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책가도에 담긴 조선시대의 이념과 욕망 [미술]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글 입력 2022.04.01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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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입시를 준비했던 고등학교 때, 국민대학교가 주최하는 조형실기대회에 나간 적 있다. 내가 응시한 과목은 기초조형으로, 관찰력과 창의적인 표현력을 중요하게 본다. 날짜 및 시간에 따라 각기 다른 문제가 나오는데, 내가 응시한 기초조형(B)에는 주어진 여덟 가지 물체로 책가도를 그리라는 문제가 출제되었다.


이 대회의 독특한 점은 보통의 실기대회처럼 학생이 준비물을 가져가는 게 아니라, 학교가 시험 당일 제공하는 재료만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학원에서 몇 차례 연습해 보았음에도 주어진 재료에 숙달치 못했던 나는 시험 시간 내 완성도를 채 끌어올리지 못하고 그림을 제출해야만 했다.


보통 그림을 망친 것 같으면, 현실 도피하듯 생각을 저 멀리 미뤄놓는 편이다. 그러나 시험장을 나온 나는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음에도, 책가도가 어떤 그림인지에 대해 자세히 찾아보았다. 여러 사물들이 다양한 시점으로 약간은 위태롭게 서있는 화면이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그날 그 시험장에서 나는 처음 본 그림에 홀딱 빠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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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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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가도

 


책가도(冊架圖)란 조선시대 민화 중 하나로, 책을 비롯한 여러 사물들을 그린 그림이다. 책가도는 책거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데, 여기서 ‘거리’란 구경거리, 볼거리처럼 어떤 일의 대상이나 소재를 뜻한다. 즉, 책거리란 책을 제재로 삼은 그림을 총칭하는 말이다. 책가도는 그중에서도 책가(책장)가 있는 그림을 묶어 부르는 말로, 책거리의 하위 개념에 속한다.


책가도는 다보각이라는 장식장에 각종 귀중품을 진열해 놓은 모습을 묘사한 중국의 다보각경(多寶格景)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 다보각경 또한 오늘날의 박물관이 만들어지기 전 르네상스 시대의 서양에서 진기한 사물을 전시하는 공간인 ‘호기심의 방’에 영향을 받았으니, 책가도는 동서양의 문화가 공존하는 그림 양식인 셈이다.


책 그림은 전 세계적으로 퍼져있지만, 조선처럼 책 그림이 한 시대를 풍미한 나라는 흔치 않다. 책가도는 어떻게 한국 회화의 한 장르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책가도의 유행은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정조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글 읽기를 즐기고, 학문을 추구한 정조는 어좌 뒤에 조선 왕조의 전통인 일월오봉도 대신 책가도를 놓음으로써, 자신은 물론 신하들에게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홍재전서」에서 “비록 책을 읽을 수 없더라도 서재에 들어가 책을 어루만지면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라는 말을 인용할 만큼, 정조에게 책가도는 그림으로나마 책을 가까이 두고자 했던 마음을 반영한 그림이다.


이 같은 유별난 책 사랑은 임금 개인에게만 적용되지 않는다. 성리학을 근본이념으로 하는 조선은 본디 문치주의를 중시하는 나라였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 얻기를 중시한 조선시대에 책은 출세의 상징이었다. 「고문진보」 속 “가난한 자는 책으로 말미암아 부자가 되고, 부유한 자는 책으로 말미암아 존귀해진다”라는 말처럼, 조선에서 책은 왕실과 선비, 서민 등 계층을 망라하고 사랑받았다.


책가도의 매력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왕실과 양반 사회를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만큼 그림이 화려하고 고급스럽다. 책가도는 장식 병풍으로 사용되었기에 대개 8폭, 10폭으로 그 크기가 크고, 등장하는 기물의 가짓수가 많다. 진짜 책을 곁에 둔 것처럼 보여야 했기 때문인지 표현 또한 매우 사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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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위 그림에서 보다시피 선명한 색채 대비가 돋보인다. 우선, 바탕을 이루는 책가는 흑색과 청색 등 어두운색으로 그려졌다. 이에 맞춰 화첩과 책갑(왼쪽 하단), 일부 자기 역시 녹색이나 감청색 등 짙은 색으로 칠해 책가와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그림의 1/3을 차지하는 서적은 미색으로 표현했다. 기본적으로 채도가 낮은 반면, 여의(왼쪽 상단)와 개완(중앙), 두루마기(상단) 등은 강렬한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둘째, 그림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살필 수 있다. 책가도에는 책뿐만 아니라, 문방구와 도자기, 장식품, 화훼 등 각종 사물도 함께 그려진다. 문예부흥기에 그려진 책가도는 대개 궁중화원들이 제작한 것으로, 일반 서민들이 쉽게 볼 수 없던 북경 도자기와 시계, 안경 등 진귀한 기물들이 다수 나타난다. 이를 통해 당대 상류층의 기호와 심미 의식을 엿볼 수 있다. 다양한 기물이 지닌 의미를 찾아보는 재미 또한 존재한다. 얼핏 사치품으로 보이는 공작 깃털과 산호는 관직과 지위를, 불수감(佛手柑)과 석류는 각각 다복과 다산을 상징한다. 서재에 두고 보는 그림이었던 만큼, 생활 속에서 잊지 않아야 하는 이상과 염원하는 소망을 각종 상징물에 담아냈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 시작한 책가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민간으로 확산됐다. 이는 책가도가 유행했던 조선 후기의 혼란스러운 시대상과도 관련이 있다. 서양의 사상과 문물이 들어오며 신분제가 흔들렸고, 호적을 사고파는 일 또한 빈번하게 일어났다. 돈으로 양반이 된 이들은 선비정신이 담긴 책거리를 통해 자신들의 양반다움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로써 책거리는 임금의 어좌 뒤에서 여염집 방문까지 오가는 그림 양식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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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화풍의 책거리는 병풍 규모가 작아짐에 따라 형식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이게 됐다. 우선, 화면 전체를 차지하는 책가 대신 작은 탁자들을 활용해 비교적 자유로운 구성을 취했다. 작은 화면에 보다 많은 것을 담기 위해 사물 간의 간격이 좁아지고, 개별적인 사물보다는 하나의 덩어리로 그려진 것이 특징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책의 비중이 줄고 문방구가 늘어 장식적인 성격이 강해졌다. 궁중에서 그려진 책가도가 문치를 하고자 한 정조의 이념에 따라 그려진 만큼 책이 주요하게 다루어진다면, 민화에서는 장수, 다산 등 길상적인 염원을 나타내는 사물이 많이 보인다.


셋째, 엄연한 동양화지만 서양화 같은 매력이 있다. 앞서 말했듯, 책가도 양식의 뿌리는 르네상스 시대 유럽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책을 주 소재로 삼는다는 점에서 완전히 토착화되기는 했으나, 기존의 조선 예술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백자와 청자에서 보이듯 조선의 미술품은 검소하고 깨끗한 선비 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책가도는 빽빽할 만큼 많은 사물과 화사한 색감, 부와 명예를 나타내는 각종 상징물로 가득하다. 물건을 가지고 노는 데 정신이 팔려 본심을 잃는다는 완물상지(玩物喪志)를 완전히 반하는 그림이 왕실에서부터 시작된 셈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장식성은 더욱 증가해, 책이 없는 문방도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문체반정의 열망이 담긴 책가도는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산물인 동시에 조선인들의 현실적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


책가도가 유행한 18-19세기는 조선에 서양 문물이 활발히 들어오던 시기였다. 그림 속에 수입품이 여럿 등장하는 것은 물론, 서양 그림을 받아들여 화풍에도 변화가 생긴다. 동양화와 서양화를 가르는 큰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시점이다. 서양에서는 소실점을 이용해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사용한 반면, 동양화는 화가의 시선이 이동함에 따라 시점이 달라진다.


그리고 책가도는 서양의 일점투시법과 다시점을 모두 만나볼 수 있는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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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그림은 조선 후기 활동한 이형록의 작품이다. 이형록은 사물을 고정된 눈높이에서 바라보는 투시 원근법과 광원을 의식해 채색하는 음영법 등 서양화법을 수용한 대표적인 화가로, 이전의 책가도 화풍에 비해 사실감이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이형록은 그림에 투시 원근법을 ‘완벽하게’ 적용하지는 않았다. 시선을 따라가보면 하나의 그림 안에 여러 개의 소실점이 공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이형록이 서양 화법을 어설프게 습득했기 때문일까? 나는 이 다시점이 다소 의도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책가도는 책장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시점이 두드러지는 그림이다. 책장은 기본적으로 공간의 깊이가 느껴지는 물건이지만, 뒤가 막혀있기 때문에 폭과 넓이에 제한이 있다. 즉, 원근법을 정확하게 적용하지 않아도 책가도가 가져야 하는 깊이감은 어느 정도 충족된다. 더구나, 폭이 넓고 평면인 병풍에 하나의 소실점을 적용할 경우 책과 기물이 많이 왜곡돼 본래의 형태를 드러내지 못할 수 있다.


서양화와 동양화의 시점 차이는 기술적인 면이 아니라, 사실성(재현)을 추구하는 서양과 주관성(체험)을 중시하는 동양의 철학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형록은 동서양의 세계관을 적절히 조화하면서도, 하나의 입체감을 만들어낸 훌륭한 화원이다.


이형록의 그림에서 눈에 띄는 점 한 가지가 더 있다. 책가를 이루고 있는 과감한 코발트빛이다. 책가도 중에는 유럽에서 중국을 거쳐 수입된 청색 안료를 사용한 작품이 더러 있다. 특이한 점은 나머지는 전통 안료를 이용해 그린 반면, 배경의 청색은 1850년 개발된 울트라마린 블루로 칠했다는 것이다. 이 신문물의 도입이 책가도를 전통적이면서도, 모던한 그림으로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렇듯 초기 고고하고 중후했던 책가도는 서양의 화풍과 결합해 모던하고 세련된 매력을 갖추게 되었다.


실기 시험에 응할 당시에는 책가도의 의미나 특징을 잘 알지 못했었다. 제한 시간 내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보이는 대로 사물을 배치하고 칠하기 급급했으니 좋은 결과를 받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이미 몇 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책가도에 대해 잘 알게 된 지금 다시 시험을 본다면 조금 더 잘 그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샘솟는다.

 

 

[임혜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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