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대라는 고독으로부터 - 해피 투게더(춘광사설) [영화]

사랑하는 자의 고독에 대하여
글 입력 2022.05.2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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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프라인 영화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화에 관한 이야기와 그렇지 않은 이야기들이 마구 쏟아졌다. 글 쓰는 이들과의 모임은 여러모로 즐겁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NF라는 성격 특질을 공유하는 이들이 거기 대부분인 덕일까. 주제와 소재를 분명히 하고서, 유사한 결의 사람들이 모여 자아내는 분위기가 주는 아늑함이 있다. 여기서라면 왠지 나의 유별난 생각들이 풀려나도 족하리라는, 그 공간에 풍기는 믿음 같은 것들이 있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도중, 문득 춘광사설이 다시 보고 싶어진다. 쏟아지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서 분명 즐거웠지만, 영화의 이과수 폭포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 떨어지는 중이었나 아마, 서둘러 서재로 돌아와 영화를 다시 틀어야겠다는 생각에 빠진다. 이야기가 쏟아지는 중이었다. 나는 머릿속에 염두에 둔 이야기들을 아무런 정리도 없이 다 토해낸 다음, 아 이 이야기는 조금 별로였나 하는 생각을 잠깐 하다가는, 텅 비어버린 마음을 마주한다.


MBTI란 믿을 게 못 된다는 누군가의 귀띔을 기억하지만, 사람들 곁에서 비축한 에너지와 이야기를 다 쏟아내 버린 다음, 허덕이는 마음으로 귀가하는 나를 자각하고 있자니, 다시금 그에 대한 믿음이 채워지곤 했다. 허덕이는 마음으로, 약간 비어버린 감각을 안고, 혼자를 필요로 하는 내 안으로 영화의 한 장면이 흔들리며 피어난다. 그것은 너무도 고독해서, 나는 생각만으로 잠시 아늑해지다. 바삐 너를 찾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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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를 소재로 하는 영화이다. 그들의 사랑을 이해치 못하는 나로서는 맨 처음 두려움부터 들었지만, 다시 찾은 지금, 왜 이다지도 그들이 아름답게 보이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너무나 애처로왔고, 미치도록 고독했다. 둘은 서로를 너무나 사랑해서 경계와 그늘 안에서 고독했다. 모국으로부터 도피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찾은 그들에게, 서로는 어떤 존재였을까. 조금 더 애틋했을지도.


언어도 통하지 않고 모아놓은 돈도 없으며, 변변찮은 직업도 없는, 그들에게 서로의 존재는 분명 최후의 위안 비슷한 것을 자아내고 있었을듯싶다. 취후의 위안과 그늘과 고독이 상존하는 모순, 그 외줄 같이 위태롭고도 간절한 관계선 위에서, 두 남자는 흔들리고 매달리고 불안해하고 미련하는 모든 미묘함들을 눈 안에 담았다. 이런 그림 앞에서는 감탄을 자아낼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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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이과수 폭포는 무엇이었을까. 언젠가 보영이 사 들고 온 이과수 폭포 모양의 싸구려 전등, 둘 다 그것을 퍽 아꼈더랬다. 그것이 둘의 관계에 대한 모종의 상징이었을 터인데, 불온하고 불안한 사랑, 자기 자신마저 잃게 하는 사랑을 나는 몰라, 다만 짐작해볼 따름이다. 개인적으로는, 어떠한 관계건 바라볼 먼 목표가 하나쯤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사실 그것은 관계에 국한해서 하는 생각이 아니라, 관계 이전, 각 개인에게 부여하곤 하는 일종의 믿음이다.


어떠한 종류의 것이건 사람의 것들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하기에. 영원한 사랑, 변치 않는 것들과 같은 것들이 이상개념 理想槪念이 되는 바로 그 원리가 내게 상기시킨 두려움, 그리고 그 앞에 내놓아본 나의 변변찮은 대답이 이것이다. 그것, 먼 목표는 꿈이라고도 일컬어지고, 낭만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고, 등대의 비유가 되기도, 삶의 이유라는 거창함이 되어주기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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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수 폭포는 불안한 두 사랑이 내걸어본 미약한 신기루로 읽힌다. 거기 가닿기만 하면 끝이 나는 것, 거기 어떠한 환상을 담보로 잡아 지금을 위안한들 곧 실체가 드러나 버리는 것, 미적지근한 데드-엔드. 폭포에 도착하였다고 해도, 실제로는 도착하지도 못했지만, 보영은 싫증을 냈을 것이다. 보영은 충동적으로, 마치 언제든지 다시 너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인 양, 아휘와 헤어졌다.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는 바로 그 길 위에서.

 

이과수 폭포는 고로, 그저 서로의 몸을 탐닉하는 것 외에 이렇다 할 다른 목표를 가지지 못한, 둘의 미약한 약속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감정은 한동안 거기 두 사람의 안에서 솟아나겠지만, 사람은 사랑만으로도 살 수 없는 동물이기에. 미약한 신기루와 허약한 약속, 이것은 보영으로 읽어본 폭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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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포는 또한 감정의 비유이기도 하다. 심상을 떠도는 너무 많은 마음들이 입이나 눈, 손을 통해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면, 왈칵, 결국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서의 비유이자, 주워담을 수 없으며, 막대하고도 끊임이 없는 것들의 비유인 그 우람한 폭포의 이미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아휘의 폭포이다. 그 어떤 모진 말과 가혹한 처사가 있더라도 아휘는 보영을 놓지 못한다. 보영은 그것을 잘 알고 있다.

 

보영은 이기적이었고 퇴폐적이면서도 보호본능을 자극한다. 너무나 매혹적인 보영, 아휘는 애절했으며, 절실하다. 보영이 절실했고, 그러므로 보영과의 이별, 혹은 독립이 절실해진다. 폭포를 끊임이 없는 유량과 추락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보자면, 유량은 보영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고 추락은 보영에 대한 감정이 일으키는 아픔이다. 새어나가는 것을 막지 못하면, 왈칵, 떨어져 깨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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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수 폭포로 가는 지루한 길, 잘못 접어든 길, 시동이 걸리지 않는 싸구려 차, 이런 것들만으로도 싫증이 나버릴 만큼 보영의 아휘에 대한 감정이 미약했느냐, 이기적인 마음뿐이었던가 하면 또 그건 아닌 것 같다. 보영의 아휘에 대한 감정은 의존, 편리와 이기로 손쉽게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손쉬운 이별과 '다시 시작하자'는 간편한 말들에 의해서. 그러나, 아휘와 재회한 택시 안에서 보인 흔들리는 불안한 눈빛과 슬쩍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아보는 것과 이마를 맞대고 추는 탱고에서 보영의 사랑을 읽는다.


그들이 춘 탱고를 아직 기억한다. 이마와 코를 맞대고, 눈을 감은 채 진득히 피어오르는 미소를 머금은 그들은 탱고를 추고 있었지만, 사실 사랑하고 있었다. 그 어떤 사랑의 모습보다 여실하게… 보영 또한 사랑한 것이다, 애절하게. 다만, 그는 사랑을 지켜낼 수 없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관계를 상대와 위기로부터 지켜낼 수도 없었고, 감정을 유통기한과 심지어 자기 스스로로부터도 지켜내지 못하는, 너무도 피동적이고 나약한 사람이었을 따름이다. 그는 감정에, 비단 사랑뿐 아니라 자기 안에 피오르는 모든 감정 일체에 쥐 끌리는 유약한 존재이다.




 

 

보영을 아직 내칠 수도, 그렇다고 다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아휘는 오래도록 고뇌했다. 고독하다. 사랑 속에서 고독하다는 것은 대단한 허적함을 자아낸다. 중경삼림 1부에서 금성무와 임청하가 중경이라는 도시 안, 군중 속의 고독을 표현했다면, 춘광사설에서는 군중이 비어버린 텅 빈 무대 위, 가장 절실히 사랑하는 사람의 그늘 안에서 피어나는 고독을 표현한다. 결국 아휘는 보영과 탱고를 추며 사랑을 표현하지만, 그와 잠자리를 가지지는 않는다. 고독했고, 고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이렇게 나지막이 말했다.


 

"사실 그의 손이 낫지 않기를 바랐다.

아픈 그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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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멋대로 떠나버리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그 순간만 간직할 수 있었기에. 그가 자신을 의존하는 상태에서만 위안을 얻는 뒤틀린 사랑, 아휘는 오래도록 고뇌한다. 차츰 보영의 몸 상태가 호전됨에 따라 불안은 예견된 듯 다시 찾았다. 담배를 사러, 산책하러 잠깐만 방을 비워두어도 아휘는 미치도록 불안하다. 보영이 자신과 헤어지고 금새 다른 연인을 찾아 떠나버린 그 모습을 기억한다. 질투와 의심, 불안으로 가득 찬다. 잠깐 멎어든 폭포의 수계가 다시 차오른다.


신뢰가 비어버린 미친 사랑의 뒷자리에는 감당할 수 없는 불안이 야기된다. 끊임이 없던 그 폭포처럼, 생겨나기만 하고 멎지 않는다. 제멋대로인 보영은 아휘에게서 구속과 질투를 느끼고, 아휘는 자꾸만 보영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질투와 불안을 느낀다. 애초 불안했던 관계는 끝을 달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휘가 보영에게서 떠나갔다.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보영은 다시 아휘를 찾고, 이 기나긴 연쇄를 끊기 위해 아휘는 홀로 이과수 폭포를 찾아간다. 홍콩에서 도피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편지 하나를 우체통에 넣고서. '다시 시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서.

 

 

아휘 : 이제 어디로 가?

장 : 우수아이아란 곳에 갈 거야

아휘 : 추운 데 가서 뭐하게?

장 : 거긴 세상의 끝이야. 직접 가서 보고 싶어

아휘 : 등대가 있다는데, 실연당한 사람들이 많이 간데… 슬픈 기억을 버리고 오려고

장 : 그런 사람들이 있을까?

아휘 : 글쎄, 있을걸?

장 : 한 마디 해봐

아휘 : 뭘?

장 : 마음속에 있는 거 아무거나 말해봐. 슬픈 일도 괜찮아 세상 끝에 묻어버리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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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광사설의 영문 제목은 해피투게더이다. 그들은 결국 함께 있음으로 행복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함께 있는 동안만은 행복을 느낀 것이라고 보아야 할까? 그대라는 고독의 곁에서 불안해하면서도 이마를 맞대고 탱고를 추면서, 그들은 잠깐만이라도 행복했을까?

 

장은 내내 슬퍼 보였던 아휘를 대신해, 묵은 감정들을 녹음기에 담아, 세상의 끝에 버리고 오겠다고 한다. 세상의 끝에서 장은 녹음기를 틀었으나, 그 안에는 누군가의 울음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아휘의 눈물은 세상 끝에 버려졌을까? 그대라는 고독으로부터 생겨나는 무한한 수원, 그의 폭포는 세상 끝에 버려진 것일까? 아휘는 홀로 이과수 폭포에 도착한다. 무한할 듯 쏟아져 내리는 폭포 앞에서, 지어진 그의 표정을 나는 읽을 수 없다.


'그대가 있어 나는 더 고독하다', 나는 이 말을 기다리는 자의 감미로운 슬픔쯤으로 읽어왔다. 이 영화 앞에서 나는 그것이 잘못된 해석임을 받아들인다. 함께 있으면서 고독하다는 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비울 수, 혹은 지워낼 수 없는 감정일 테니 말이다.

 

고독은 어두운 무언가이다. 홀로 고독한 이는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곁을 비춰주는 누군가의 등불을 필요로 했다. 그렇다면 그대라는 고독을 앓는 이도 마찬가지로 그 어둠을 살라낼 수 있는 것일까? 아휘는 끊어버리기로 한다. 그건 그늘을 드리우는 사랑하는 나무를 잘라내는 것이다. 누군가로 인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아휘는 다짐하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바로잡기로 한다. 그리고 나무가 잘린 자리에는 다른 사랑이 찾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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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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