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 디아스포라의 고독한 방백 - 연극 ‘디아스포라 기행’을 보고,

글 입력 2022.03.2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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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디아스포라 기행_포스터.jpg

 

 

<디아스포라 기행>은 인생의 여러 국면에서 끊임없이 이 물음과 마주해야 했던 재일조선인 작가 서경식의 안내를 통해 현대의 디아스포라적 삶의 유래와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언제나 이방인이며 소수자로 살아가는 망명자들의 자화상을 마주하면서 어제의 폭력의 기억을 되새기고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어디인지, 어디로 향해 가야 하는지 되묻는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영상, 사운드, 오브제 등의 다양한 매개 장치들을 작품 속에 적극 활용하여 디아스포라의 실존적 감각들을 연극의 언어로 구현해낼 예정이다.

<디아스포라 기행>은 경계의 안과 밖 어느 한쪽이 아닌 사이 공간(in-between space)의 문제를 실존적으로 고민할 수밖에 없는 ‘다른’ 존재들, 즉 디아스포라(diaspora)의 이야기를 통해 근대 국민국가 이후의 세계를 상상해보고자 한다.

 

 

 

글을 열며,


 

<디아스포라 기행>을 처음 만난 것은 2020년 늦여름이었다. 국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이던 나는 (현재는 6학년으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전공과목으로 '한국 문학과 서구 세계 문학'을 신청했다. 그것은 세계문학이라는 큰 흐름 속에서 한국 문학의 위상과 의미를 주로 다루었기에, 주로 관련 논문을 함께 살피며 그것에 대해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강의는 한국 문학이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고유의 사상과 감정을 우리말로 쓴 작품'. 한국에서 중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익히 알 법한 정의다. 교수님께서는 이것에 대해 의심을 품고, 그것이 진짜 옳은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 한국 문학 연구의 시발점이라고 강조하셨다.


이때 논의된 논문이 서경식의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둘러싼 단상 - 새로운 보편성을 찾아서>였다. 서경식은 해당 논문에서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 성립 이전의 문학은 한국문학인지', '사망 작가, 월북 작가, 디아스포라 작가는 한국문학에 포함되는지', '재일 조선인 허남기의 시나 김석범의 소설은 한국문학인지 일본 문학인지', '윤동주의 경우 만주의 간도에서 태어나 일제 시기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옥사했는데, 만약 해방 후에도 생존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의 작품은 한국문학이라고 할 수 있을지'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하나하나 답하며 앞으로 한국문학이 나아가야 갈 방향성을 고찰한다. 글을 읽을 때, 저자나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를 찾아보는 것을 즐기진 않아,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어떤 글을 쓰고 어떤 연구를 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의 날카로운 눈썰미와 진중한 문장이 굉장히 매력적이라고 느꼈었다.

 

 

 

서경식과 서울 괴담의 ‘디아스포라 기행’



연극은 공연이라기 보단 실험에 가까웠다.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대사의 대부분이 방백으로 구성되었단 점이다. 방백은 희곡의 대사 처리 방법 중 하나로, ‘혼잣말’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보다 널리 알려진 ‘독백’과 비교를 한다면, 독백은 함께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도 그 대사를 들을 수 있지만, 방백은 그렇지 않고 오롯이 관객들만 들을 수 있다. 따라서, 방백은 인물들의 심리를 보다 적극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방백’이란 대사 처리 방법을 택한 이유는 원작자 서경식 특유의 덤덤하고 건조한 필체를 살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다음은 <디아스포라 기행>의 한국어판 서문이다. 그는 ‘디아스포라적 자기 인식’을 정립하게 된 계기로 작가 ‘에드워드 사이드’가 남긴 말을 소개하고, 그것을 빌어 디아스포라로서의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듯 적는다.


 
이 책(직접 밝히진 않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 중 한 권인 것 같음)에서는 ‘바깥’이라는 말이 종종 나온다. 그것은 ‘국민’이나 ‘민족’이라는 개념의 틀 바깥에서 살아온 나에게, 자연적이고 필연적이기도 한 감각이다. (...) 나의 두 형은 1960년대에 조국으로 유학을 떠났고, 도쿄의 사립대학에 진학한 나도 졸업 후에는 형들처럼 조국에 유학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형들이 정치범으로 투옥되어 나의 계획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다행히 형들은 군사정권이 막을 내릴 즈음 출옥했으나, 그때까지 일본이라는 ‘외부’에서 살아온 나는 이미 마흔이 되어 있었다.
 


이처럼 작가는 슬프고 안쓰러운 이야기르 하면서도 절대 울지 않는다. 그에 대해 완벽히 무지한 사람이 읽는다면 그가 조국인 한국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쉽게 유추하지 못할 정도다.


이는 책,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을 때보다 연극, ‘디아스포라 기행’을 관람할 때 더욱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두 매체의 차이 때문이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상상력과 관련이 있다. 100명이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는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의 성격이나 배경지식과 같은 것들에 따라 각자의 마음에 100명의 서경식이 생겨날 것이다. (여러 번 읽는 경우도 있을 테니 훨씬 많아질 수도 있겠다.)


그것을 연극으로 각색하는 것은 자신의 ‘서경식’ 또한 의미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큰 관점에서 본다면 (나쁜 의도가 아니지만) 앞서 말한 상상력과 해석의 여지가 줄어든다. 그에 따라 몇 가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이 대두되는데, 이 극에서는 앞서 말했듯 ‘표현과 감정 중 무엇을 살릴 것인가’가 가장 중요한 쟁점이다.


연극을 제작한 서울괴담은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간다. 다만 그 방식이 평범하진 않다. 바로 ‘수어’를 연극의 일부로 편입시키는 것이다. 수어는 말의 강약, 높낮이, 장단과 같은 반언어적 표현이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표정이나 몸짓과 같은 비언어적 표현이 중시된다. 이때, ‘디아스포라 여행’에서는 조명을 대칭적으로 활용하여 각 챕터의 주인공과 수어 통역자들의 위치를 동일하게 둔다.


주인공이 호텔의 침대에서 누워, 자신이 죽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말하는 장면은 특히 인상 깊었다. 무대의 가운데에 침대가 놓이고, 주인공은 침대 위에 누웠다. 수어 통역자는 주인공의 발치에 서서, 그의 말을 통역했다. 달빛과 같은 회백색 조명 두 개가 각각 그들을 대각선으로 비췄다. 침대의 주인공이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로 덤덤하게 이야기하면, 다른 한 쪽에서는 자신의 처지를 알아 주지 않는 세상을 비관하듯 처절하게 통역을 이어간다.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했을 디테일에 감동했다. 또한, 연극이 끝나고도 ‘대각선’이나 ‘수어’의 의미를 떠올리며 곱씹을만한 장면이었다.


그 밖에도 전통적인 연극의 한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도가 마음에 들었다. 사람과 견주는 사이즈의 인형을 도입하여 인원이 한정적이라는 것을 극복하고자 시도한 점이라든지, 와이어와 회전하는 바닥을 이용하여 마치 현실이 아닌 꿈을 꾸는 듯한 연출을 한다든지, 카메라와 대형 스크린으로 무대가 아닌 새로운 프레임을 만든다든지 하는 것들은 참신했으나, 난해하지 않고, 매혹적으로 다가왔다.

 

 


글을 마치며,



‘한국 문학과 서구 세계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글을 마치겠다. 해당 과목의 학점은 최고점이었지만,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내가 번뜩이는 답안을 작성했다기 보다는, 성실하고 수업에 충실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의 중간고사 대체 과제는 디아스포라 문학과 관련된 책 중 한 권을 고르고 서평을 쓰는 것이었다. 도서 목록은 교수님께서 직접 뽑아주셨는데, 여러 권의 책들 중 이 연극의 원작인 서경식의 수필, <디아스포라 기행>과 김시종의 시집 <잃어버린 계절>이 눈에 띄었고, 두 권 다 직접 사서 읽어본 후, 데드라인 사흘 전까지도 둘 중 무엇이 더 좋은지 정하지 못해 고민하다가, '일본식 서정을 부정했다'는 카피에 이끌려 <잃어버린 계절>을 선택했었다.


나는 그 레포트의 말미에 ‘현대인들은 모두 디아스포라다’라고 적었는데, 이것이 너무 비약적이며, 확대 해석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았었다. 그 점을 모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본토를 떠나 외부에서 그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란 정의를 떠올려 봤을 때, 다시 생각해 봐도 여전히 내가 내린 정의 또한 유효하다.

 

 

 

신동하 (1).jpg

 

 

[신동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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