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무애 無㝵

악흥을 좇아 실컷 우스워지리라
글 입력 2022.01.02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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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지키기 위해 세워둔 철책들을 거두어야 하는 때가 찾았다.


고꾸라지거나 꺾이지 않기 위해 대지에 깊이 박아둔 말뚝들, 비로소 뿌리가 자라니 그것들은 나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어 있음을 본다. 이제 날아볼 만큼 나의 마음은 자유로와졌고, 나를 규정하고 보호하는 선과 푯말은 나의 한계가 되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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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움에 대해 생각하는 나날이다. 가벼움 세 자를 볼 적에 상기되는 이미지는 여럿. 촐랑대며 집안을 포르르 거리는 나의 친동생과 매사 깐족깐족 날 놀리려 드는 깜찍한 회사 후배 놈들 하며 나무늘보같이 침대엘 찰싹 붙어 구시렁구시렁 불만을 씹는 입사 동기 녀석, 즉 내 곁을 매워 있는 이들을 먼저 떠올린다. 그런가 하면 본 지가 좀 된 녀석들도 잇따라 연상되지. 짓궂은 장난을 즐기며 선을 넘나들기 일쑤인 과 후배 놈, 그리고 이제는 절연한 몇 이들도 먼 기억 속을 아른거린다.


경중, 무게의 상대성을 재단하기 위해 무거운 이들을 또 의식 위로 불러들인다. 애수에 젖은 어머니, 추억과 회한의 만화경에 갇힌 아버지와 내 가장 가까이 여기는 이, 그는 차돌같이 검고 묵직하다. 또 이제는 연락이 끊긴 여동생들, 그 애들은 하나같이 얼굴 반쪽만큼 그림자를 드리우고선 날 찾아오곤 했다.


각자의 이마에 패인 무게의 이미지는 마음의 자유도에서 비롯된다. 그 말을 얼만큼 마음에 얽매임이 있는가로 치환해본다. 여동생들의 얼굴에 서리인 그림자와 나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은 나의 무엇을 보았기에 알지도 못한 내게 성큼 다가왔을까. 그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 것과 나의 그것, 아마 우리는 갖지 못해 서글픈 별 몇 개를 미련하는 동시에 자신에게 규정돼 있었던 것 같다.


마음에 굳은 얽맴이 있다는 것, 그것을 무슨 다른 말로 치환해볼거나. 어느 마음은 어떤 마음에 얽매이는가. 의식은 감정에 휘둘리고 휘둘리는 의식에 하나의 믿음은 깃들지 못한다. 종일 입을 닫아 쉰내가 올라오는 나날 속에도 나의 의식은 단 한 순간마저 멈추어있지 못했다. 나는 너무 우울하거나 당황스럽거나 슬프거나 외롭거나 했다. 그 까닭에 대해 생각해볼 적에, 볼 적마다 나는 나를 관찰하고 연상하고 연산하였던 것 같다. 타인이 된 나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연상하고 그 인과를 연산하고, 그 모습을 다시 제3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이런 나날, 이런 것들이 퇴적하는 만큼 나는 나의 의식에 얽매어 간다. 이것은 내가 사람을 너무 사랑하였던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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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말하자면, 초라함에 대하여. 또는, 외로움에 대하여. 그리고 비루함에 대하여, 결국 나약해져 가는 모든 스스로에 대하여. 나는 사람을 너무 사랑했기에 이런 것들을 생각했고, 생각했다기보단 젖어 있었고, 그 보담도 매여 있었고, 이런 나를 받아들여 주기에는 한편 너무 고집스러웠다. 그래, 이것은 사랑과 비루한 나와 편집증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람을 사랑함에 있어, 외롭기보다는 고독하기를 바랐고, 초라함보다는 초연함을 바랐으며, 비루하기보다는 고고하기를 바랐다. 나약해지는 자신이 패배자가 아닌 투사이기를 바랐다. 관찰하고 감독하는 나, 난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가 도저하다 여기었고 나와 나는 이렇게 오랜 갈등상태에 놓인다. 난 나와 형성된 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틈새와 이런 일련의 의식 같은 것들은 마음에 딱딱한 말뚝을 박아넣는다. 우왕좌왕하다가 어느 편도 기꺼이 선택하지 못하게 경직되어가는 것이다.


그리곤 무엇이 남았을까. 아무런 영광도 없는, 맺을 결과도 없으며, 과정에 대한 소기의 의미마저…. 외로움과 초라함과 비루함으로부터 나를 떼어두려 했으나 실은 그저 고집에 지나지 않았던 것들, 아마 편린인 습관 정도가 남았을 것이다. 편린인 관찰과 편집증, 나를 바라보는 만큼 잔털이 굵어지는 감각은 이제 여러분을 바라본다. 예민해진다는 뜻이요, 그만큼 사랑하는 여러분으로부터 내가 멀어진다는 뜻이다. 그것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들이기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최소한 내가, 조금이라도 멋이 있는 놈이 되었느냐는 말이다, 아직도 이리 가슴 타듯이 못마땅한데.


무거움, 그때의 나를 지키기 위해 나 스스로 정한 규칙들. 그러니까 외롭지도, 초라하지도, 비루하지도, 나약해지지도 않기 위하여 스스로 정한 로직과 가치관들. 나는 그것들에 신념이라는 이름을 달아주고 계속 그것을 잡아당겼다. 샛바람에도 마구 흔들리는 내 의식에 추를 달아야 했기에. 나는 사람을 그리워했고, 그때 자아의 무게는 참을 수 없이 가벼웠으며, 의식은 자꾸만 어지러운 통에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차라리 가벼웠더라면, 가벼이 나를 바라보고 여러분을 바라보고, 가벼이 사랑하고, 그로써 가벼이 이별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의 발현은, 이렇듯 시간의 문제였던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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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전처로 사랑스런 가벼움들을 본다. 머리에 떠오른 하나는 고양이 같고, 둘은 행복 같다. 나머지 셋은… 햇발에 조는 참새 같다. 나는 멀어지지도 않고 그들을 할퀴지도, 내 민낯이 드러나지도 않을 거리감을 잡고서 사랑스런 그들을 관찰하고 있다. 말하였듯 내가 사람을 너무 사랑하는 탓이다.


딱히 얽맴이 없어 아무래도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그런 자신을 오만할 정도로 긍정하는 그들, 그들이 자신을 믿는바 믿음의 경도에는 놀라울 정도의 단단함이 예기를 발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규정하고 제한하는 모종의 의식이 없다는 것이겠고, 딱히 스스로 관찰하지도 않는다는 것이렷다. 그럴 필요란 애초 없었기에.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안에 사랑스럼이 싹 트고 있다니. 이런 인과로 알 수 없던 것들, 삶은 디자인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떠오른다.


무애는 얽맴이 없다는 말이랬다. 위 모든 얽맴의 본질에는 무언가를 보고 만들고 계획하는 모습, 손에 꽉 쥐려는 것은 집착이다. 그것은 미지가 두려워 그 파도 위에 나를 놓아둘 수 없는 이의 두려움과 지나친 조심성이다. 다른 말로는 삶과 그 안 자신을 설계하고자 하는 것, 그러나 그 안에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마저 깃들일 수 있는 것이었을까? 그런 것마저 계획하여 가져보기엔 한계가 너무 뚜렷하다. 자유로운 몸짓에 깃드는 비로소 사랑스러움… 그래, 사랑스러움이란 모든 자유로운 모습일지도 모른다.


나는 나를 계획하기 위해 관찰하여 규정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모습과 어울리지 않는 것, 욕망해도 좋은 것과 욕망하되 욕망해서 안 되는 것, 그리고 몇 가지 관념적 법칙과 그때 추락하는 나를 위해 필요한 고육책들…. 나는 사랑스럽지 못한 나를 우상화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비로소 터널을 지나 너무 우울하지도 슬프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은 지금, 나는 이제 정상 범주의 감각 속을 산다. 눈동자는 더 이상 타오르지 않고 퍽 다정한 무감함이 감돌다. 바야흐로 사람에 아파하지 않을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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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이 사랑스런 그들과 그렇지 못했던 나. 아직도 내게는 마지막 사슬과 목줄이 필요하다. 그렇잖으면 사랑은 질투가 되어 너를 할퀴고, 불길을 내 눈에 드리우고, 짐승인 나를 드러낼까 두렵다. 이 모든 자기 규율과 강박들은 내게 무게의 이미지를 드리운다. 사랑스러운 가벼움, 얽맴이 없어 자유로운 그들의 무애를 보며, 이제 서서히 그를 그려봄 직한 나는 느지막이 자신을 돌아다본다.

 

퍽 다정한 무감함이 내 눈에 감돌고, 사람을 갈망하지 않는 시기가 날 찾았음에, 평화로운 햇발 아래 조는 나의 의식은 이제 날아보기를 원한다. 내 곁을 쫑쫑거리다간 미련도 염려도 없이 날아가는 새들의 자취를 따라 날아보기를 원한다. 아무런 얽매임이 없이 자유로이 마음 가는 대로 의식해보기를 꿈꾼다.


그러니까,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을 걷기 위하여 첫발을 떼는 중이다. 근엄한 척 파티의 가장자리를 맴돌기보다는, 이제 자유로이 춤추고 싶다. 파계승이 목탁을 두들기며 저잣거리를 거니는 것과 같이…. 자기 규제를 벗어던지고서 춤을 추어보자니 아직은 굳은 몸에 어색함이 찾는다만, 멋이 아닌 자유를 향해 가기 위해 하나씩의 허물을 벗고자 한다.


찬 겨울, 억지 펴 본 가슴 안으로 시린 것이 가득 들어차 좋다. 폐부를 씻기는 맑은 것들, 이 감각과 같이, 가슴에 설기인 넝쿨을 찢으며 더 넓은 가슴으로 세상 앞에 서기를 바란다. 악흥을 좇아 마음에서 솟는 것들을 오롯이 몸에 담아 발산하기를 바란다. 하늘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기를, 그 아래 나와 내가 마주하여 서로 미소 짓기를…. 그로써 나를 사랑하고, 이제 너를 사랑하고, 또 기꺼이 이별할 수 있기를. 자유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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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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