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한강에서 판타지를 건져 올리다 [미술/전시]

글 입력 2022.03.28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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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강의 딸이다”

 

북한강과 남한강 두 물줄기가 경기도 양평에서 만난다. 두 물이 만난다고 해서 이름도 ‘두물머리’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 우리말을 한자어로 모두 바꿔 적었는데 두머리의 뜻을 그대로 적어 양수리(兩水里)가 됐다. 결국 양수리와 두물머리는 같은 뜻이다.

 

그렇게 하나가 된 강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통과해 김포반도에서 서해로 흘러 들어간다. 길이로는 한반도 전체에서 네 번째로 길고 대한민국이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영토에서는 두 번째로 긴데 유량으로 따지면 가장 많다. 짐작하듯이 바로 한강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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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은 우리말 ‘한가람’에서 비롯했다. 옛말 ‘한’은 ‘크다’ ‘한창이다’라는 뜻이며 강의 우리말이 ‘가람’이다. 즉 한강은 ‘큰 강’이라는 뜻이다.

 

고대부터 이 강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했는데 한강 유역의 농업생산력과 중국과의 해상 교역로를 확보하고 대동강 금강 영산강 낙동강 등 한반도를 흐르는 주요 하천과 서남해 해운을 한꺼번에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한강 유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시대부터 나라의 전성기는 누가 이 강의 중.하류를 차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됐다.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리키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도 한강의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억지를 좀 부리면 나는 이렇게 중요한 강의 유역인 서울 풍납동에서 태어났다. 내내 서울에서 자랐고 지금은 한강 하류의 끄트머리인 김포에서 살고 있다. 말하자면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강유역을 떠난 적이 없다는 말이다. 내가 한강을 좋아하는 건 운명과도 같은 일이라는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했다.


“한강과 판타지”

 

꿈결 같은 날이었다.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 노을을 볼 때인데, 그날은 빼곡하게 흐린 날이었다. 그래서 노을을 보겠다는 희망은 접고 편안한 마음으로 친구와 한강 나들이를 나설 수 있었다. 그런데 노을에 대한 상상을 접어 두고 간 한강은 의외로 ‘환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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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시간이 지나 어둠이 내려 앉은 한강의 차분한 모습에 흐린 날씨는 더 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일렁이는 물결에 반사되는 방화대교와 주변 불빛은 황홀경 그 자체였다. 사시사철 꽃향기가 퍼지는 개화산 옆에 있는 동네라는 뜻의 ‘방화(傍花)’가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이름으로 붙여진 이유가 새삼 이해가 됐다.

 

햇빛이나 달빛에 비쳐 반짝이는 윤슬은 아니지만 조명에 비친 물결의 모습은 말 그대로 물 위에 핀 꽃과 같았다. 그 순간이 좋았었다는 건 보통 지나고 나서 깨닫기 마련인데, 강을 옆에 두고 자전거를 타면서 이미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특히 빈티지 카메라로 찍은 물결은 그야말로 현실과 상상 사이 어디쯤에 자리잡고 있었다. 실제 풍경이라기엔 너무나 꿈 같아서 찍어 둔 사진과 영상을 여러 차례 다시 확인해야 했다. 그야말로 ‘판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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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흔히 몽환, 환상, 공상, 상상 등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번역된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작가 J. R. R. 톨킨은 “판타지는 현실의 극한적 왜곡이다” 라고 표현했다. 이렇듯 판타지는 현실과는 매우 다른, 비일상적인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게 기본이다.

 

그러나 비현실에는 현실이 포함되어 있다. 비현실적인 판타지는 역으로 현실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판타지 상태에 있다가 현실에서 마주하게 되면, 재미있게 본 웹툰이 드라마로 잘못 옮겨진 것처럼 구조적으로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점을 재료 삼아 작업을 한 작가가 바로 차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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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슬아의 망치 판타지”

 

차슬아는 한국의 조형예술 작가다. 다양한 생각들을 3차원으로 옮겨 오는 작품을 주로 만든다. 즉 상상으로만 갖고 있었던 이미지를 실제 물성으로 치환하는 거다. 작가는 치환된 작품을 직접 손으로 만져 무게를 느끼거나 재료의 질감을 느꼈을 때 오는 상상과 현실 사이의 차이를 관람 포인트로 잡았다. 따라서 그의 조형 작품은 직접 만져보며 작품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한다.

 

작가는 실망스러운 판타지가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고자 했다. 특히 스스로 손쉽게 다룰 수 있을 정도의 소규모 작업 방식을 통해 작품을 완전히 장악하는 작가로서의 통제력을 발휘한다. 차슬아는 <도구선택>이라는 작품을 통해 자연에서 가공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재료로 만든 원시적인 망치부터 상상 속의 인물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소유한 판타지 망치까지 모두 17개의 망치를 선보인다.

 

이 ‘망치 시리즈’는 원시 초보단계부터 고고학적 진화를 거쳐 판타지까지 연결되는 상상 속의 망치까지 망라한다. 행복하게도 관람객들은 각기 다른 이야기를 지닌 이 망치들을 조심스럽게 잡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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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만 망치일 뿐,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잘려진 팔을 다른 팔이 붙들고 있는 모습, 나무 손잡이에 박힌 쪼개진 빵의 단면, 또는 냉동 피자의 이미지 등이 망치의 모습으로 재탄생했다. 총 17개의 각기 다른 망치들을 만져보고 들어볼 때마다 다른 인물이 되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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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성격을 가진 작품을 만지고 느껴볼 수 있다는 점은 역설적으로 현실에 초점을 맞추게 한다. 가상의 망치를 들어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실제 망치는 어떨까다. 무게와 질감, 색깔 등 현실과 판타지를 계속해서 비교했다. 하지만 이내 현실은 잊고 작가의 상상력이 듬뿍 담긴 망치들에 집중했다. 능동적인 의지로 집중했다기 보다 집중’되었다’가 더 적확한 표현이다. 익숙하지 않은 비현실적인 요소들은 금세 현실을 이겨버린다.


이렇듯 판타지는 굳이 현실성을 내세우지 않고 작가가 창안한 맥락에 따라 흘러가면 된다는 특징이 있다. 그 결과물은 말도 안되는 거리감보다는 오히려 몰입을 낳는다. 판타지가 반드시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물론 현실이라는 개념 또한 판타지만큼 불확실하지만, 생물학적 생존이라는 측면에서 현실이 좀 더 중요하다는 가치평가는 가능하다.

 

정리하면 판타지는 우리 무의식의 표현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영역, 즉 무의식의 영역과 꿈의 세계를 가장 쉽게 반영한다. 결국 판타지란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의 꿈과 무의식 속에 그럴듯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세계다. 바꿔 말하면 판타지는 ‘모든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장르적으로도 제한이 없다. 음악, 미술은 말할 것도 없고 소설, 게임, 영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가능하다. 현실이 아닌 상황을 상징하는 의식적 행위로 기본적인 욕구나 갈망, 혹은 더 밑바닥의 무의식에서 기인할 수도 있다. 그래서 작품 자체는 현실적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니 한강에서 내가 상상하는 판타지를 한 움큼 건져 올린다고 해서 말이 안 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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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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