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역사 문화콘텐츠의 확장가능성을 맛보다 - 오페라 허왕후 [공연]

글 입력 2022.05.20 2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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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공연에 만족감을 느끼기 쉽지 않다. 엉성한 이야기 전개와 구성, 허접한 무대장치와 의상, 귀에 꽂히지 않는 음악, 적나라한 표현의 가사 등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도저히 몰입되지 않는 공연들이 많다. 공연을 보는 기준이 그리 까다롭지도 않은 편인데, 지금껏 본 창작 공연 중에 만족했던 공연들은 몇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창작, 라이센스 공연을 보는 기준을 달리하는 건 더욱더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하기에 창작 공연을 볼 때마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극장에 들어서게 된다. 그럼에도 이 창작 오페라 <허왕후>는 기분 좋은 뿌듯한 마음으로 극장에서 나올 수 있었다.

 

 

포스터_허왕후.jpg

 

 

 

한국사 문화콘텐츠의 잠재력



오페라 <허왕후>는 가야시대, 김수로 왕과 야유타국 공주 허황후가 등장하는 가야의 이야기다. 극의 1부에선 허왕후에 대한 이야기보다 가야에 대한 찬양과 살기 좋은 나라를 알리는 오페라들이 이어진다.

 

주인공들에 눈이 가기보다 전체 앙상블을 이루는 동선과 안무에 눈이 절로 간다. 가야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일상과 가야에 살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그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보게 되는데, 여기서 <허왕후>의 매력이 드러난다. 역사 문화콘텐츠의 잠재력을 한껏 품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역사를 배울 때나,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해 공부할 때도, 가야의 비중은 크지 않았다. 시험에 출제되는 유형은 금관가야와 대가야, 그리고 철기 기술이 좋다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에 학생들도 그 정도로만 공부하고 넘어가는 편이다. 이에 더구나 매체에서도 가야에 대한 이야기는 현저히 적다.

 

한국의 역사를 수놓은 여러 국가에 대한 이야기들은 드라마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나오고 다양한 매체에서 활용, 등장하고 있던 것에 비해, 개인적으로는 가야에 대한 이야기를 접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야인들의 삶은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조선, 고구려, 신라에 대한 이야기는 어릴 때부터 드라마에서 자주 보았기 때문에 익숙하다. 하지만, 가야의 삶에 대해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저 철제 기술 강국의 나라로만 생각하고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을 것이다. 오페라 <허왕후>는 문화콘텐츠로서 가야의 잠재력을 드러낸 좋은 작품이다.

 

 

허왕후 (4)_ⓒ(재)김해문화재단.jpg

 

 

평소, 조선의 똑같은 왕이 여기 드라마, 저기 드라마, 이 영화, 저 영화에서 각기 다른 배우들로 등장해 비스무리한 내용으로 전개되는 것에 식상함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에게 신선한 재미를 제공한다. 우리 한국의 역사 속에선 다양한 나라들이 세워지고 사라졌고, 그 사이엔 수많은 왕과 백성들이 존재했다는 점이 문화콘텐츠로서 더 확장될 수 있음을 오페라 <허왕후>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다.

 

가야 역사 문화콘텐츠의 발굴을 위해 김해시와 김해문화재단이 지역성을 바탕으로 김수로 왕과 허왕후의 이야기를 창작했다. 이 작품은 숨겨진 다양한 이야기를 모티브로 오페라와 뮤지컬, 공연, 영화 등 폭넓은 문화콘텐츠를 창작해낼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한국의 고유 이야기로 이렇게 맛있는 공연을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한국 대극장 뮤지컬을 보면, 창작 뮤지컬임에도 원작은 해외에서 따온 공연이 많다. 그래서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창작 뮤지컬을 찾아보는 편이지만, 결국엔 이야기들이 모두 서양의 문물을 표현하는 무대 연출이나, 외국 이름을 그대로 써 언어만 한국어로 진행되는 공연으로 결론지어져서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허왕후>는 한국의 고유 이야기로도 재밌으면서도 가슴이 절절해지는 공연을 만들 수 있다는 좋은 사례로서 역할을 한다. 이를 시작으로 다양한 겉과 속이 모두 ‘한국 창작’인 공연들이 제작되길 바라는 소망이다.

 

 

 

오페라의 반전


 

1부에서 가야에 대한 일상생활과 평화로운 모습들이 전개되는 사이에 악역 석탈해의 모략들이 삽입되어 이제 곧 벌어질 사건들이 예고된다. 결국 김수로가 철 제조 기술을 담은 문서를 몰래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고 국가반역죄로 무릎 꿇게 되는 결말로 1부가 마무리된다. 이는 석탈해의 모략으로, 돈으로 김수로의 측근을 현혹해 거짓 자백을 하게 만든 것인데, 여기서 허왕후의 하녀 디얀시도 엮이게 된다. 오페라에서 빠져선 안 될 ‘사랑’으로 말이다.

 

1부가 끝나고 인터미션 후 다시 2부가 시작된다. 디얀시는 석탈해를 사랑하고 있었다.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석탈해의 이기적인 면모를 알면서도 속으면서 부정하고자 했다. 석탈해는 디얀시에게 김수로의 몰락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너를 데리고 자국으로 돌아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서 김수로를 몰락시키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결국 그의 말대로 그녀는 그의 행위를 돕고, 죄책감에 빠져 허왕후의 얼굴조차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다.

 


허왕후 (5)_ⓒ(재)김해문화재단.jpg

 

 

석탈해와 디얀시의 이상한 관계를 눈치챈 허왕후는 그녀가 먼 타국에서 오랜 시간 외로움에 둘러싸여 있었음을 알아채지 못한 것에 미안하다며 그녀를 위로한다. 자신의 하녀로 항시 함께했는데, 디얀시의 어려움들을 알아채지 못하고 잘 챙겨주지 못했음에 후회하며 디얀시를 토닥여준다. 이에 디얀시는 고통스러워하며 석탈해와의 이야기를 허왕후에게 털어놓는다.


김수로를 어찌할지를 결정하는 회의장에서 허왕후는 디얀시에게 진실을 말하라고 권유하지만, 쉽게 석탈해와의 계략을 사실대로 말하지 못한다. 그리고 디얀시는 석탈해에게 사랑을 확인받고자 하지만 실패한다.

 

결국 석탈해의 이기적인 면모만을 확인하게 된 디얀시는 제 몸 바쳐 석탈해가 김수로에게 누명을 씌운, 모략이었다고 사람들에게 실토한다. 사랑을 얻고자 노력했던 디얀시와 그토록 사랑했던 이에게 버려진 그녀가 부르는 오페라의 연속은 어느 장면보다 아름다웠고 슬펐다.

 

온 박수와 함성이 터져 나온 이 장면이 오페라 <허왕후>의 모든 것을 표현했다.

 

 

허왕후 대표사진_ⓒ(재)김해문화재단.jpg

 

 

결말에선 석탈해의 계략이 밝혀져 그는 추방당하고, 김수로가 가야국의 왕으로 초대되어 야유타국 공주인 허황옥은 우리가 알고 있는 허왕후가 된다. 행복한 가야로서의 탄생으로 극은 끝난다.


<허왕후>가 오페라의 제목이지만, 실제로 극을 보면 디얀시가 누구보다 빛나고 거대하고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결정적 인물임을 알 수 있다. 귀족도 아닌 평범한 백성도 아닌, 아버지부터 노예였던 하녀이다. 그 신분의 디얀시가 주인공이라는 것은 큰 의미를 지닌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신분의 그녀가 왕을 구하고, 이 가야국을 살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 국가는 선량한 사람 1명으로도 발전할 수 있고 나쁜 악인들로부터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 힘이 한국인에게는 분명 존재한다. 그리고 백성을 무시하지 않고 모두에게 착하게 대하는 모습으로 꾸준히 등장했던 김수로의 마음이 담긴 가야의 의식도 이 결말로 빛나게 된다.

 


허왕후 (2)_ⓒ(재)김해문화재단.jpg

 

 

허왕후의 결말은 지금 시대에 허왕후 이야기를 오페라로 탄생시켰기에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사랑에 지고지순한 가녀린 여성 캐릭터에 한정되지 않고, 한계 없이 이야기를, 오페라 극을 진행시킬 수 있음에 놀라웠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마지막, 디얀시의 죽음 이후 허왕후가 고향에 그녀를 묻어주기 위해 돌아가는 전개도 놀라웠다.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소프라노에 강렬하고도 가냘픈 오페라보다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는 소프라노에 강렬한 흔적을 남기는 오페라이기에 더 기억에 남는다.


사실, 사랑을 달라고 사랑이면 충분하다고 울부짖는 디얀시의 오페라를 들으며 마음이 아프긴 했지만, 이렇게 거부당하고 자살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에선 가야에 대해 찬양을 하더니, 2부에 들어서니까 오페라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가는 여주인공의 비극을 끼워넣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커졌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기우에 불과했다.


반전으로, 디얀시만의 목소리를 내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이를 보았을 때 느낀 통쾌함과 주변 어머님 관객분들의 웅성대는 소리로 오페라 전체의 분위기와 흐름은 바뀌었다. 한계를 넘은 한국 창작오페라의 진가를 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공연을 많이 본 사람도 아니지만, 이 오페라의 흐름과 무대 연출은 ‘노트르담 드 파리’가 떠오를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가야 시대상을 표현하는 다양한 소품들과 거대한 칼, 분위기에 따라 변하는 배경과 크나큰 절벽 등 ‘이걸 한국 김해에서 만들었다고?’ 감탄이 절로 나오는 연출도 이 오페라에 만족하는 데 큰 몫을 했다.

 


허왕후.jpg

 

 

오랜만에 창작 공연을 보았고, 그보다 더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공연 관람을 했다. 집에 가면서 같이 본 친구와 함께 만족스럽다는 후기를 나눌 정도로,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든 오페라였다. 한국 역사를 기반으로 한 문화콘텐츠 창작의 폭이 넓어진 시발점이라고 생각하며, 계속해서 창작자들이 기존의 한정된 소재를 벗어나,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만족을 줄 수 있는 공연과 문화콘텐츠를 만들어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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