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우리는 그를 ‘리 모건’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음악]

트럼펫 연주자 리 모건 50주기.
글 입력 2022.03.07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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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모건의 음악이 멈춘 지 반세기가 지났다. 음악이 멈췄다고 표현한 것은 그의 가능성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이곳에 머무른다는 얘기도 된다. 15세에 연주활동을 시작한 이후 ‘클리포드 브라운의 뒤를 이을’이라는 수식어를 안고서 1960년대 하드 밥의 중심에 섰던 리 모건은 1972년 서른셋의 나이에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연인 헬렌 모건과 얽히고설킨 관계의 비극이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끝내 둘 사이에 명확하게 이야기되지 않은 불투명한 시간의 증언이었다. 아티스트의 경력에 원숙함과 번뜩임이 모두 더해질 무렵 영원히 무대에서 내려오게 된 그를 시간을 거스르는 방식으로 기억해 본다.

 

 

 

다시 찾아온 리 모건의 마지막 라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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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반갑고 거대한 소식이 들렸다. 리 모건의 캘리포니아 라이트하우스 라이브 중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곡을 포함해 전체 러닝타임만 7시간 30분에 육박하는 컴플리트 앨범 [The Complete Live at the Lighthouse]가 발매됐다는 것이다.

 

기존 앨범은 [Live at the Lighthouse]라는 이름으로 1970년에 발매됐었는데, 이는 리 모건 사망 전에 발표한 마지막 앨범이었다.(마지막 스튜디오 앨범 [The Last Session]은 그가 사망한 이후 1972년 5월에 발매됐다.)

 

리 모건의 생일날부터 펼쳐진 공연은 피아노의 해롤드 메이번과 색소폰의 베니 모핀, 재즈 메신저스에서 나란히 연주활동을 펼쳤던 베이스의 자이미 메리트가 함께했다.

 

‘The Sidewinder’와 ‘Speedball’을 제외하면 그의 대표곡이라고 할 만한 것들은 레퍼토리에서 빠졌고 대신 함께한 멤버들의 곡을 포함시키면서 밴드 전반이 주도성을 가지고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

 

 

 

I Called Him Morg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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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아트 블레이키를 통해 마약의 나락에 몸을 던진 리 모건은 수년 동안 중독으로 인해 허덕인다. 그 와중에도 리 모건 스스로와 하드밥 시대를 대표하는 앨범 [The Sidewinder]와 [Cornbread]를 발매하는 등 탁월한 재능은 웬만해서 어디 가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여전히 트럼펫과 옷을 전당포에 넘기고 마약을 할 만큼 피폐해졌다.

  

그러던 와중 그는 헬렌 모건(그가 모건이라는 성으로 불리기 이전에 어떻게 명명됐는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헬렌 무어(Moore), 혹은 헬렌 모어(More))을 만나게 된다. 헬렌은 전부터 아티스트들에게 자신의 공간과 먹을 것을 내어주는 것으로 명망이 있었다.

 

리 모건은 그런 헬렌과 애착관계를 형성한다. 헬렌은 리 모건의 트럼펫을 전당포에서 찾아주고 그가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연주 활동을 이어갈 수 있도록 심적·물적으로 많은 도움을 줬다.

 

하지만 리 모건의 이성 문제로 실랑이가 있었던 둘 사이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벌어져서는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앞서 언급한 라이트하우스에서의 공연이 있고 1년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난 1972년 2월, 뉴욕 맨해튼 슬러그스 살롱에서 리 모건은 헬렌 모건과 말다툼을 한 후 그에게 총격을 당해 세상을 떠난다.

 

이와 관련한 헬렌 모건의 진술을 다큐멘터리 <나는 모건을 죽였다>(I Called Him Morgan, 2016)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온전하게 진술을 마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 이야기들은 리 모건과 함께 했던 웨인 쇼터, 폴 웨스트, 자이미 메리트 등 동료의 인터뷰와 더불어 느슨하게 이어진다.

 

결국 리 모건이라는 사람에 대한 회고로 점철되는 이 다큐멘터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건 그가 재능 있고 탁월한 연주자이며 동시에 나약하고 흔들림 많은 인간이었다는 사실이다.

 


 

진정한 포스트-밥 연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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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모건 음악의 발전 가능성은 비단 하드 밥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단순하고 귀에 박히는 부걸루 리듬을 차용한 ‘The Sidewinder’이나 보사노바 발라드 ‘Ceora’처럼 어법이 어렵지 않고 명료한 곡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모달, 아방가르드 재즈 등 여러 음악적 시도를 신중하면서 동시에 거침없게 했던 재키 맥린, 앤드류 힐과 같은 연주자들과도 활발하게 작업했다.

 

재키 맥린은 하드 밥 리 모건과의 작업 전부터 [A Fickle Sonance]나 [Let Freedom Ring]을 통해 하드 밥의 권역에서 뻗어나가 보다 전위적이고 화성적인 시도가 돋보이는 연주를 선보였다. 앤드류 힐 역시 블루노트 데뷔 앨범 [Black Fire]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듯 두말할 것 없이 모달과 아방가르드의 꾸준한 기수였다. 리 모건은 이런 연주자들과 함께 하드 밥의 외연에서 보다 자유롭게 모달과 프리 재즈의 영역을 넘나들며 연주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녹음한 [The Last Session]은 리 모건이 퓨전의 길목에서 그간 닦은 포스트 밥적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앨범이다. 그의 점진적인 변화가 보다 오래 이어졌다면 분명 그 어떤 연주자와도 비슷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모던 재즈 한가운데에서 ‘리 모건’이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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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 길레스피가 자신의 빅밴드에 18세의 리 모건을 부른 것은 역시 눈에 띄는 일이었다.

 

비밥의 화신이 이끄는 밴드에서 그렇게 1년 반을 있다가 존 콜트레인의 [Blue Train]에 참여했다. 이 역시 디지 길레스피의 소개 덕분이었다. 동시에 행크 모블리의 여러 음반에도 함께했다. 이후에는 1958년부터 아트 블레이키 재즈 메신저스에서 작곡을 겸하며 연주활동을 이어갔다.

 

이때 함께 작업한 앨범이 대표적으로 [Moanin’]이다. 디지 길레스피에서부터 아트 블레이키까지. 여기까지는 모두 리 모건이 22살이 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시작부터 모던 재즈의 한가운데에서 당당하게 연주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도 그 중심을 놓친 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클리포드 브라운의 짙은 영향을 받은 십 대 트럼펫 연주자는 그가 요절하여 끝내 이어가지 못한 음악의 삶을 리 모건이라는 이름으로 대신해 살았다. 자신도 결국 짧은 생을 거스르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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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용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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