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해맑은 웃음 뒤에 강인함이 - 오페라, 허왕후 [공연]

첫 오페라 관람기
글 입력 2022.05.19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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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_허왕후.jpg

 

 

첫 오페라다. 예술의전당은 이제 꽤 친숙한 곳이 되었지만, 아직 이 땅에 맛보아야 할 문화예술은 많이 남아 있다. 오페라를 찾아오는 마음은 해맑았지만, 잘 영위해볼 자신이 없었으니 영 떫은 뒷맛이 마음 끝에 남아 있다. 문화예술은 아는 만큼 보이고 흠향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모른다고 왜 못 알아보겠냐마는, 그래도 아는 만큼 더 잘 읽히리라는 생각이 과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페라 하면 성악이 떠오르고, 성악은 아직 쉽사리 공감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짙은 인상을 떠올린다. 왜 아직 그러한 발성과 창법을 사용하는지, 그로 인해서만이 맛볼 수 있는 높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오페라를 찾는 일이란, 이로써 하나둘 알아가기 위함인 것이다.


오페라하우스의 구성은 어디서나 유사한 것 같다. 좌-우측 고층부에 층층이 비늘처럼 돋아나 있는, 몇 안 되는 객석들이 그 옛날 오페라하우스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왠지 저기서는 손잡이가 달린 가면을 써야 할 것 같은, 그런 기억 말이다. 오케스트라가 느닷없이 연주를 시작함으로써 막은 열린다. 무대를 가리지 않기 위해, 혹은 무대 위의 인물들에 대한 집중을 빼앗지 않기 위해 보이지 않도록 움푹 파인 곳에서 음악이 흘러나니 깜짝 놀란 것이 당연하다.


무대 위쪽에는 스크립트가 나온다. 성악은 숙련된 관객이 아니고서는 모든 가사를 들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에 서사의 흐름을 놓치고 집중이 와해된 기억이 있다. 참 다행인 구성이다. 스크립트는 침묵 속에서 가야에 대한 배경역사를 소개한다. 고대사를 소재로 한 오페라인 만큼, 친절한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허왕후 (3)_ⓒ(재)김해문화재단.jpg

 

 

성악은 클래식 콘서트의 단편으로만 접해보았다. 악기들의 틈바구니를 뚫어올리는 쇠 힘줄 같은 복압, 그때에만 발생하는 꽉 찬 밀도의 목소리와 큰 폭의 진동이 묘사해내는 벅찬 감정의 생생함, 그리고 카타르시스. 그러나 가사의 전달력이 낮아, 가사가 그려내는 것들을 전부 받아들이지 못하고 허공에 흘려보내기도 하였다. 한때 가요가창을 잠깐 나마 배워본 바로는 저 발성이 얼마나 대단한 힘을 요하는지 다 알지 못하겠지만, 그럼에도 대단히 대단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아직 오페라 양식에 친숙하지 않은 탓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말로 된 오페라를 들어보는 것에서 조금의 어색함을 느끼기도 한다. 경탄조가 우리네 일상에 충분히 녹아들지 않은 탓일까? 마치 외국산 희곡을 그대로 번역해서 연기하는 것을 바라볼 때의 이질감을 느낀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건 다 친밀감의 문제로 치환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영역이다.


또는, 설명이 많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으리라는 짐작도 든다.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소재를 사용하는 만큼, 또한 그렇기에 우리 역사를 예술의 양식에 담아 더욱 널리 퍼뜨리고자 하는 의도가 거기 있을 터인 만큼, 설명이 많았다. 우렁차고도 웅장한 발성으로 '가락국의 철기는 아유타국에서 없어서 못 팔지요', '그럼 이제 아유타국의 음식문화에 대해 말해볼까요'와 같은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거기 감정이 너무 많이 담긴다.


여기서 오페라를 읽어보는 한가지 기준을 획득한다. 그것이 인간 감정의 가장 강렬한 순간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양식이라면, 즉 표현의 양식이라면, 감정 묘사, 절정부의 감정 분출, 그리고 인간의 감정이 속속들이 숨어 깃들어 있는 인물 간의 대화에 집중해서 관람을 진행하면 좋겠다. 그렇다면 오페라와 성악 솔로의 가장 큰 차이란 이것, 대화에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한 인물이 다른 인물에게 건네는 성악 발성으로 된 대화 속에서, 그려지는 인간의 감정에 집중해보기로 한다.

 

 

허왕후 (5)_ⓒ(재)김해문화재단.jpg

 

 

오페라 양식을 어떻게 읽어볼 것인지에 대한 앞서의 생각과는 아주 별개로, 오페라 직관의 즐거움은 존재한다. 그것은 콘서트를 찾아가는 이유와도 같다. 녹음기기가 다 담을 수 없는, 인간이라는 악기의 거대한 진폭이 커다란 무대와 객석을 넘치도록 흐를 때, 그래서 살짝 흩어져 풍성해지면서도 아련해지는 소리.

 

벽에 마구 반사되어 진동과 진동이 겹치는 순간이 탄생시키는 심미적인 쾌감이 있다. 가득 찬 소리가 필연적으로 발생시키는 커다란 음량이 듣기 좋도록 조절된 것, 또 하나의 목소리가 찰나의 차이를 두고 부르는 합창. 합창은 음량과 발성 변화 없이도 소리의 결을 더욱 두텁게 만들어준다. 이것은 MP3 필터의 콘서트홀 모드로도 다 구현해내지 못한 것이다.


또 하나의 즐거움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짙어진 고막을 소프라노가 씻어주고, 소프라노로 인해 충분히 비워진 고막을 바리톤의 묵직함이 채워드는, 이 반복 속에서 청각적 역치가 계속이 환기된다는 점이다. 바리톤은 중후함과 돈후함을, 소프라노는 명랑함과 산뜻함을 내 귀에 마구 밀어 넣어준다.

 

소리의 특징이 워낙에 뚜렷한 장르이다 보니, 어느 한 쪽만 있었더라면 귀가 쉬이 익숙해져 버렸을 듯싶다. 바리톤이 공연 전반의 가장 안정적인 소리와 감정선을 형성하면, 테너의 소리와 연기가 그 위에서 돋보이고, 소프라노는 아주 차별화된다. 여성 등장인물이 단 둘뿐이라 소프라노 비중이 적은 것이, 그래서 조금 아쉬웠다.

 

 

영상 29분, '해맑은 웃음 뒤에 강인함이' 부분을 가져왔다.

 

 

허왕후, 인도의 공주로서 금관가야의 첫 왕후인 허황옥의 아리아가 기억에 짙게 남는다. '해맑은 웃음 뒤에 강인함이'라는 제목의 아리아이다. 3번째 마디의 플랫음 구성이 귀에 찰싹 달라붙어 아직도 맴돈다. 제목이 가리키고 있는 대상이 김수로이니, 일종의 연가이다. 성악으로 표현된 한 남자에 대한 연가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지금 사랑에 대해 노래하는 저 사람의 안에 감정을 담는 그릇이 있다면, 그것이 넘칠락 말락 자맥질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가요와 달리 성악에서는 고음으로 갈수록 음이 짙고 굵어지는 것으로 들리는데, 그것은 감정의 절정을 나타내는 고음부에서 더욱 탁월한 표현력을 자아냈다. 하지만 이 고음부의 음과 감정이 통제되지 않으면, 절정에 닥쳐 앞서 언급한 '그릇'을 흘러넘쳐 버린 감정이 그에 대한 나의 몰입을 깨트려버릴 것 같다. 그래서 성악의 고음부는 나를 긴장하게 한다.


15일 허황옥 역을 맡은 권은주 소프라노님의 가창은 넘칠 듯 말 듯한 이 텐션과 감정을 수려하게 통제해낸다. 고음부로 치달을수록, 이미 여실히 표출되고 있는 감정선의 절정부가 도래하기 직전, 조마조마한 나의 긴장을 쓸어내리는 이 통제된 하이피치에서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이제 한 여인의 연가가 그려내는 그녀의 감정을 읽어보기 시작한다.

 

 

허왕후 (7)_ⓒ(재)김해문화재단.jpg

 

 

김수로의 해맑은 웃음 뒤에 서린 강인함에 반한 그녀의 읊조림이 풍만하고도 수줍게 다가온다. 그이의 곁에 줄곧 함께하고픈 아쉬움과 다가올 날들에 대한 기대감, 낭만적인 비애와 마찬가지로 낭만적인 희망이 번갈아 등장하는 곡의 구성. 나는 이에 대한 적당한 어휘가 떠오르지 않아, 동행한 이에게 '극적이다'라고 말해보았다.


직관할 가치를 차고도 넘칠 만큼 지닌 오페라였다. 창작오페라인만큼 이 안의 음악들은 이 공연에서만 들을 수 있는 것들이다. 집에서 리뷰를 쓰기 위해, 이 노래를 몇 번이나 들었는지 다 모르겠다. 못 잡아도 10번은 넘게 들은 것 같다. 당연 아무리 들어도 그때의 감동까지 되살려주지는 못한다. 어느 음악공연이건 이건 마찬가지였다.


15일 공연에서 석탈해를 연기한 민현기 테너님의 발성은 다른 어떤 주인공들보다도 대단히 매력적이면서 짙디짙고도 끈질긴 음색을 뽐냈는데, 소리가 19열의 내 자리에 닿을 때까지도 흩어지지 않을 정도였으니 그 놀라움이 얼만 했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이것도 다 영상과 녹음에는 결코 담기지 않을 것들이다. 첫 오페라 직관, 대단히 성공적인 경험으로 갈무리한다. 이 경험이 다음번 오페라 관람의 기회 앞에서 날 더욱 기껍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며 이상, 첫 오페라 직관에 대한 감상을 마친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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