하루를 저당 잡히는 습관을 지니게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장황하게 늘어놓은 변명들이야말로, 내가 중독(中毒) 상태라는 강력한 반증일지도 모른다.

 

 

 

중독을 이해하려는 시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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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책은 바로 민음사의 인문잡지 《한편》 7호: ‘중독’이다. 《한편》은 인문학적 주제를 다루되 논문보다는 내용이 가벼워서 읽기에 꽤나 편한 책이라, 창간호인 ‘세대’, 2호 ‘인플루언서’에 이어 내키는 대로 구매해 즐겨 읽고 있는 시리즈이다. 하지만 나는 마치 나의 중독을 부정하기라도 하듯, 이 책만은 책장에 묵혀둔 채로 도망치다가 막다른 기분에 마주하고 나서야 겨우 펼쳐 들기 시작했다.

 

중독이란 대체로 ‘의사와 무관하게 어떤 행동이나 생각을 반복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 현상’이라는 뜻으로 통한다. 능력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 말은 얼핏 무능의 산실로 보이지만, 이분법이 해체되어 가고 있는 작금의 시점에서 어떤 중독은 열정이라 칭송받고, 어떤 중독은 해로운 것으로 치부된다. 그렇게 중독은 점점 진단할 수 없는 쪽으로 치닫고 있었다.

 

중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을까? 책의 소개말에는 “스마트폰 세상에서, 스마트폰 중독을 어쩌라는 말인가?”라는 문장이 있었다. 자산소득이 노동소득을 아득히 초월하는 현실, 그리고 대량으로 쏟아지는 콘텐츠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쩌면 중독에 빠질 수밖에 없는 극한의 산만함에 내몰려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인문학을 통한 자가진단


 

인문학(人文學)이라는 한자를 그대로 풀이해보면, ‘인간(人)’과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文)’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책 ‘중독’을 이루는 10편의 한 편들에는 각각 의학, 사회학, 언어학 등을 넘나들며 저마다 중독을,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려는 시도들이 담겨 있다. 어떤 편에서는 중독의 착취적인 특성을, 다른 편에서는 중독자의 자율성에 대한 딜레마를, 그리고 또 다른 편에서는 중독이라는 명명이 때로는 잘 모르는 것을 비난하는 방식에 불과하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글은 결국 읽는 사람이 읽고 싶은 대로 읽게 된다고 하던가. 사회의 거시적인 문제에 대해 저항심을 가지고 있는 한 소시민이자, 스스로를 치료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한 환자로서 나는 내 중독을 인지하고 여러 차원에서 바라보기 위해, 그리고 그런 나 자신을 미워하지 않되 나아가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몇 부분을 발췌하여 엮고 소감을 적어내려 보기로 했다.

 

먼저, 다수의 한편들에서 ‘중독에 빠져 살 수밖에 없는 사회’를 지적하고 있는 만큼 중독을 둘러싼 문제들을 갈무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중독을 유발하는 요소들은 생각보다 치밀하게 설계되어 있다. 김관욱의 「“담배, 참 맛있죠.”」에는 “중독은 의학으로 정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의 핵심은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실제로, 우리가 현재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설탕과 커피, 담배 등에는 맑은 정신과 각성 상태를 보장하는 약물로써 ‘노동 강화제’로 활용되어 온 유래가 있다.

 

또한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기업 슬로워크의 CEO 조성도는 「CEO의 ‘착한’ 경쟁 이야기」에서 사용자의 이탈을 방지하기 위한 디자인을 지적한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과 디자인의 강력한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앞서 언급한 시간 부스러기 개념과도 연계해 볼 수 있는데, 대다수의 기업들은 특정 제품을 습관적으로 이용하는 사용자인 ‘활성 사용자’의 지표를 관리하며 사용자의 자기 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을 꿰고 있다. 꾸준히 사용자를 잡아두기 위해, 그들은 습관과 중독 사이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회색 지대를 공략하며 그로스해킹에 기반을 둔 성장전략을 따르고 있었다.

 

이에 중독을 바라보는 여러 관점들이 존재한다. 유기훈은 「강제 치료를 둘러싼 문제」에서 중독을 어떻게 바라볼지에 대한 논의가 중독자의 삶의 궤적을 실제적으로 좌우하는 실천적 문제이면서, 당사자와 사회가 어떻게 통제권을 나누어 가질지에 대한 이론적·철학적 문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중독자의 곁에 있기」에서 임민경은 중독을 보는 관점에 두 가지 극단이 있다는 사회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의 의견을 다룬다. 첫 번째 극단은 사람들이 무엇에 중독되기로 완전히 자유롭게 선택했다고 보는 관점이고, 두 번째 관점은 화학물질과 생물학적 작용 앞에서 인간의 의지는 무력하다고 보는 관점이다. 

 

흔히 중독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은 후자의 관점에서 자신의 인생이 중독 물질로 인해 ‘희생’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관점의 장점은, 병은 미워하면서 사람은 탓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점을 선택할 때 오히려 중독자의 회복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그러니 중독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바우마이스터는 극단적 두 관점의 중간 지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중독 너머의 삶

 

중독을 유발하는 요소들이 사회의 전반을 이루고 복잡하게 얽혀있는 만큼 중독을 바라보는 관점 또한 점점 잘게 쪼개어져 가는 한편, 중독의 이러한 개념적 확장이 중독과 일상을 무분별하게 뒤섞어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일상이 중독과 뒤섞이고도 남은 내게는 이러한 우려가 오히려 독이 되었다. 여태껏 내 안에는 중독되지 않은 일상으로 나아갈 의지에 대한 맹신이 크게 자리잡아 있었고, 하마터면 나는 나의 중독을 부정하는 일에 한껏 몰두한 나머지 바깥을 볼 힘을 전부 소진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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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자 마이클 잭슨은 스스로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사건을 마주친 개인이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에 대한 경험의 의미를 변화시키고 통제하는 수단을 가리켜 세속적 의례라 부른 바 있다. 그리고 나는 마침, 오랫동안 분명히 느껴왔던 내 안에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다는 감각을 정녕 합리화해야 하는 것일지 고민하고 있었다.

 

「“담배, 참 맛있죠.”」에서 김관욱은 “만일 지금 홀로 어떠한 물질과 비물질에 강박적으로 빠져 있다면, 그것이 스스로를 소중하게 대하는 의례적 행위인지 혹은 심신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중독인지를 살펴봤으면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무리 소중한 세속적 의례라 할지라도, 그것이 자신을 주위로부터 고립시킨다면 오히려 단절된 삶의 경고등이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한다고 권한다.

 

여기에 “하나의 관점만 선택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덧대어 본다. 이 문장과 함께 임민경은 「중독자의 곁에 있기」에서 욕망이 곧 행동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최근 이론들이 중독 물질에 대한 강렬한 유혹은 스스로 조절할 수 없지만, 중독 치료의 근본은 그런 욕망 자체가 아니라 행동을 조절하는 데 있다는 점에 주목하며, 지속적 습관 형성과 대처 방법 형성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반면 「섹스 중계자들의 우화」에서 허성원은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한 결국 삶은 하나의 중독에서 다른 중독으로 계속 이행해 가는 과정이며, 중독이란 그저 삶의 또 다른 양상을 나타내는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연구했던 중계자들 중 일부는 어떻게 작동되는지도 모르는 욕망의 순환로에 자신의 시간, 돈, 감정 등을 목적도 없이 바쳐왔다가, 어느 날 찾아온 우연한 사태로 인해 자신이 반복하던 행위에서 불현듯 벗어났다. 그들이 중독되었던 행위에서 빠져나오게 된 계기는 거창하거나 극적이지도 않았고, 과거 행동에 대한 갑작스러운 반성과 깨달음 따위로 축약될 수도 없었다. 그는 반복이 주는 안온함과 지루함, 충동에 대한 해방감과 구속감이라는 이면적 감각들로부터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사유하기 이전에 자기비판에 임할 수 있는 '나'를 구성할 것을 제안한다.

 

*

 

영국의 작가 요한 하리는 중독의 반대를 ‘깨어 있는 맑은 정신 상태’가 아닌, ‘연결’이라고 했다. 중독 상황의 변화가 반드시 삶을 나아지게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책을 다 읽고 남은 “무엇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할까?라는 물음에, 나는 우선 ‘지금까지와는 다른’이라는 말을 빼 보려 한다.

 

중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리고 앞면이 뒷면과 다름을 나누는 논쟁은 우리에게 동전을 던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중독을 가르는 흑과 백의 논리 속에서, 회색으로 중독이 없는 세계를 그려본다. 

 

여전히 나는 중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함부로 단언할 수 없지만, 중독을 바라보는 관점들이 다양해질수록 중독의 반의어 또한 무수히 많아질 것이다. 중독을 선택할 수는 없어도, 중독을 대치할 수 있는 나만의 반의어 정도는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에, 조금이라도 나의 동전을 움직이고자 하는 발버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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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김지효 외, 인문잡지 《한편》 7호: 중독, 민음사, 2022.1.

애슐리 윌런스, 《시간을 찾아드립니다》, 안진이 역, 세계사, 2022.

 

 

 

[민정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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