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웹툰 제목은 ‘정년이’라 해도: 부용이에게 ② [만화]

숨겨진 주인공이 보여주는 샛길
글 입력 2024.05.16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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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 작품의 이름이 '정년이'라 해도: 부용이에게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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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132화. 출처: 작가 SNS 계정 (@murmur_ireh)

 

 

부용이는 여성애자다. 그렇기에 웹툰 '정년이'는 퀴어 웹툰에 속하기도 한다.

 

여성 퀴어의 삶을 그린 작품은 이미 많지만, ‘정년이’가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이유는 여성 퀴어를 재현하는 방식이 흥미로운 작품이기 때문이다. '정년이'에서는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 레즈비언 여성의 삶을 여러 역사적 자료조사를 거쳐 제법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부용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는 여성을 좋아하지만 그것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레즈비언 여성을 훌륭하게 그렸다.

 

부용은 첫 등장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남성에 둘러싸여 등장하고, 이후에도 항상 이민형이라는 남성과 함께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 탓에 독자들은 처음에 그녀에게 숨겨진 퀴어니스를 발견하지 못한다. 굴절되어 나타나는 부용의 이런 모습에 혼란스러운 것은 독자만이 아니다. 이야기 속 인물들까지도 부용의 진실된 모습에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것은 부용의 집안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결말에 가까워지는 132화에서 가족 어른들은 부용의 결혼을 준비하며 ‘시집 안 간다고 바득바득 고집부리더니! 남편 잘 둬서 부용이는 호강하네. 미국엘 다 가고.’라며 이야기한다. 부용의 결혼 거부를 어린 때의 치기로 여기는 한편, 원치 않는 상대와 결혼해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을 ‘호강’이라 칭한다. 보다 현대적인 욕망을 품은 부용에게는 모욕으로 들릴 수밖에 없는 말이다.

 

한편 부용은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는 조숙하게 남자와 교제하고 여러 남자를 만나는 불경한 여자로 비친다. 이런 부용의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대한 학우들의 반응은 3부가 시작되는 91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매일 부용이 다니는 학교의 교문을 지키는 약혼남의 존재는 부용에 무성한 소문을 안긴다. 개중에는 멋진 남성의 에스코트를 받는 부용의 모습에 대한 부러움도 있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이 되겠다는 한 학우는 부용이 ‘여자의 앞길을 막고 있다’며 적대감을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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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121화. 출처: 작가 SNS 계정 (@murmur_ireh)


 

이렇듯 겉으로는 전통적인 여성상을 답습하는 듯 보이던 부용의 이야기가 자세하게 전개되기 시작하는 건 웹툰의 후반부부터다. 특히 121화부터 부용은 독백으로 자신에게는 여성애적 성향이 있음을 본격적으로 독자에 알린다. 이때 부용은 가정의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년 시절의 한 장면을 회상한다.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성향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는 유년 시절에도 젊은 여자 식모 ‘섭섭이’를 잘 따르고 ‘결혼하겠다’ 이야기할 정도로 항상 좋아했던 것. 다만 여기서는 그의 성적 지향은 진심이 아닌 듯 가볍게 여겨진다.

 

그러나 곧 학교 문예 동아리에서 만나게 된 오은심이 등장하고, 오은심과 권부용은 ‘S자매’관계(1910년대부터 인식되기 시작한 여성, 특히 여학생들 간의 우정을 넘어선 관계를 지칭하는 은어)였음이 밝혀진다. 이런 오은심에 대한 부용의 애정(집착)과 오은심의 배신으로 인해 겪는 상처, 그리고 가족이 정해준 결혼 상대 이민형에 대한 무관심은 노골적으로 그가 여성애적 성향을 가진 인물임을 보여준다.

 

‘정년이’가 한국의 옛 시대상을 그린 작품인 것을 고려하면 제법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부용의 퀴어성을 그리는데도, 부용의 성적 지향을 가볍게 받아들이거나 그저 대중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일축하는 독자들의 해석과 반응이 제법 많다. 그러나 웹툰은 그것을 현명하게, 우회하며 부정한다.

 

이는 작품 속 부용의 발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예를 들면, 이미 언급한 ‘섭섭이와 결혼하겠다’는 일화 외에도, 오은심과 함께하며 행복을 느끼며 ‘부드러운 머리칼, 교복에서 나는 아카시아 향기, 낭랑한 목소리… 여학생 너무 좋아. 평생 여학생 할래!’라는 속마음을 독자들과 공유한다. 그의 동성을 향한 욕망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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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114화. 출처: 작가 SNS 계정 (@murmur_ireh)


 

특히 이 ‘평생 여학생을 하고 싶다’는 대사는 이후 여성 주인공인 윤정년과의 로맨스 관계에서 직접 발화되며 독자에 유의미한 정보를 전달한다.

 

정년과의 관계를 진척하는 데 외부의 압력으로 인한 난항을 겪는 114화에서 부용은 여성 파트너와 거리를 두고 평생을 남성과 결혼하여 살기로 결심(체념)한다. 이때 이별의 이유를 알지 못하는 윤정년의 물음에 응하며 부용이 내뱉는 대사가 바로 ‘여자애는 여자애를 만나지만 여자는 남자를 만나. 남자가 필요해’이다.

 

마치 세뇌당한 것 같은 부용의 표정과 대사는 윤정년과 독자를 모두 당황케 한다. 이 장면에서는 부용이 단순히 ‘한때의 치기’, 혹은 ‘멋모르는 장난’ 내지는 ‘연애 예행연습’을 위해 여성을 상대로 로맨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나아가 이 장면은 그가 동성애자들에게 차별적인 사회의 현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으며, 권부용은 보수적인 사회를 살아가는 한 개인으로서 어떠한 스탠스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을 해왔음이 잘 드러나는 작품의 핵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상을 고려하면 부용이 결국 윤정년을 선택하는 결말은 다소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희망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용의 이런 고민을 짚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결말은 단순히 독자의 긍정적인 감정과 반응을 위한 것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탄탄하게 적립해 온 캐릭터의 특성에 기인한 선택에 따른 결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부용은 입체적인 인물이고, 이런 복잡한 캐릭터의 내면 구성에서 ‘정년이’의 탁월함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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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127화. 출처: 작가 SNS 계정 (@murmur_ireh)

 


단순히 퀴어의 삶을 그렸다는 점에서 웹툰 정년이를 주목하자는 것은 너무 막연하고 단순한 생각이다. 정년이의 가장 탁월한 점은, 퀴어니스가 겉보기엔 드러나지 않는, 다시 말해 미디어에서 그려내기 까다로운 ‘티 안 나는 퀴어’의 삶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음에 있다.

 

사실 ‘정년이’ 외에도 한국에서도 여성 퀴어를 다룬 작품은 꾸준히 나오고 있고, 그중에는 시대물도 제법 손을 채울 정도는 된다. 다만 퀴어를 정면에 소재로 내세우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 정도가 아쉬운 점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꼭 픽션이 아니더라도 퀴어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많다. 지난해 개봉한 <홈 그라운드>는 여성 퀴어와 여성의 나이 듦의 고독함과 관련한 복잡한 사회적 관계를 지적하고, 발견되지 않은 여성 퀴어사의 기록을 현재의 젊은 퀴어들이 재현하기도 한다. <불온한 당신> <이반 검열> 시리즈 같은 다큐멘터리에서는 더욱 진지하게 사회에서 배제된 노년/청소년 퀴어의 문제를 지적한다.

 

그러나 보통 이렇게 이전 시대의 퀴어의 삶을 기록하는 다큐멘터리는 ‘바지씨(남성적인 젠더 역할을 수행하는 여성애자)’의 이야기에 한정되어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지속해서 퀴어로서 살아가는 사람 중에는 제도권 밖으로 ‘튕겨져 나와’ 사는 주변적 존재가 많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퀴어니스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여성은 결혼 내지는 기성 사회제도에 편입되어 나타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불온한 당신> 속 인물 ‘이묵’과의 인터뷰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노년까지 살아오며 많은 연인과 이별하게 되었는데, ’결혼하고 싶다‘ 해서 보내준 인연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결혼한 이들의 삶, 결혼’은’ 할 수 있었던 퀴어, ’치마씨‘의 삶은 여러 여성애자들의 삶 중에서도 대중이 더욱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부용의 캐릭터는 1950년대 ‘치마씨’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여준다. 그의 기이한 속내가 드러나지 않기에 모두에 의해 사회적인 여성성을 지키고 있는 ‘올바른’ 인물로 보이며, 그렇기에 부용은 사회적 압박에 시달리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또한 당시 사회적 역할이 제한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생각하면, 그가 결혼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자는 남자가 필요하다’는 부용의 외침을 사회에 잘 드러나지 않는 퀴어의 한과 울분을 체감할 수 있게 하는 훌륭한 대사로 다시 한번 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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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정년이' 71화. 출처: 작가 SNS 계정 (@murmur_ireh)


 

퀴어 커뮤니티에서는 지금도 ‘기록’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계속해서 퀴어사 기록을 주요 의미로 하는 작품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기록의 궁극적인 목적은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리기 위함이다. 데이터를 쌓고 참고하는 것이다.

 

비록 픽션이라고 해도, 부용이 걷는 길은 그래서 또 하나의 대안점이 될 수 있다. 여전히 심각한 억압과 방해를 뚫고 어떻게 나아갈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분명 지름길은 아닐 것이다. 당연히 정도()도 아니다. 부용이가 걷는 길은 어쩌면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샛길 같은 것이다. 여기에 더해진 희망적인 해피엔딩은 작품을 보는 실제 퀴어들을 위한 것은 아닐까?

 

‘정년이’는 일제강점기~전후 자료를 탄탄하게 조사해서 창작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많은 여성이 ‘정년이’를 사랑하는 이유는 이야기의 재미와 등장인물의 개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렇듯 잘 드러나지 않은 여성의 삶에 조명을 쪼이어 구체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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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나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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