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출동! 김장 원정대 [음식]

김장이라는 전쟁
글 입력 2021.11.27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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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엄마는 김장을 하러 큰집으로 출동했다. 왜 출동했다는 표현을 골랐느냐 하면, 큰집으로 떠나는 엄마의 모습이 흡사 전쟁을 치르러 가는 용사처럼 비장했기 때문이다. 빨간 고무장갑, 무릎까지 올라오는 비닐 장화, 텅 빈 김치통, 밖에서 일할 때 유용한 털 조끼까지 야무지게 챙긴 엄마는 아직 눈도 채 뜨지 못한 내게 알아서 점심을 챙겨 먹으라는 말만 남겨놓고 집을 나섰다.

 

*


시골에서 김장은 1년을 마무리하는 커다란 동네 행사다. 민정이네, 숙희네, 혜림이네, 청림이네, 봉주네 등등 어린 시절 겨울만 되면 엄마의 김장 스케줄이 달력에 빼곡했다. 당연히 우리 집 달력만 빼곡했던 것은 아니다. 집집마다 그 많은 양의 김치를 만들려면 서로서로 품앗이가 필수여서 온 동네가 함께 김장 스케줄을 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아주머니들은 가끔 본인이 원하는 날짜에 김장을 하기 위해서 눈치싸움을 벌이기도 하고, 일부러 인기 날짜를 피해 김장 일정을 정하기도 하면서 김장 전쟁을 준비했다. 치열한 준비 끝에 김장이 시작되면 엄마는 전쟁 용사로 변신해 아주머니들과 함께 김장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꼭 전쟁에서 가져온 전리품인 양 각종 김치를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한동안 식탁에 주야장천 김치 파티가 열린 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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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김장이 시작되면 먼저 배추, 무, 오이, 열무 같은 채소를 양껏 소금에 절여둔다. 그다음 커다란 대야에 채를 썬 무, 고춧가루, 파, 마늘, 젓갈 등의 양념을 넣고 고루 섞어 속을 만들어 준다. 그러면 그날의 김장 원정대가 대야 주위에 둘러앉아 절인 배추에 속을 넣는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 얼마나 배추의 머리 부분까지 속을 잘 넣느냐가 핵심 스킬이다. 아주머니들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나누면서도 정확하고 빠르게 손이 노는 법이 없다.

 

사실 김치를 만드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 집집마다 넣는 재료, 무치는 방법, 보관하는 방법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김장 문화의 핵심은 바로 이렇게 각자의 방법과 지혜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노하우를 공유하는 한편, 서로 김치를 나눠 먹으며 '정'을 쌓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독특한 풍습과 문화 덕분에 지난 2013년에는 김장이 유네스코 인류 무형 문화유산으로 등록되기도 했다.

 

김장이 끝난 후 바로 먹는 김치의 맛은 정말 김장의 노고를 단번에 잊게 해주는 맛이다. 또한 저온 숙성을 통해 김치를 오래 발효시키면 새콤한 맛이 더해져서 더욱 시원하고 개운한 맛이 난다. 특히 발효된 김치는 겨우내 우리에게 유용한 식재료가 되어준다. 찌개로, 만두로, 찜으로, 볶음으로 조리 방법도 다양해서 질릴 일이 없다. 이렇듯 변화무쌍하게 한국인의 식탁을 지배하는 김치는 누가 뭐래도 가장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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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원 클라쓰' / 사진 = KBS 영상 캡처

 

 

그래도 역시 김장의 꽃은 수육이다. 두툼한 통삼겹살을 갖은 재료와 함께 푹 삶아낸 후 먹기 좋게 썰어내고, 절인 배추에 고기 한 점을 올려 무생채와 함께 돌돌 말아 입에 넣는다. 그 맛은 오로지 김장철에만 맛볼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다.

 

어릴 때는 고기를 먹을 기회가 귀해서 수육을 먹을 수 있는 김장 날이 기다려졌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은 오로지 이때밖에 낼 수 없는 맛이라는 걸 알기에 김장철의 수육이 더욱더 귀하다. 아마도 어른이 된다는 건 '때'를 기다리고 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인 것 같다.


예전에는 좀 더 추울 때 김장을 했던 거 같은데 김치 냉장고의 등장 이후 김장을 하는 날짜가 점점 빨라졌다. 조금 이르게 김장을 해도 김치 냉장고에 넣어두면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맛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치 냉장고가 없던 어린 시절에는 아빠가 김장철만 되면 뒤꼍에 내 키만 한 구덩이를 파뒀다. 그리고 각종 김장김치를 그 구덩이 속에 잘 묻어두고 겨우내 조금씩 꺼내 먹었다.

  

무엇보다 한겨울에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를 꺼내 먹을 땐 식탁 위에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맛있었다. 나는 김치가 땅속에서 발효되며 생기는 특유의 군내를 무척이나 싫어하는데 동치미만큼은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다.

 

김치 냉장고가 생겨서 아쉬운 점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묵은지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는 점이다. 이상하게 김치 냉장고에서 발효된 김치는 진정한 묵은지의 맛이 나질 않는다. 내가 요리 전문가가 아니라서 자세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김치 냉장고에서 꺼낸 묵은지와 내 기억 속에 새겨진 묵은지의 맛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문명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만큼 시나브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는 게 그저 아쉬울 뿐이다.

 

*

 

요즘은 김치를 사 먹는 게 너무 익숙하고 당연하다. 그만큼 편리하고 맛도 좋다. 게다가 김장에 쏟는 시간과 정성 그리고 노동이 많이 고되다는걸 알기에 섣불리 배워볼 엄두도 나지 않는다. 김장 전쟁이 끝나고 쓰러지듯 잠들어 있는 엄마를 보면서 문득, 과연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김장을 경험해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날 저녁, 자꾸만 김장김치로 향하는 젓가락질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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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은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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