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옷을 뜹니다 [사람]

글 입력 2022.04.2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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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우리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떠오른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와 공간을 무겁지 않게 채우는 식물들, 적당한 온도의 차와 간식거리. 그 사이의 흔들의자에 앉아 온화한 인상의 여자가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인다. 왜인지 졸음에 취한 고양이들이 느리게 꼬리를 흔들고 있을 것만 같다.


한 번씩은 경험해보았을 초등학교 실과 시간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학교 앞 조그만 문구점에서 형광색 고무로 연결된 500원짜리 대바늘과 까끌까끌하던 실을 사서 교실에 들어간다. 작은 손에서 자꾸만 흐트러지는 실을 고정해보려 애쓰지만 결국은 여기저기에서 얽혀 하나의 공이 되어버린다. 이번 겨울에는 꼭 직접 뜬 목도리를 하고 첫눈을 맞겠다는 큰 목표로 시작된 뜨개질은 항상 친구들과의 실뜨기 대결로 마무리된다.


엄마와 할머니께서 직접 뜨신 발 매트나, 컵 받침 같은 소품들이 생각날 수도 있다. 만약 그들이 뜨개질의 고수라고 불릴만한 실력의 소유자라면, ‘직접 뜬 스웨터’를 입게 될 것이다. 10명의 사람 중 적어도 7명은 이런 손뜨개 소품이 있는 집에서 자랐을 것이라고 감히 예상해보기도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 가지 그림 중 두 가지는 나의 경험이고 남은 하나는 내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이다. 그렇다. 나는 손뜨개 스웨터를 입고 쉬는 시간 마다 친구들과 실뜨기를 하고, 겨울방학마다 목도리 뜨기에 도전했던 초등학생이었다. 현재는 뜨개질하며 느긋한 오후를 보낼 수 있는 미래가 인생의 목표인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니 22년의 인생 중 대부분을 뜨개질과 함께한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뜨개질도 졸업했던 내가 다시 뜨개질을 시작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


그 이유를 찾아보자면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 대한민국의 여느 고등학생들처럼, 나 또한 학업과 진로의 압박으로 ‘어둠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매일 1교시부터 8교시까지의 수업이 끝나면, 야간 자율 학습이 시작되었고 야자를 하지 않는 날이면 학원에 갔다. 물론 점심시간이나 석식시간에 교실 스크린으로 보는 온갖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나, 급식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친구들과 학교를 빠져나와 먹었던 분식집의 메뉴들처럼 바쁜 일정 속에서 즐거운 기억들도 있다. 심지어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 덕에, 즐거운 마음으로 학원에 가는 흔치 않은 경험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일정을 버티기에는 나의 체력이 너무나도 부족했다. 원체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고 걱정이 많은 성격을 가진 탓에 매일 밤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미래를 상상하느라 가장 편안해야 할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스트레스로 가득 차기도 했다. 내가 상상했던 최악의 미래란 이런 것이었다. 부족한 내신 성적, 생활기록부, 자기소개서 때문에 ‘수시 6광탈’ 후 재수에 도전하고, 그마저도 실패해 삼수하게 되는 것. 대학이 세상의 전부였던 평범한 고등학생답게,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여러 가지 시나리오가 항상 머릿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두려웠던 것은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는 이 초라한 모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5년 후, 10년 후, 정말 ‘어른’이라고 불리는 나이가 되어서도 ‘진정한 목표’ 없이 사는 삶이 계속되면 어떡하지?


마음속이 시끄러우니 주변 환경들이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웃고 넘겼을 부모님의 가벼운 잔소리가 과한 간섭처럼 느껴졌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서 들리는 거리의 소음들에 짜증이 나서 듣고 있는 음악의 소리를 키우면 또 그것대로 시끄러워 만족스럽지 않았다. 어느 교실에나 있는 목소리 큰 친구들의 웃음소리 때문에 귀가 아프다고 생각될 때쯤에는 그 웃음들이 유쾌하게 느껴지던 과거로 돌아가지 못할 것 같아 무섭기도 했다.

 

*


그때부터 ‘평화’롭고 ‘조용’한 상태로 머무르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평화로움과 조용함에 ‘집착’했다는 말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소리를 차단하기 위해 귀마개와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사용하는 1차원적인 방법부터 따뜻한 차를 마셔보고 베스트 셀러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에세이도 읽어봤다. 자기 전에는 ASMR 콘텐츠를 찾아보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1지망으로 지원했던 대학에도 합격하고 큰 일탈 없이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는 데 성공했다.


상상했던 최악의 미래가 실현되지 않아 안도감이 들었다. 큰 산을 넘었으니 낙원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또 다른 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시에 대한 고민이 취업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었을 뿐이었고 어느새 또 다른 최악의 미래를 그리기 시작했다. 지금껏 시도한 평화로움을 위한 노력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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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뜨개질이 떠올랐다. 아무런 계기도 이유도 없었다. ‘목도리 완성’이라는 이루어지지 않을 목표를 향해 열심히 뜨개질해 나가던 나의 과거가 떠올랐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루지 못했던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시 시작한 뜨개질은 정말 신세계였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손가락에 감겨있는 실의 느낌과 바늘의 움직임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 편물이 품에 들어왔다. 나의 안과 밖을 소란스럽게 했던 모든 것들이 뜨개질하는 동안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내가 뜨개질하는 시간을 사랑하게 될 것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목도리를 쉽게 완성한 이후, 여러 가지 도안들에 도전했다. 모자, 가방 그리고 스웨터까지. 과거에는 신의 영역처럼 보였던 옷까지 완성하고 나니 엄청난 성취감이 찾아왔다. 도안을 읽어가며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모든 과정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그리고 뜨개질의 진정한 매력은 ‘정직함’이라는 것 또한 깨달았다. 1단을 뜨면 1단만큼, 10단을 뜨면 10단만큼 자란다.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지는 결과가 도출되는 것이다.


그동안의 나의 노력을 되돌아보았을 때, 이렇게 정직한 결과를 만들어낸 적이 있었던가? 과거의 나는 항상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고 설령 뛴다고 해도 러닝머신 위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전공으로 삼고 있는 것이 실력의 향상이 체감되기 어려운 분야여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의 노력이 가시화된다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더 기분 좋은 일이었다.


동시에 실수한 부분을 명확히 확인할 수 있고, 바로 고칠 수 있다는 것도 내가 뜨개질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일들이 무엇이 잘못된 부분인지 확인할 수 없는 수수께끼같이 지칠 때, 뜨개질은 유일하게 답지와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주었다. 편물에서 잘못된 코가 보이면 풀고 다시 뜨면 된다. 사실 다 풀 필요도 없이 그 줄에 있는 코들만 빼내어 수정하면 없던 일이 된다. 인생의 모든 일들도 이렇게 쉽게 해결되면 좋을 테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 막막해질 때도, 언젠가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이미 한번 경험해보았으니 말이다.


내가 정말 두려워했던 진정한 목표 없는 미래는 오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뜨개질하며 보내는 느긋한 오후를 가질 수 있는 사람 되기’라는 목표를 얻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너무 소박하다고, 그게 무슨 인생의 목표냐며 비웃을 수 있겠지만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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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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