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괴물과 투쟁하다 괴물이 되어버린 - IS GOD IS

연극 IS GOD IS 리뷰
글 입력 2022.04.26 14:44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본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연극을 보고 난 뒤 니체의 명언이 떠올랐다. 이 연극은 니체의 말처럼, 괴물 아버지에게 복수하려다 그 안에 잠식돼버린 쌍둥이의 이야기다.

 

쌍둥이 아나이아와 러신은 각각 얼굴과 등 쪽에 화상 흉터를 달고 있다. 둘은 그간 죽은 줄만 알았던 엄마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간다. 그러자 엄마로부터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빠가 엄마의 몸에 불을 질러 극심한 트라우마를 입혔으며, 그 사건으로 인해 자신들도 화상을 입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충격도 잠시, 곧 쌍둥이는 엄마로부터 아빠를 죽이라는 사주를 받고 복수를 위해 떠난다. 그 과정에서 아빠와 관련된 여러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들이 심기를 거슬리게 할 때마다 살인하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과연 쌍둥이는 아빠와 재회해 엄마의 복수를 제대로 이행해나갈 수 있을까. 관객은 그 점에 주목하며 그들의 여정을 따라가게 된다.

 

 

KakaoTalk_20220425_155759603_01 (1).jpg

 

 

 

가부장제하에 뿌리 깊게 드러나는 이분법적인 권력 구도



연극을 보며 가장 눈에 띄었던 점은 내내 '가부장적이고 수직적이며 여성 편력이 있는 폭력적인 남성상을 가진 이들'이 거듭 등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왜 엄마 몸에 불을 질렀냐는 아나이아의 질문에 “엄마가 자신을 안 안아줬다”라는 사실을 이유로 제시하는 아버지가 있는가 하면, 본인에게 이래라저래라하지 말라고 지적하거나 끊임없이 가르쳐대는 '홀'씨가 있었다.

 

이렇게 기성세대에게서 보이는 가부장적인 체계는 아들들을 통해 대물림되는 양상을 띠기도 했다. 이때의 아들들이란 아나이아와 러신의 아빠가 재혼해 낳은 남자 쌍둥이를 말한다. 남자 쌍둥이는 ‘엄마가 아줌마 같아서 너무 싫다’라며 본인의 엄마를 끊임없이 얕보고 비난하는 경향을 보인다. 더불어 '오늘 나갈 거야'라는 엄마의 말에 특정 부인을 언급하며 '티타임이라도 가지려나 보지?'하고 비꼬기까지 한다. 이들의 행각은 최근 ‘맘충’이라는 엄마를 비하하고 얕보는 신조어를 떠오르게 했다. 한없이 여성 혐오적인 시각을 탑재한 이들로 보였다.


남자 쌍둥이의 이러한 시각은 아나이아와 러신이 집으로 무단침입해 왔을 때, 그들을 '스트리퍼'라고 손쉬운 결론을 내리며 좋아하는 데서 정점을 찍는다. 그중 한 명은 러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수용하며 “예쁜 애가 하는 말이면 다 괜찮아”, “예쁜 애는 내꺼야”라는 식의 발언을 일삼는다. 페미니즘이 대두되기 이전, 인터넷이나 미디어에서 여성을 관음증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마치 숭배해야 할 만한 아름다운 몸이라는 식의 특정 프레임에 가두어 재현해오곤 했다. 여기서 남자 쌍둥이는 그러한 미디어의 폐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특정 시각으로 쌍둥이를 바라보는 셈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러신이 아나이아를 두고 "얘 남자친구도 있어요"라고 소개했을 때, 쌍둥이의 엄마가 "남자친구 말고 또 뭐가 있는데?"라고 곧바로 되물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이는 남자를 동반해 본인을 소개하는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깃들어 있는 것으로 추측한다. 즉 가부장제가 뿌리 깊은 가운데, 본인을 어떤 남자를 경유하는 일 없이 자신 그대로 소개하고 담아내기를 바라는 엄마의 바람이 내재해 있는 듯 보였다는 얘기다. 엄마는 남편이 저지른 끔찍한 방화범죄의 피해자이며, 그 덕에 평생을 트라우마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 심정이 이해가 갔다.

 

 


타인의 심연, 어쩌면 죽을 때까지 알 수 없는



엄마로부터 살인을 사주받았을 때 아나이아와 러신은 심히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들은 거듭 '어...'하는 반응만을 보이다 이내, "이제 죽을 때도 다 된 마당에 평화롭게 용서하는 것이 어떻겠냐"라며 엄마를 설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엄마는 온몸을 둘러싸고 있는 화상 흉터 자국을 보여주며 자신에게 '평화는 없다'고 말한다. 그 충격에 쌍둥이는 기어이 엄마의 임무를 수락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엄마의 입장에 온전히 이입하지 못했다. 그나마 러신은 별 거부감 없이 엄마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려는 듯 보였으나, 그것은 엄마의 입장에 이입해서라기보단 '신에 비견되는 '엄마'라는 절대적 존재가 준 임무'이므로 의무적 차원에서 수행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들이 온전히 엄마의 입장에 이입하지 못하는 것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결속되었을지라도 엄마 역시 타인인데다, 사람은 본인이 직접 경험하기 이전에는 그 감정을 절감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비단 이들뿐만 아니라 남자 쌍둥이의 엄마 (극 중 이름이 없는 관계로, 편의상 A라고 칭한다.) 역시 그런 경향을 보였다. 이는 A가, 자기 남편이 방화를 저지른 탓에 한 가족이 극심한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 나온 반응에서 드러난다. "어머 어쩌다 그렇게 됐니"라는 안일하고 손쉬운 발언 말이다.

 

여기서 쌍둥이는 A에게 '당신도 알지 않았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A로부터 본인은 까맣게 몰랐으며, 오히려 남편은 쌍둥이가 죽었다고 전했음을 밝힌다. 그러나 때로 무지는 죄가 된다. 비극의 희생자인 쌍둥이에게 그것은 한낱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만 보아도 그렇다. 또 A가 남편의 행각을 몰랐는지 알았는지는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저 이전에는 몰랐을지라도 쌍둥이를 통해 알게 됐다면 적어도 그렇게 좌시해서는 안 됐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A는 쌍둥이들에게 진주 목걸이를 건네는가 하면, "사람은 누구에게나 본인의 삶에 책임이 있는 건데, 너네의 엄마는 스스로 간수하지 못한 것"이라는 선 넘는 발언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는 남편의 가해 행위는 본인과 무관하다고 여기고 그의 행각을 가벼이 여기며, 오롯이 쌍둥이에게 책임을 돌리는 이기적인 태도다.

 

쌍둥이는 그제야 버튼이 눌린다. 이때 그들에게서 '어'하는 반응이 터져 나온다. 이는 앞선 장면에서 엄마가 살인을 사주했을 때와 동일한 음절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어...?'라는 짧은 음절 뒤에 '미친 짓'이라 결론을 내렸다면 이번에는 깊은 분노에서 기인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이는 본인들이 경험할 때야 비로소 타인에게 공감하고 아픔을 절감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준 대목인 셈이다. 그러는 한편, 인간은 '본인은 그러한 불행을 겪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안전장치를 탑재한 상태에서만 타인의 아픔을 가볍게 넘길 수 있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기도 했다.

  

 

 

살인이라는 상징적 수단을 통해 이 사회의 문제를 가시화하다.


 

한편 쌍둥이들은 사유가 어찌 됐든 간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점을 짚어본다. 살인은 엄연히 하면 안 되는 것이고, 당연히도 용서받지 못 할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위가 맞다. 그런데 해당 연극은 그들의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극심한 폭력의 피해자인 이들의 복수극이라는 점에 좀 더 초점을 맞춘 것처럼 보였다.

 

쌍둥이는 한 번쯤 이 땅을 제대로 밟고 서고 싶다고 했다. 이는 투쟁을 통해 더 높은 곳을 점하고 싶다는 욕망을 담는 한편, 늘 폭력에 깊이 노출돼 있어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대로 삶을 꾸려나갈 수 없는데 대한 한탄이기도 했다. 나아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누릴 기본적 권리를 되찾고자 하는 욕구였던 셈이다. 이런 점에서 해당 연극에서의 '살인'은 사회에 만연한 폭력들을 좀 더 가시화함으로써 이들의 이야기에 더 귀 기울이길 바란다는 어떤 상징적 도구로 이용된 것은 아닐까 싶었다.

 

더하여 연극은 이들의 살인을 통해, '폭력을 폭력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두고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현시대에서는 폭력적 상황에 대해 미러링으로 맞서는 경우가 있다. 이는 극단적이라며 비난받기도 한다. 그러나 앞서 말한, 평화는 가해자의 것이라는 엄마의 말을 떠올려본다. 평화라는 단어는 나한테는 그러한 불행이나 위기가 닥쳐오지 않을 것이라는 모종의 안전장치가 존재할 때를 전제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가해를 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평화라는 단어는 쉽사리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물론 폭력을 폭력의 방식으로 대응하는 게 잘못이라면 잘못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을 기준으로 이들의 행위를 다시금 살펴본다. 그러면 수단의 잘잘못이나 옳고 그름을 논하기 이전에, 그것을 통해 들추어내려고 했던 이 사회의 비정상성이나 폭력성을 먼저 살펴야 한다는 주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괴물을 단죄하려다 괴물이 되어버린



그러나 이를 근거로 이들의 행위를 결코 정당화할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연극은 쌍둥이가 살인을 거듭하는 상황을 두고 어떤 윤리적 질문을 내던지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못이 없으니 죽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아나이아와 “세상에 잘못 없는 사람은 없다”라며 모두를 말살시키려는 '러신' 사이의 갑론을박을 통해 그것이 드러났다.

 

'세상에 잘못 없는 사람이 없다'라는 러신의 말은 일견 일리가 있다. 직접적 위해를 가한 것은 아버지였을지라도, 모든 것을 쉬쉬하고 감싸고 옆에서 종용한 이들 역시 방관 죄를 저질렀다는 점에서는 가해자와 동일선상에 있다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른 것은 명백한 살인이고 그것은 올바른 방식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목해본다.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래도록 들여다보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들은 물론 처음에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가부장제 아래 수직적이고 폭력적인 언사와 행위를 일삼는 집단)를 죽이고 복수해달라는 부탁하에 그러한 일들을 벌여왔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러신은 각종 이유를 붙여가며 살인을 저질렀다. 즉, 수단이 목적을 압도하고 나중에는 살인을 위한 살인을 저지르는 광경에 이르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니체의 말처럼 괴물을 잡으려다 괴물이 되어버린 이들의 기록으로도 읽어낼 여지가 있겠다.

 

마지막에 러신이 불에 타는 장면은 이러한 점에서 의의가 있다. 대개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에서 악은 처단되고 형벌을 받아야 앞의 서사들이 납득이 된다. 그러므로 극이 러신을 처단하는 구조로 귀결되는 것은 필연적이었으리라.

 

 

 

초월적 존재를 호명하거나 본인을 초월적 존재로 상정하거나



사람은 무언가 자의로 할 수 없는 일이 있을 때 신을 호명한다. 여기서 엄마를 계속해서 신으로 부르는 것은 말 그대로 엄마가 본인들을 낳아준 데서 일종의 신이라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들로 점철된 이 사회에서 동아줄을 잡듯 부른 것으로도 보인다. 이렇게 인간은 초월적 존재를 호명함으로써 무력함을 극복해나간다.

 

그러는 한편 현실에 대항해 본인을 초월적 존재로 두는 경우도 있다. 아나이아가 그러했다.

 

“난 나 못생긴 거 맘에 들어. 멍청한 사람 상대할 필요도 없고 길에서 나한테 전단지 나눠주는 사람 한 명도 없어. 초능력자가 된 거지.”

 

이는 자신의 중심에서 세상을 재단함으로써 이 사회의 시선을 새로이 규정한 것이다. 자기 맘대로 좌우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무력감을 본인을 초월적 존재로 상정하는 등의 자기 암시를 통해 이룩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자신이 배척당하는 이유는 다른 인간들이 열등해서라는 명제가 성립되게 된다.

  

한편 아나이아의 이러한 사고가 깨어지는 순간이 바로, 이 세상에 만연한 차별을 주조하는 대상을 전부 다 죽임으로써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음을 알게 되면서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단번에 자각한다. 이때 ‘아나이아는 눈을 피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을까, 내다 본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내다본다”는 표현은 가장 위에 위치한 집에서 아랫집들을 내다본다는 물리적 차원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지만, 미래까지도 두루 내다본다는 시간적 차원의 중의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사유한 결과 쉽사리 달라지지 않을 것임을, 그 암담한 현실을 아나이아는 그 순간에서야 깨달았으리라.

 

그래도 아나이아는 믿고 싶었을 것이다.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줄 누군가와 임신한 자신이 낳을 아이를 잘 돌봐줄 누군가가 단 한 명이라도 있다고. 그러나 엄마조차 본인에게 관심 없고 그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적 대상으로서 아나이아를 바라본다는 점에 주목해본다. 결국 아나이아는 그 긴 여정을 겪어왔으나 그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닌, 엄마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을 것이다. 더불어 남자 쌍둥이들이 아버지의 전철을 밟았듯, 자신의 아이가 태어나면 이러한 사회의 문제들이 대물림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환멸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아나이아는 엄마도 죽인다. 여기서 초월적 존재인 신을 살해하는 것은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배반함으로써 본질적으로 해결되는 것 하나 없는 이 세상에 반기를 든다는 상징인 셈이다.

 


KakaoTalk_20220425_155759603_04 (1).jpg

 

 

 

마치며



연극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다. 사람은 입체적인 동물인데 그런 점을 간과하고 그저 인물들의 더럽고 추악한 면면만을 담아내는 데만 그쳤다는 점이었다. 이는 물론 연극의 메시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였음을 안다. 뿌리 깊은 가부장제에서 비롯된 누군가의 수직적인 면이라든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군상을 재현하려는 의도 말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지점은 연극을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게 했고,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한계점을 낳은 게 사실이다. 가령 엄마의 임무를 완수한 아나이아가 병실에 있는 엄마를 찾아갔을 때 엄마는 정작 아나이아의 말에 일절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점이 그러했다. 아무리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이 무용해져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어졌다고 할지라도, 과연 이렇게까지 매정하게 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게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그간 아나이아 역시 범죄의 희생자로서 화상을 입고 살아간 것을 안쓰럽게 여겼으니 말이다. 엄마의 감정선을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연극이 이 사회의 뿌리 깊은 폭력과 계급 간 갈등을 도식적으로 명확히 잘 보여주고 가시화한 것은 사실이다. 더불어 미국에서 누군가를 디스하는 장르인 '힙합'을 연극의 곳곳에 배치하고 이들이 어떤 일을 벌일 때마다 비트에 맞추어 리드미컬하게 전개한 것은, 그 자체로 어떤 투쟁과 단죄의 상황을 벌이고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더불어 욕설을 가감 없이 내뱉는다든가, 중간중간 유머와 위트를 삽입함으로써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이러한 연출 방식이 훌륭했다고 말하고 싶다.

 

 

*제목은 니체의 명언을 변용하였습니다.

 

 

[추예솔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이름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
65818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E-Mail: artinsight@naver.com   |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Copyright ⓒ 2013-2022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