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 [영화]

감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풀잎들
글 입력 2021.11.14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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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에 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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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김민희)은 골목 안쪽 작은 카페의 구석에 앉아있다. 카페에는 사람들이 대화를 나눈다.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먼저 홍수(안재홍)와 미나(공민정)가 마주 앉아있다. 그녀는 안부를 묻다가 격앙된 목소리로 말한다. “넌 승희 생각하니? 난 승희가 너무 불쌍해. 승희가 너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해.”

 

한숨을 뱉는 홍수는 너는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대답한다. 그들 사이에는 ‘승희’라는 친구의 자살이 있었던 모양이고, 미나는 그녀의 죽음을 홍수에게 탓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홍수의 대답으로 미뤄봤을 때 그녀의 죽음에 미나 자신도 연관되어 있어 보인다.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아름은 키보드를 두들긴다.

 

 

‘텔레비전에 본 것과 다르게 성깔 있게 보이는 배우. 사연이 있겠지. 누가 그 속을 알겠는가. (…) 친구는 그 죽음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저 배우를 족치고 싶은 거고 남자는 두려운 거겠지. (…) 텔레비전으로 보는 사람들은 저 배우의 얼굴에서 그 그림자를 볼 수 없을 것. 이제 저 배우는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다시 사랑에 빠져서 순수하게 사랑할 수 있을까?’

 

 

이어 창수(기주봉)와 성화(서영화)가 마주 앉아있다.

 

“괜찮으세요?” 성화의 물음에 자신이 자살 기도를 했다는 창수. “여자를 사랑했는데, 어떻게 할 수가 없더라고. 죽음밖에 생각이 안 나더라고.” 상황도 어려워진 창수는 성화에게 자신의 거처를 부탁하지만 성화는 어렵게 그의 부탁을 거절한다.


또다시 아름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이 사람도 배우였구나. 비참하다. 구겨지고 또 구겨지고 돈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일도 없고. 친구도 없을까? (…) 이제 방 하나를 찾고 있구나. 예쁜 후배한테 얹혀살고 먹을 것도 얻어먹고 그 집 앞의 산으로 산책도 다니고, 그러고 싶은 거겠지. 왜 사랑은 찾지 못하셨나요?’

 

 

그녀는 냉소적으로 그들의 처지를 판단하고 있다.


카페 테라스에는 경수(정진영)와 지영(김새벽)이 마주 앉아있다. 연극배우를 하던 경수는 시나리오를 쓰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작가 지영에게 함께 글을 써보자고 제안한다.

 

“아니요. 저는요, 제 글 쓰는 것도 너무 힘들어요. 그냥 혼자 쓰세요. 원래 글은 혼자 쓰는 거예요.” 지영은 단호하게 거절한다.

 

안부를 주고받던 지영은 요즘 연애를 하고 있다고 말한다.

 

“좋다. 사랑이 최고야! 나머진 뭐, 다 그게 안 되니까 하는 거야.” 이에 경수는 밝게 화답한다.


지영이 자리를 뜬 후 경수는 카페 문을 열고 아름에게 다가간다.

“실례합니다. 절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 혹시 절 쳐다보신 거 맞나요?”

“아 네, 예전에 무대에서 뵌 거 같아서요.”

“그랬군요, 예, 맞습니다.”

 

인사를 나눈 경수는 쓰고 있는 글을 보여줄 수 있냐고 묻지만 아름은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며 거절한다. 경수는 그녀가 비범해 보인다며 그녀를 열흘 정도 자세히 관찰하고 글을 써보고 싶다는 엉뚱한 제안을 하는데, 이에 아름은 거듭 거절한다.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고 나오는 아름의 독백은 연극 무대 위의 선 인물들에게 조명을 쏜 채 내레이션이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홍수와 창수, 경수 세 남자는 공통적으로 배우라는 직업을 가졌으므로 카페라는 공간은 의도적으로 연극 무대처럼 연출되고 있다.

 

인물들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면서도, 심지어 창수-성화와 경수-지영은 친분이 있음에도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며 그들을 지켜보고 대화를 엿듣는 것은 아름뿐이다. 그러나 아름은 카페 안에 있으면서도 무대 위의 인물이 아닌, 철저히 관찰하는 사람 관객의 역할을 하고 있다.

 

 

 

무대 밖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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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온 아름은 주변 식당에서 동생 지호(한석호)와 그의 연인 연주(안선영)과 식사를 한다.

아름은 연주에게 묻는다.

“얘가 진짜 누군지 모르는데 결혼 생각을 해요?”

“누군지 다 알고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동생 지호는 멋쩍게 대답한다.

 

“결혼하려면 진짜 서로 잘 알아야지.”

“누나. 그냥 사랑하는 거야.”

“모르면 결혼하면 안 돼. 어차피 해도 실패야. 사랑은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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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등장하는 장면은 같은 식당 안에서 재영(김명수)과 순영(이유영)이 마주 앉아있다. 그런데 앞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던 장면들과는 달리, 재명은 시종일관 등을 보이고 있고 순영의 앞모습만 보인다. 그들 사이에도 죽은 사람이 있고 재명은 그의 죽음이 순영 탓이라고 말하고 있다.

 

“당신 때문에 그 사람이 죽었어. 사랑? 사랑 좋아하네.”

“우리 사랑한 것뿐이에요.” 순영이 흐느끼고 있다.


발랄한 합주가 흘러나오며 변주가 일어난다. 대화 끝에 벽에 비친 재명의 그림자는 어쩐지 유령의 모습처럼 섬뜩하게 느껴진다. 카페에 빠져나오면서 뒤를 계속 돌아봤던 아름의 뒷모습이 저 벽면에 걸린 걸까. 아름이 홍수의 얼굴에서 보았던 두려움은 저 그림자와 닮았을까. 자신의 거처를 부탁하는 창수의 비참함은? 사랑으로부터 두려워하고 부정하는 얼굴들은 저 그림자에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사랑을 하고 있는 지호와 연주는 카페에 들어오지 않는다. 보통 남자들은 비겁한 것 같고 지호는 그렇지 않다는 연주의 말처럼, 지호는 카페에 있는 세 남자(홍수, 경수, 창수)와 달리 말간 모습으로 무대 밖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연극 무대에 들어온 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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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어 아름은 카페로 돌아온다. 사람들이 모여서 물 잔에 소주를 담아 먹고 있다. 그들은 안부를 나누고 경수는 거처가 없는 창수에게 자신의 집 서재에서 지내기를 권유한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아름의 독백이 흘러나온다.

 

 

'사람들이 만나는구나. 서로 감정이 부닥치고. 감정으로 힘을 내고. 아무 상관도 없던 삶이 엮어지고. 서로 같이 서서 있게 되는구나. 숨겨서 먹는 소주가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일까. (…) 왜 저렇게 친하게 구는 걸까? 저게 정말일까? 정말이면 정말 좋겠다. 결국은 사람은 감정이고, 감정은 너무 쉽고 너무 힘 있고 너무 귀하고 너무 싸구려고 너무 그립다. 그렇다, 지금은.'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그러나, 뜨거운 가슴에 들뜨는 존재.  

그저 하는 일이라곤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어두운 포유동물, 빗질할 줄 아는 존재라고 공평하고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


인간이 때로 생각에 잠겨 

울고 싶어 하며, 자신을 하나의 물건처럼 

쉽사리 내팽개치고, 

훌륭한 목수도 되고, 땀 흘리고, 죽이고 

그러고도 노래하고, 밥 먹고, 단추 채운다는 것을 

어렵잖게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이 진정 

하나의 동물이기는 하나, 고개를 돌릴 때 

그의 슬픔이 내 뇌리에 박힌다는 점을 고려해볼 때……


인간이 가진 물건, 변소, 

절망, 자신의 잔인한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 하루를 지우는 존재임을 생각해볼 때……


내가 사랑함을 알고, 

사랑하기에 미워하는데도, 

인간은 내게 무관심하다는 것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인간의 모든 서류를 살펴볼 때, 

아주 조그맣게 태어났음을 증명하는 서류까지 

안경을 써가며 볼 때……


손짓을 하자 내게 

온다. 

나는 감동에 겨워 그를 얼싸안는다. 

어쩌겠는가? 그저 감동, 감동에 겨울 뿐……


바예호 시선집, 《희망에 대해 말씀드리지요》<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문학과지성사, 1998

 

 

괜찮으면 이리로 오라는 경수의 제안에 아름은 대답한다. “전 여기가 좋네요. 여기서 얘기 엿듣는 게 좋아요.”


담배를 피우러 나간 아름은 진호와 연주를 보게 된다. 늦은 저녁에 한복을 입고 벽에 서서, 플래시를 터뜨리며 사진을 찍고 있는 진호와 연주.

 

아름은 이들을 잠시 바라보다 웃음소리를 뒤로한 채 사람들 사이에 앉는다. 존 버거는 희망은 이빨 사이로 깨무는 희망이어야 한다고 했다. 가을밤에 먹는 깡소주는 비할 데 없는 것이다. 아름은 사람들과 함께 연극 무대로 올라가고 있다.


 

[박수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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