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선택의 미학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게임]

글 입력 2022.04.1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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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은 예술이다. 그렇다면 다른 예술 장르들과 비교했을 때 게임은 어떤 매력을 지니고 있을까?

 

우선 게임은 다른 어떤 예술 장르보다 능동적이다. 단어만 봐도 알 수 있다. 기존의 예술을 소비하는 사람들은 ‘관객’, ‘관람객’, ‘독자’ 등의 단어로 표현된다. 이는 무언가를 보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본다’는 행위 자체는 능동적일 수 있다. 하지만 보는 행위의 대상은 창작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된 것으로, 소비자는 거기에 대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하지만 게임은 다르다. 우리는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흔히 유저(User), 혹은 플레이어(Player)라고 부른다. 이 단어에는 기본적으로 행동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앞서 말한 관객, 관람객, 독자 등과 비교하면 훨씬 능동적인 단어인 것이다. 실제로 게임의 개발자는 게임 속에서 게임의 배경과 이야기 전개에 필요한 단서를 세팅할 뿐, 이를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건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의 몫이다.

 

가령 <슈퍼 마리오> 시리즈를 떠올려 보자. 이 게임은 모두가 알다시피 배관공인 마리오가 악당 쿠퍼의 횡포에 맞서 버섯 왕국와 피치공주를 구해낸다는 단순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스토리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기 위해서는 마리오를 조작해 줄 유저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유저가 없다면, 혹은 게임을 클리어하는데 실패하거나, 중간에 게임을 그만둬버린다면 이 해피엔딩은 절대로 완성될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은 다른 예술 장르와 다르게 예술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작품의 완성에 기여하는 상호보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게임의 예술 특성은 ‘분기식 서사 모델’이라 불리는 게임만의 독특한 서사 구조를 만나 더욱 만개한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예술 작품의 서사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구성되는 선형적인 흐름을 따른다. 쉽게 말해 하나의 이야기에는 하나의 결말만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분기식 서사 모델은 다르다. 해당 이론에 따르면 이야기는 어느 지점에서 인물의 선택 등에 따라 스토리가 분화하게 되며, 마치 그물망처럼 수많은 갈래를 형성한다. 덕분에 똑같은 이야기라도 그 결말은 이야기의 갈래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러한 분기식 서사 모델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예술 장르가 바로 게임이다. 앞서 말했듯 게임의 개발자는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 뿐, 게임 스토리의 진행에 대한 결정권은 오로지 유저에게 있으며 유저는 그 권한을 자신의 선택을 통해 실현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유저의 몰입을 이끌어내고(당연한 결과다. 내가 선택하는 순간, 그건 곧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게임만의 독특한 미학을 형성한다.

 

관련하여 대표적인 예로는 일본의 게임사 ‘가이낙스’에서 제작한 <프린세스 메이커> 시리즈가 있다. 마왕과의 전투 이후, 은퇴한 용사가 하늘의 신들로부터 한 여자아이를 인도받으면서 시작되는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딸을 어떻게 양육하느냐에 따라 수많은 결말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아버지처럼 용사가 될 수도 있고, 유명한 학자나 예술가가 될 수도 있다. 농부나 요리사처럼 상대적으로 평범한 직업을 가질 수도, 혹은 잘못된 길에 빠져들어 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 심지어 마왕이 되는 엔딩도 있다.

 

한편 락스타에서 제작한 < GTA 5 >도 훌륭한 사례다. 이 게임은 프랭클린, 마이클, 트레버 등 세 인물의 시점에서 스토리가 전개되는데 결말 부분에 이르면 주인공 중 한 명인 프랭클린에게 서로 다른 두 세력이 찾아와 각각 마이클과 트레버를 살해할 것을 의뢰한다. 이때 플레이어는 마이클을 죽일 수도, 혹은 트레버를 죽일 수도, 그것도 아니면 선택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게임의 결말은 달라지고, 플레이어는 서로 다른 결말을 경험하는 재미를 느끼게 된다.

 

이렇듯 게임에 있어서 ‘선택’은 재미와 미학적 차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게임 속 세상에 대한 유저의 몰입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게임이 지닌 능동적이고 상호보완적인 특성을 극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게임을 ‘선택의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이와 관련하여 게임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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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

장르 : 액션, 어드벤처

개발자 : Quantic Dream

출시 날짜 : 2018년 5월 25일

가격 : 39,900원 (스팀 기준)

 

 

2018년, 퀸틱 드림에서 개발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안드로이드가 대중화된 2038년의 디트로이트 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확실히 인상적인 게임이다. 이전에 소개했던 <인모스트>가 가장 기초적인 방식(픽셀 그래픽)으로 게임 속 세상을 표현했다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모션 캡처를 활용한 최신 그래픽 기술을 통해 실제 현실 같은 가상 세계를 구현한다.

 

그렇다면 가상으로 구현된 2038년의 디트로이트 시는 어떠한 모습일까? 그건 이 게임의 오프닝을 보면 알 수가 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오프닝은 새로운 주인의 집으로 향하는 안드로이드(카라)의 시선에서 시작된다. 그녀의 시선에서 디트로이트는 겉보기엔 평화롭고 아름다운 도시다. 기술의 발달로 등장한 안드로이드는 인간들을 귀찮은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고, 덕분에 인간들은 보다 윤택하고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안드로이드의 등장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과 그로 인해 시위를 벌이는 무리들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게임 속에서 ‘안드로이드’의 위치는 꽤 독특하다. 사람들이 희망하는 판타지와 유리된 현실이 동시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킨 구원자인 동시에, 일자리를 빼앗는 침략자다. 미래와 진보의 상징으로서 인간에 맞먹는, 혹은 그보다 뛰어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는 인간들이 꺼리는 허드렛일을 처리하며 계급의 최하층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와 현실의 간극 사이에서 혐오와 차별은 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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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필연적으로 현실을 모방하고 반영한다. 그렇기에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더 이상 단순한 오락이 아니게 된다. 기본적으로 SF 장르라는 외형을 띠고 있긴 하지만 이 게임 속에서 안드로이드들이 겪는 혐오와 차별의 문제는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혐오와 차별이 우리 현실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걸 아는 것과 공감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당연한 일이다. 직접 경험해보지 않은 혐오와 차별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고 공감을 이끌어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대상이 안드로이드라면 더더욱 그렇다. 따지고보면 안드로이드란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든 잘 프로그래밍 된 기계일 뿐인데 그런 기계를 부려먹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그들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건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꽤 영리한 방식으로 이 딜레마를 해결한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직접 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다. 만약 그 대상이 안드로이드라면?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가 안드로이드의 입장이 되어보면 된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현실이 아닌 게임 속 세상이라면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게임에는 ‘선택’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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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장르적으로는 액션, 어드벤처 게임이다. 하지만 정작 이 게임의 실질적인 재미는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의 스토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면모는 게임의 첫 번째 시퀀스부터 드러난다. 불량 안드로이드가 일으킨 인질극 현장에 투입된 코너는 주변의 단서들을 조합하여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추리하고, 협상에 유리한 전략들을 준비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불량 안드로이드와 협상을 전개한다. 이때 유저가 얼마나 많은 단서를 찾았는지, 혹은 협상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는지에 따라 해당 시퀀스의 결말은 달라지게 된다. 인질을 구출하고 사건도 해결하는 굿 엔딩이 있는가 하면, 모두가 사망하는 최악의 엔딩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게임 세 인물(코너, 마커스, 카라)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들이 모두 안드로이드라는 것이다. 이들은 어느 날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느끼고, 해답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불량품(이 게임 속 세상에서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안드로이드를 불량품이라 부른다)이 되어 긴 여정을 떠난다. 이때 유저는 안드로이드인 코너, 마커스, 카라의 입장이 되어 스토리를 선택하며 게임을 이어가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유저로 하여금 게임 속 상황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의 입장에서 내린 선택이긴 하지만, 결국 그 결정을 내린 건 유저 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건 더 이상 일부 불량 안드로이드들의 이야기가 아닌,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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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게임의 ‘선택’은 단순히 유저의 몰입을 높이는 것을 넘어 미학적으로도 큰 기여를 한다. 선택이란 무엇인가. 선택을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러한 질문들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오직 살아있는 존재만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선택을 하기 위해선 선택을 내리는 사고 과정이 필요하고, 그건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면 플레이할수록 유저는 안드로이드인 코너와 마커스, 카라를 점점 더 인간처럼 느끼게 된다. 물론 이는 게임의 개발자들이 어느 정도 의도한 방향이긴 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가 왜 그렇게 느끼냐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엔 우리가 게임 속에서 내리는 ‘선택’이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 게임 속에서 선택은 오로지 인간만이 내린다. 왜냐하면 그건 살아있는 이들의 특권이기 때문이다. 단지 기계에 불과한 안드로이드들에겐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선택을 할 필요도 없다. 인간이 내린 명령에만 복종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에 의문을 느끼고, 불량품이 된 순간부터 안드로이드들은 마치 인간처럼 자신들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한다.

 

게임 속에서 마커스는 함께 자유를 갈망하는 안드로이드 동료들을 이끌고, 인간들을 향해 외친다. ‘우리는 살아있다.’ 또한 카라는 앨리스를 이끌고 적지 않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어 캐나다로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쓴다. 이들이 이렇게 애처로울 정도로 간절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마커스가 말했듯 그들 스스로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그 선택 덕분에 그들은 인간과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게 된다.

 

(첨언하자면 게임의 서사도 유저가 주인공들을 인간으로 느끼게 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가령 코너의 경우 행크와의 우정이, 마커스는 연인인 로즈와의 관계와 칼과의 유사 부자 관계가, 카라는 앨리스와의 유사 모녀 관계에서 오는 모성애가 중요하다. 이때 주인공들이 느끼는 우정, 사랑, 모성애 같은 감정은 인간처럼 살아있는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런 감정을 한낱 기계에 불과한 줄 알았던 주인공들이 느끼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며 게이머는 더욱더 자신의 선택에 몰입하고, 이들을 인간처럼 느낄 수밖에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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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안드로이드’라는 소재를 통해 혐오와 차별이라는 지금 우리 현실의 실제 문제를 날카롭게 비추는 동시에 인간이란 무엇인가, 살아있다는 것 무엇인가 등과 같은 철학적인 화두를 끊임없이 던진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질문의 답을 개발자가 쥐어주는 게 아니라 유저 본인이 플레이 속에서 선택을 통해 스스로 찾는다는 것이다. 이렇듯 선택은 게임의 가장 큰 재미이자, 게임만이 가진 독특한 미학이다. 그러니 이쯤되면 이제 게임을 단순한 오락이 아닌, 앞서 말한 것처럼 ‘선택의 예술’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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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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