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논쟁이 지닌 가능성 [문화 전반]

<설국열차>와 <역사>를 통해보는 논쟁
글 입력 2022.02.21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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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은 기존의 관념을 성찰하고 되묻는 입장을 전제함으로 사태를 변화시킬 가능성을 지닌다. 그 가능성은 아널드가 <역사>에서 이야기한 '진실한 이야기'와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 논쟁을 추동하는 분노와 저항은 이러한 진실한 이야기를 근원으로 삼아야지만 논쟁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지닐 수 있다.


봉준호 감독의 2013년작 <설국열차>에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하나는 윌포드가 세계종말을 예측해 그에 대비한 기차를 만듦으로써 (일부) 인류를 구원했다는 것이 머리칸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시스템을 지배하는 기존의 역사 이야기이다. 이에 대응해, 기존의 시스템이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무력으로 사람들을 착취하고 일부의 상류층만을 구원했다는 것이 꼬리칸 커티스가 새로 쓰는 이야기이다. 커티스의 새로운 이야기는 기존의 이야기에 논쟁을 걸어옴으로써 시스템의 질서에 변화를 추동한다. 그들이 굳게 닫힌 꼬리칸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보인다. 상상해 보자. 만약 꼬리칸 사람들이 윌포드의 이야기를 순순히 받아들였다면, 문을 열 이유는 없을 것이고 기존의 머리칸 이야기는 의심 없이 존속되며 영화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논쟁은 새로운 가능성이다. 기존의 관념, 이야기, 역사에 대한 성찰을 전제로하고 질문을 던지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 수 있는, 주목할 만한 가능성이다.

 

존 H. 아널드는, <역사>의 첫 장에서, 앞서 살펴본 의미있는 논쟁이 가능한 이유에 대해서 주목한다. 저자에 따르면 단일한 사실같이 보이는 과거에도 '빈틈'이 존재하기 때문에 추측 또는 해석이 필연적이다. 따라서 역사서술이 어느정도 불확실하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는 항상 존재한다. 예를 들어 윌포드의 역사서술에 존재하는 '빈틈'은 멸종된 부품이다. 윌포드는 자신이 해석한 신화로서 역사 이야기를 해치지 않게 하기 위해, 부품 대신 아이들을 이용하면서 착취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건강검진이라는 이야기를 선택한다. 커티스는 이렇게 은폐되고 무시된 사실들을 종합해 새로 해석한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서, 저자는 이러한 이유로 역사를 '진실한 이야기'라고 표현한다.

 

 

1] '증거와 합치하고 사실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역사는 '진실하다' 동시에 '사실'을 더 넓은 맥락이나 서사 속에 배치하는 해석이라는 뜻에서 '이야기'다.

 

 

그리고 진실한 이야기는 또 다른 진실한 이야기와 논쟁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야기의 진실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누군가가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결국 이야기임을 인지하고, 새로운 '진실한 이야기'를 통해서 논쟁은 기회로서 가능성을 지닌다.

 

다시 영화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커티스의 이야기를 보자. 왜 시스템을 전복시키고자 하는 그의 투쟁은 처참히 실패로 끝났을까? 영화 초반 꼬리칸의, 분노는 혁명이란 열차를 추동하는 엔진의 역할을 한다. 반면 커티스는 주변 사람들과 다르게 분노를 삼키며 열차의 선로를 놓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그들이 걸어온 길을 기록하는 역사가도 존재한다.  커티스는, 윌포드가 그랬듯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새로 쓰기 위해 자신들의 역사를 선택적으로 기록하며 진실한 이야기를 만들어 간다. 그러나 커티스가 꼬리칸에서 벗어나 윌리엄이 만들어놓은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면서, 역사가는 더는 등장하지 않게 된다. 그 시점부터 서서히 커티스는 자신이 과거에 겪은 '진실'에 대한 분노만 남고 '이야기'를 잃어버리며 영화는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마침내 윌포드가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커티스를 정식으로 초대할 때, 결국 커티스는 윌포드가 만든 ‘진실한 이야기’에 완전히 편입되어버린다. 자신이 과거에 겪은 부조리는 분명히 진실하지만, 윌포드가 주장하는 '균형이론' 역시 진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차 커티스는 '진실한 이야기'를 잃어버린, 분노라는 감정만 남은 존재가 되며 기존의 역사에 도전하는 꼬리칸 이야기의 논쟁은 완전한 실패로 끝나게 된다.

 

앞서 설국열차의 투쟁 이야기를 통해, 분노와 저항은 진실한 이야기 쌓으며 논쟁으로서 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누구나 외부에 존재하는 세상과 개인의 욕구 간 부조화로 인해 혼란을 겪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상이 뒤틀린 것인지, 아니면 내가 뒤틀린 것인지 알 수 없는 마음'은 우리를 절규하게 만든다.

 

 

[2] “독자는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역사를 무시하기보다 진실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역사와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러한 혼란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진실한 이야기를 통한 논쟁이다.

 

 

[1] Jone H. Anorld, , 교유서가, 2015, 30p

[2] Jone H. Anorld, , 교유서가, 2015, 134p

 

 

[최재성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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