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인생은, 식사를 챙기는 것에서부터. [음식]

요리하고 먹을 때만큼은 행복해
글 입력 2022.04.05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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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와 '줄리 앤 줄리아'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리가 좋다. 단지 먹는 행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정성스럽게 요리해서 맛있게 먹는 과정이 좋다. 학생 때도 언젠가부터 저녁과 주말의 식사는 스스로 차려 먹었다. 큰 이유는 아니었다. 부모님이 차려주시는 식사는 매번 같았고, 나는 같은 음식에 쉽게 질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같은 음식을 여러 번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취 3년 차, 덕분에 매 끼니를 차려 먹는 귀찮은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요리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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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가장 만들기 어려운 요리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보늬밤(속껍질을 남겨놓은 밤조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영상으로 보기만 해도 손이 많이 가고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릴 것 같은 요리. 그러나 시간을 많이 들인 만큼 그 계절의 향이 가득 담긴 요리. 요리 영화에 나오는 음식들은 한 번씩 만들어 보는 편인데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 미루고 미루다가 작년 가을의 생각이 많던 어느 날, 일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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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며 속껍질을 손질하던 사진.

(완성될 시간을 미리 알았다면 이렇게 느긋할 수 없었을 텐데...)

 

 

익힌 밤이나 조림을 아주 선호하는 편은 아니라 딱 800그램만 했다. 1킬로는 너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600그램만 하기엔 너무 적지 않나. 벌레 먹은 밤을 빼고, 껍질을 다 손질하고 난 무게는 660그램 언저리였던 걸로 기억한다. 만들고 네 달을 다 채워가던 때에 마지막으로 남은 두 알을 먹었으니 딱 적당한 무게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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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껍질과 속껍질을 까고, 물에 불리고, 끓이고, 또 속껍질을 까고, 끓이고, 또 까고, 끓이고. 복잡한 과정을 세 번 반복한 보늬밤은 장장 아홉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불리는 과정을 짧게 거쳐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만든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끓일 때 좋아하는 홍차와 위스키를 조금 넣어준 덕에 적당히 감칠맛이 나는 보늬밤이 되었다. 만든 직후에 겉이 약간 뭉개진 것을 먹어보았는데, 왜 굳이 번거로운 작업을 반복하는지 이해되는 천상의 맛이었다.

 

요리와 섭취에서 설거지로 이어지는 과정은 나만의 기분 환기법이다. 생각이 지나치게 많은 편인 나는 매 끼니 요리와 설거지를 하며 생각을 날리고 기분을 환기한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의 주인공 혜원도 비슷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혜원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듯 시골로 내려온다. 며칠만, 일주일만, 이 겨울만, 머무르려고 했지만 결국 일 년을 채운다.

 

그게 아니고... 나 배고파서 내려왔어.

진짜 배고파서.

 

다른 게 아니라 정말로 배고파서 내려왔다는 혜원의 말에 공감이 갔다. 단지 속을 채우기 위해 먹은 음식은 마음의 허기까지 채워주진 못 했을 거다. 인스턴트 음식이 문제가 아니다. 같은 음식이라도 나를 위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시키고 그릇에 덜어 먹는 음식과 먹는 것에 급급해 입으로 직행하는 음식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혜원이 계절을 여실하게 느끼며 음식을 차려 먹은 일 년은 생각을 환기하고 마음의 허기를 채우며 다음을 도약하기 위한 시간이었다. 엄마와 함께한 시골집의 추억과 요리가 혜원만의 쉴 수 있는 '작은 숲'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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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만들기 어려웠던 다른 음식을 떠올려 보면 영화 '줄리 앤 줄리아'의 뵈프 부르기뇽이 생각난다. 재작년 크리스마스에는 일을 하러 가야 했기 때문에 끝내주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준비한 음식이 뵈프 부르기뇽(프랑스식 소고기 스튜)과 가리비 스튜였다. 자취방에는 오븐이 없어 굽는 과정까지는 거치지 못했다. 국물이 많은 뵈프 부르기뇽이 되었지만 와인 베이스의 스튜가 맛이 없기는 힘들었다.

 

요리가 왜 좋은지 알아?

직장 일은 예측불허잖아, 무슨 일 생길지 짐작도 못 하는데 요리는 확실해서 좋아.

초코, 설탕, 우유, 노른자를 섞으면 크림이 되거든. 마음이 편해.

 

'줄리 앤 줄리아'의 줄리는 매일같이 밀려오는 전화를 처리하는 상담원이다. 그는 줄리아의 요리책에 나온 524가지 요리를 365일 안에 끝내기로 하고, 프로젝트를 블로그에 기록한다. 요리에 과하게 집중하는 바람에 남편과의 관계에 소홀해지기도, 요리를 망치면 크게 절망하기도 하지만 줄리아의 요리책을 따라 걸으며 인생의 즐거움을 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책의 저자 줄리아는 줄리의 블로그에 불쾌함을 내비치고 줄리는 매우 실망한다.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프로젝트를 끝마쳐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굉장히 의아했다. 곱씹어 보니 줄리는 책을 통해 요리뿐만 아니라 스스로 인생을 헤쳐나가는 법도 배웠기 때문에 타인의 반응은 상관이 없었던 것 같다.

 

음식은 우리의 삶을 일으켜 세운다. 때로는 인생의 휴식이, 즐거움이 된다. 몸과 마음이 아플 때 식사를 거른 기억 때문에 입맛이 없으면 상태를 점검해보고, 무기력한 날에도 한 끼는 꼭 먹으려고 노력한다. 매 끼니가 쌓여서 나를 나아가고 살아가게 한다.

 

인생은, 식사를 챙기는 것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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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예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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