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끝내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들의 이야기 - 슬픔이 역류하여 강이 되다

글 입력 2022.05.08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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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른이 되기 위해선 마치 통과 의례처럼 겪는 일들이 있다. 처음 경험하는 것이라 낯설어 감히 무엇이라고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라든가, 관계의 상실을 통해 내 세계가 무너지는 것만 같은 것들. 그런데 현실을 둘러싼 환경이 너무도 암담해서, 어른이 되기까지의 거리가 너무도 멀고 험해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이들이 있다. 그렇게 된 아이는 자라지 못하고 그 안에 그대로 갇혀버린다. 기어이 어른이 되지 못한다.

 

소설의 주인공 이야오는 창녀라고 소문이 난 엄마 밑에서 매일같이 폭언과 폭력에 시달리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학교 폭력을 당한다. 어느 날 이야오는 돌연 임신을 하는데, 남자친구는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찾아간 아빠는 새 가정을 핑계 대며 더는 찾아오지 말 것을 당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이야오의 곁에는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온 소꿉친구 치밍이 있다. 치밍은 이야오를 안쓰럽게 여기며 내내 옆에서 머무른다. 그러나 어릴 적과 점차 달라지는 서로의 환경은 둘 사이에 균열을 일으킨다. 이야오는 점차 치밍과의 격차를 절감하면서 불안감을 느낀다. 둘은 자신의 마음이 연민인지 사랑인지 그 중간쯤인지 명확히 정의하지 못한 채, 서로에게 조금씩 기대고 또 밀어내며 위태로운 날들을 버텨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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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끊임없이 대물림되는 공간, 학교



이야오와 치밍이 속한 학교라는 공간은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가득한 만큼, 언뜻 수평적이고 평화롭게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기실 그 안에서는 크고 작은 갈등이 숱하게 벌어진다. 이뿐만 아니라 한 아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나 의도적으로 괴롭힘을 위해 만들어낸 허위 사실이 소문의 형태로 빠르게 퍼져 아이들 사이를 휘젓는다. 

 

이야오는 그 소문의 대상이다. 낙태하기 위해 산부인과에 갔다는 사실을 판샤오밍에게 들킨 순간, 필사적으로 판샤오밍에게 읍소해야만 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잔인한 건 이러한 폭력적 상황은 절대 끊이지 않고 대상만 달리하여 대물림된다는 사실이다. 이는 에필로그에서 구썬시라는 인물이 새 학교로 전학을 갔음에도 불구하고 이야오처럼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아이를 발견하는 데서 드러난다.

 

이야오는 폭력적인 상황에 무력하게 있기보단 가해자인 판샤오밍에게 자신만의 방식으로 복수를 시도한다. 치밍의 핸드폰을 빼앗아 마치 그가 판샤오밍에게 고백하려는 듯한 상황을 연출해냄으로써 말이다. 판샤오밍이 이야오를 심하게 괴롭힌 이유는 치밍의 마음이 늘 이야오를 향하는 데서 느낀 시기 질투 때문이었는데, 그 점을 이용한 거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늘 치밍은 돌연 이야오를 심하게 질책하며 거리를 둔다. 

 

물론 치밍의 핸드폰을 멋대로 사용해 일을 벌인 것은 이야오의 잘못이 맞다. 그러니 치밍이 화를 낸 것은 정당해 보인다. 그런데 치밍은 이야오와 판샤오밍이 발붙이고 서 있는 데가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주변에 사람들로 둘러싸인 판샤오밍과 달리 늘 홀로 괴롭힘을 감내해야 했던 이야오였으므로, 그것은 이야오가 자신을 지키고자 이행한 최후의 보루였다. 그럼에도 치밍이 "너도 네가 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물을 만큼, 위와 같은 행동은 모질게 손가락질받아야만 하는 정도의 것이었던가. 더욱이 손가락질은 왜 이야오를 괴롭힌 판샤오밍이 아닌 오롯이 이야오를 향했어야만 하나. 의문이 연쇄적으로 차올랐다. 

 

치밍이 위와 같은 행동을 한 그 기저에는 아이들에게서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특권을 박탈당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해본다. 결국 치밍 역시 이야오를 아끼기는 하지만 자신이 도리어 아이들 사이에서 소외되진 않을까 하여, 본인이 피해 입을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타인을 위할 수는 없었던 셈이다. 물론 온전히 치밍을 탓할 수는 없다. 이러한 설정은 외려 학교에서 반복되는 잘못된 문제들에 주목하게 하니까 말이다. 치밍의 진솔한 속내는 책의 마지막 부에 직접적으로 묘사된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주고 싶지만 이야오가 존재하는 그곳이 너무도 어두워서, 언젠가 그 안으로 자신 역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에 완전히 다가가기엔 망설여진다는 식으로. 

 

한편 위와 같은 묘사는 치밍과 이야오가 속한 환경을 들여다보게 했다. 그러니까, 비상식적인 어른 밑에서 자라야만 했던 그들의 가정 환경 말이다.

 

 

 

어른답지 못한 어른들 밑에서 자라야만 했던 아이들



이야오의 아빠는 이야오와 가정을 버렸다. 게다가 엄마인 린화펑은 틈만 나면 이야오에게 온갖 물건들을 던지고 구타를 서슴지 않는다. 더하여 동네에서는 어른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빠르게 번진다. 결국 폭력적인 어른들과 자신들의 재미를 위해 아이들을 먹잇감으로 이용하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비극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 셈이다. 

   

그런가 하면 치밍은 이야오와는 조금 다른 결의 엄마인 리완신을 두고 있다. 그렇다고 리완신 역시 폭력적인 경향을 탑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치밍은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이어지는 엄마의 참견이나 도 넘는 발언을 못내 불편하게 여기니 말이다. 물론 이야오는 치밍을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처럼 여긴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폭력의 정도가 확연히 다르니 이해가 간다. 그렇다 할지라도 치밍 역시 엄마를 향한 혐오감과 가책 사이에서 매일같이 괴로워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한편 소설의 첫 부분에서 이야오의 엄마인 린화펑은 성매매를 해 돈을 버는데, 그건 오롯이 이야오를 위한 것이라는 식의 묘사가 나온다. 이러한 묘사가 등장한 이유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린화펑은 폭력적이어도 모성애는 탑재한 인물이기에, 마음 한구석에는 늘 이야오를 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삽입한 대목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해당 묘사는 그저 가정 폭력범을 옹호하고 합리화하려는 시도로밖에 비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린화펑이 매일같이 휘두르는 폭력의 정도는 이미 용서할 수 있는 수준을 지나쳤기 때문이다. 린화펑은 그러한 자신을 두고, 남편이 바람피워 받은 상처 때문인 것 같다고 짐작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렇게 상처받았으면 적어도 아이에게는 대물림하지 말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

 

의도적인지 우연적인지 모르겠지만 공교롭게도 아이들이 어떤 사고나 상을 당할 때마다 주변 어른들은 개입하지 않았다. 대신 치밍이나 구썬시만 이야오에게 달려왔더랬다. 이러한 점만 보아도 아이들에게 오롯이 책임을 떠안게 하고 그 모든 비극의 구렁텅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만든 데는 어른들의 탓이 압도적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자꾸만 시대착오적이고 퇴보된 말을 하는 게 불편했다. 기성세대는 이전의 사고방식에서 쉽게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안다. 그러나 아이들 역시 이런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는 것 역시 불편했다. 소설이 요즘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방식의 묘사가 판을 쳤다는 것 자체도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어른들이 존재하는 곳이니만큼 아이들이 그러한 사고를 자연히 답습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반대급부의 생각 역시도 고개를 쳐들었다. 요컨대 이 마을이 얼마나 옛날에 머물러 있고, 아이들은 자라지 못한 채 어른들의 폭력에 노출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그 안에서 관계의 균열을 경험해야만 했던 아이들


 

이야오는 치밍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섣불리 규정할 수 없었지만, 치밍은 이야오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둘은 연인이 되지 못했다. 치밍은 구썬샹이라는, 사랑도 많이 받고 자랐으며 공부도 잘하는 학생을 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에는 마음 크기의 문제가 압도적이었을 수 있긴 하다. 그런데 혹 치밍이 어른들의 끊임없는 주입을 통해 이야오와 자신을 다른 영역의 사람으로 상정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밀어낸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피어오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본래 아이들의 출발점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환경의 격차는 둘 사이에 균열을 냈다. 지금은 같은 동네에서 살고 있으나 치밍은 이사를 앞두고 있다는 것 역시, 곧 둘 사이가 수평에서 수직으로 바뀌는 구도를 보여주기 위한 상징이다. 둘의 관계를 ‘사선을 그리는 거 같다’고 묘사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지점이다. 

 

여기서 둘은 불안감에 서로를 언어나 행동으로 상처 입힌다. 치밍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이야오는 다소 거친 언어를 내뱉는 식으로 서툰 마음을 표현하고, 치밍은 어떤 단어를 내뱉을 때 아무런 의도 없이도 이야오의 아픈 지점을 건드리진 않을까 심사숙고하는 과정을 거친다. 사실상 해당 언어를 내뱉은 치밍도, 거기에 상처받은 이야오도,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아이들을 이렇게 힘든 상황에 빠지게 된 근본적 원인으로 다시금 어른들을 주목하게 되는 게토에 봉착했다.  

 

 

 

읽으며 아쉬웠던 점에 관하여



소설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이야오를 향한 구썬시의 마음이 잘 이해되질 않았다는 것이다. 처음 그가 이야오에게 접근한 방식이 불순한 목적이었기도 했고, 이후 계속해서 이야오를 찾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아서이기도 하다. 그런가 하면 에필로그를 통해서는 그의 마음이 와닿았는데, 이야오를 잃은 충격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나머지 학교 폭력에 시달리는 중위엔을 바라볼 때 이야오를 투영해 도운 것이라는 점이 다소 간의 개연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구썬시는 그저 치밍을 대체하는 인물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져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잘생겼다거나 말이 없다는 둥, 거의 동일인물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이 연이어 등장하자, 어쩐지 신데렐라 서사 같다는 느낌을 부정하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아프고 폭력적인 상황에 있는 이야오를 사랑하고 계속해서 지키려는, 잘생긴 두 남자 학생들. 그들 사이에 팽팽히 오가는 미묘한 견제의 감정. 성장 소설에 꼭 필요한 게 사랑이니 이와 같은 설정이 필요하겠지 싶기도 했다. 그런데 어쩐지 삼각관계 로맨스로 기우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위와 같은 지점이 상당히 거슬린 것은 소설 내 조명하는 인물이 잦게 변한 탓이기도 할 거다. 처음 치밍의 상황을 먼저 보여주어 언뜻 치밍이 주인공이 되려나 싶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이야오다. 그런데 왜 처음에 이야오 대신, 치밍의 입장을 보여주는 파트가 압도적이었을까. 그런가하면 마지막에는 치밍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아예 구썬시의 이야기로 전환되어버린다. 구썬시라는 캐릭터 자체에 빈틈이 느껴져서 과연 주요 인물로 설정한 이유가 뭘까 계속해서 의문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이 사람 저 사람을 비추니 다소 두서 없고, 따라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마지막에 이야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결말과 더불어 "이제는 기억하기도 쉽지 않은 그날 일은 떠올리기도 싫은 그 일들은 창백하고 적요한 어느 겨울날 시작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책이 시작되는 것을 보면, 이야오의 곁에 있었던 아이들의 시선에서 이 일을 바라보려는 의도로 치밍과 구썬시의 이야기를 각각 앞뒤에 배치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마치며



그러나 이러한 점을 제외하고는 소설이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사회 어딘가에 분명 존재할 어떤 삶을 들여다보게 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기도 하다.

 

마지막 결말을 생각해본다. 작가의 말에 등장하는 "소설은 마지막 부에 이르러서야 비극이 소용돌이처럼 불어닥쳤다는 평이 쏟아졌다"라는 식의 발언에서도 드러나듯, 정말 그렇다. 결국 이야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런데 이는 오해에 의한 것이었다. 이야오의 죽음이 보여주듯, 세상에는 공백이 많다. 끝까지 밝힐 수 없는 것도, 오해가 쌓이고 쌓여 불어나는 경우도 많다. 이때 대개 진실이 뭐였는지는 중요치 않다. 소설 내 학교와 동네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뒷담화를 즐기고 소문을 내며, 누군가를 인격체로 존중하는 게 아닌 이야깃거리로 삼아 물고 뜯고 씹는 행위를 즐긴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말이다.

 

이야오는 단지 잘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고 마지막 희망마저 자기 손을 놓아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일 거다. 믿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한 명이라도 이야오의 진실한 편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면 미어진다. 이런저런 소문과 극심한 충격에 혼돈에 빠지면,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약자인 이야오에게 화살이 돌아간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 설정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소설이 폭력적인 부분을 그대로 묘사하는 만큼 다소 적나라하지 않나 하는 우려가 들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에서 이보다 더 폭력적인 일은 사회에서 많이 일어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설계한 것이라는 말을 보고서는 납득이 가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야오는 소설 내에서 자주 도망치고 싶다고 했다. 소설 내 묘사된 사회의 현실이 너무도 혹독하고 잔인했는데, 그래서 그 심정이 더욱 절감됐다.

 

그 시절을 통과하며 통과의례처럼 겪어야 하는 일들은 반드시 있지만, 그 과정을 기꺼이 치러온 아이들은 거기서 자라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 왜,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물론 그것은 하나로만 딱 떨어지지 않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복잡하고 긴밀하게 엮여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부 연결되어 있다. 하여 어떤 아이의 아픔을 변방으로 밀어 넣지 않고 그것을 중심으로 끌어와 관심을 두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구썬시가 두 번째 학교로 갔을 때 겪은 상황을 만들지 않고, 줄줄이 극단적인 선택을 한 두 학생과 같은 제 2, 제3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

 

 

[추예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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