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21과 2022의 경계선에 걸터앉아 - 끝없음에 관하여

보이지 않는 리듬감이 담긴 영화
글 입력 2021.12.17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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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 이 유명한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는 글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인간의 삶을 건조하지만 아름다운 시처럼 표현해내며, 제76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감독 로이 앤더슨. 그는 인간의 행복보다는 불행 쪽에 관심을 기울인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삶 자체에 말이다.


인간은 모두 자기만의 행복과 자기만의 불행을 안고 산다. 그런 행복과 불행은, 일반적이면서도 특수해서 누구나 겪은 일이기도 하고 오로지 자신만이 겪어야 하는 일이기도 하다. 왜 나만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다가도, 드라마나 영화 속 인물이 겪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이입하며 위로를 받기도 한다.

 

혹은 자신과 비슷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다른 삶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만으로 위로가 되기도 한다.

 


Chagall_Over_the_Town.jpg

 

 

영화 <끝없음에 관하여>는 회화 형식으로 아름답고도 슬프게 인간을 조명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마르크 샤갈의 작품 <도시 위에서>가 떠오르는 이미지가 등장한다. 폐허가 된 도시 위로 껴안은 연인이 날아간다. 슬픈지 기쁜지 표정을 파악할 수 없지만, 유유하게 날아가는 모습이 아름답다.


76분으로 짧은 러닝 타임 동안 여러 인물의 삶을 비춘다. 홍보 담당자이자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자, 은행을 믿지 못해 침대 매트리스 아래 돈을 보관해 놓는 남자, 아직 사랑을 찾지 못한 젊은이, 믿음을 잃은 가톨릭 사제 등. “한 남자가 있다”, “한 여자가 있다”로 시작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해당 인물의 삶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에피소드들이 모여(인간의 삶이 모여) 시적 운율 같은 파동을 가져다준다. 미니멀하지만 리듬감 있는 배치도 돋보인다.


감독 로이 앤더슨은 인물 배치, 공간 등을 연극처럼 구성하기로 유명한데, 이번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얼굴에 하얗게 분칠을 한 듯한 주요 인물들이 나오고, 주변 인물들은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배치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아직 사랑을 찾지 못한 젊은이’를 보여줄 때가 그렇다. 미용실 여자 직원이 가게 앞의 시든 나무에 물을 주고, 그 옆 가게 책방 주인은 안에서 책 정리를 하고 있다. 지나가는 젊은 남자는 책을 둘러보다가 슬쩍 여자를 본다. 눈빛은 제대로 교환되지 못하고, 여자는 가게로 들어간다.

 

물 주기, 책 정리, 책 고르기, 서성이기 등 별것 아닌 사소한 행동이 모여 눈에 보이지 않는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카메라를 한 곳에 고정해놓고 찍는 경우가 많아 더욱 연극처럼 느껴진다. 로이 앤더슨의 세계에서는 영화가 곧 연극이고, 연극이 곧 삶이다.

 

 

메인 포스터.jpg

 

 

혹자는 이 감독의 작품을 보고 내가 뭘 본 것이냐, 보기라도 한 것이냐, 할 것이지만(실제로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누군가 겨우 앉아서 참고 봤다는 등 혹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해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없어도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법이다. 대표적으로 시처럼 말이다.

 

읽고 발음하고 상상하며 다른 세계를 경험하기도 하고, 묵은 감정들이 해소되기도 하는 것처럼. <끝없음에 관하여>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가늠하기 어려운 태초부터 시작된 인간의 역사, 앞으로도 끝이 없이 이어질 것 같은 인간의 역사, 죽어서도 계속될 것 같은 개인의 역사. 로이 앤더슨은 이런 역사를 투박하게 나열하지만, 그 속엔 아름다움이 선명히 새겨져 있다.


아직도 하늘을 떠다니는 연인의 모습이 생생하다. 전쟁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도, 전쟁에서 패해 포로수용소로 끌려가는 군인들도, 예배를 드리기 전 포도주를 병째 드리키는 사제도 모두 그 연인이 보호해줄 것 같은 느낌이다. 영화는 지평선이 보이는 아무것도 없는 1차선 도로에서 차가 고장 난 남자 에피소드로 끝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지만, 어렵더라도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좀처럼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가득하지만, 묵묵히 걷다 보면 어딘가 닿아있지 않을까. 나만의 불행을 깎아 어여쁜 조각상을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벌써 연말이다. 한 해가 가고 2022년이 올 것이다. 우리는 늘 그렇듯 불행하고, 또 행복할 것이다.

 

 

[임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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