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낭만에 대하여 [사람]

글 입력 2022.01.28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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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단순히 노을 진 그늘을 바라보며 연인과의 무드를 즐기는 그런 낭만 말고, 이상을 그리며 언젠가는 상상 속의 그곳에 발 담글 내 모습을 그리는, 본연의 모습을 자유로이 표현하는, 팍팍한 일상에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이러한 것들을 차곡차곡 쌓아 ‘나’라는 사람을 더욱더 단단하게 세워나가고 싶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낭만과는 거리가 꽤 멀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레 낭만은 희미해져만 갔다. 해를 거듭하고 현실을 알아갈수록 낭만 따위는 사라지는 게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순간을 직면하니 어느 순간 휙 사라질까 두려웠다. 만약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내 일상에서 색은 모조리 다 빠지고 잿빛만이 남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쪽에는 적어도 알록달록한 물감을 두어 일상이 어두워질 때쯤엔 그걸 꺼내 밝게 칠하고 싶었다. 지금 내 낭만은 차가 쌩쌩 달리는 도로 위에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서 있다.

   

 

 

낭만을 뺏어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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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나 작사가는 한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친구들은 진지함에 대한 거부감이 큰 것 같다. 설명하려 하면 설명충, 진지해지면 진지충, 내 감성을 표현하면 감성충. 이때, 남들을 의식하다 보면 스스로 자신을 밋밋하게 깎아내리게 된다. 그때 깎여나가는 것들은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가지고 있는 무언가이고, 다른 데서 빛을 발하는 부분이다.’

 

나는 여기서 ‘깎여나가는 것들’을 내가 생각하는 낭만의 일부분으로 바라보았다. 외부에서의 자극을 전혀 받지 않은 본연의 모습일 때의 나와 이리저리 굴러 깎여나가고 때가 묻은 지금의 나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어렸던 나와 현실을 알아버린 지금의 나는 분명히 차이가 있는 것이다. 작은 것에서 행복을 느끼고, 나만이 가진 독특함을 아무렇지 않게 내세우고, 긍정적인 시야를 확보했던 낭만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조금씩 소멸해갔던 것 같다.

 

위 강연을 빌려 사례를 들어보자면, 나 역시 친구들과 감성충, 진지충 등의 지적하는 말을 여과 없이 내뱉곤 했다. 아마도 당시엔 친구들도 나도 너무 친밀한 사이라서 진지한 분위기를 꺼렸기 때문에, 오글거림을 탈피하고자 유머러스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지적하는 입장이었을 때의 기억은 흐릿하지만, 지적을 받는 입장이었을 때의 기억은 조금 선명하다. 그때의 나는 멋쩍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남들과 똑같이 호탕하게 웃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나 확실한 건 몇 번의 지적이 거듭될수록 스스로 조금씩 절제해갔다는 것이다. 말을 줄이니 남에게 지적 받을 일이 줄어들게 되었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알게 모르게 깎여나가는 내 낭만들을 지킬 수 있었다.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올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한 다른 이의 생각을 훔쳐보던 중 우연히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발매되어 현재까지 명곡으로 남아있는 유명한 곡이다. 나와는 첫 만남이지만, 이 곡이 표현한 낭만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가져왔다.

 

이 곡에서 낭만은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이자 ‘내 가슴에 다시 못 올 것’이다. 낭만을 바라보며 미래를 그리던 어린아이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 낭만의 손을 놓는다. 언제 놓기로 다짐했는지,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무슨 확신이 들어서인지는 콕 집어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모든 과정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렇게 인지조차 하지 못한 채 낭만을 잃는다.

 

그렇다면 한 번 잃어버린 낭만은 다신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마냥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조금 늦더라도 내가 노력하면 부메랑처럼 언젠가는 다시 나에게 와줄 거라 믿는다. 먼 길을 돌아오느라 여기저기 다친 채로 오겠지만, 스스로가 작은 것에서부터 일궈낸다면 낭만은 비로소 내 가슴에 안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가슴에 다시는 못 올 것’이라는 말이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나와 비슷한 누군가도 알았으면 한다.

 

 

 

낭만을 지키기 위해



 

말 한 번 해보지 않고 홀로 상처받고 관계를 정리하는 일은 미성숙한 행동이다. 하지만 상처 준 이와 상처에 대해 논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나는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같이 있으면 편안한 최소한의 사람들하고만 관계를 유지하고 살게 됐다. 굳이 나와 맞는 않는 상처 주는 사람까지 껴안으며 인간관계를 넓히기엔 그만한 그릇도, 여유도, 마음도 안 된다. 관계 망은 좁아지더라도 사람에게 스트레스 받지 않고 속 편하게 살 수 있는 나만의 도피성 선택지인 것이다.

 

- <상처받을 바엔 고독 할래>_박도훈

 

 

위 인용구는 최근 이곳에서 읽었던 것 중 가장 마음이 갔던 글의 일부분이다. 사실 제목에서부터 괜한 동질감을 느껴 망설임 없이 눌렀었다. 역시나 글을 읽는 내내 무엇을 말하려는지, 왜 그래야만 했는지를 구태여 보태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고, 읽는 도중에 김이나 작사가의 강연이 떠올랐었다. 후에 이것들은 내 머릿속에서 점차 가지를 뻗어 나갔고, 결국 이 글의 시작점이 되었다.

 

나는 굉장히 감성적인 사람이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F형 인간이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결코 과정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해결책보단 공감을 갈망하고, 때론 기억 속의 일들을 끄집어내 혼자 감성에 취하기도 하는, 감성형에 매우 가까운 사람이다. 이건 내가 가진 특성이자 언젠가 다른 분야에서 빛을 발할지도 모르는 소중한 보물과도 같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나는 스스로 이성적인 사람이 되고자 많이 노력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성적인 사고가 실제로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어서였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은 대게 이성적인 사람을 강한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이었다. 감성적인 사람은 유약하고, 이성적인 사람은 강하다는 이 괴상한 논리가 내 행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내 낭만을 지키기 위해 고독과 이성을 택했다. 멀어지는 낭만을 붙잡기 위해선 남들의 시선에서 나는 강한 사람이어야만 하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손에 쥔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걸 바보같이 보기만 해야 하니 비겁하지만 이렇게라도 남은 내 낭만을 지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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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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