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그림책에 대한 오해를 작정하고 풀어주는 인터뷰집 -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글 입력 2021.11.1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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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책에 대한 첫 번째 오해: 양적 가성비


 

서재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서 내가 서재로 여기는 2단짜리 선반 두 개를 이어 붙인 4단짜리 책 선반에는 그림책이 단 한 권도 놓여있지 않다. 서점에 가면 빈손으로 나오는 법이 없는 편인데도 여태껏 그림책은 손이 안 갔다. 가성비가 안 나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빨리 읽으면 30분 만에도 휘리릭 넘기며 읽을 수 있으니까. 잘하면 서점에서 있는 그 자리에서 다 읽어 버릴 수도 있다. 읽기 쉽다고 창작과정까지 쉬운 건 아닐텐데도 양이 적어 돈이 아까웠다.


‘그림책의 가성비'에 대한 단순한 인식은 유럽부터 한국까지 여러 그림책 작가들을 인터뷰해 온 인터뷰어 최혜진 작가의 깊이 있는 인사이트 덕에 바꿀 수 있었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그림책 작가들이 가진 특수한 능력에 감복한다. 바로 아낌없이 버리는 능력이다. 최종적으로 실릴 그림은 스무 장뿐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떤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생각을 끈질기게 펼쳐낸 다음(이들에게 생각을 펼친다는 건 그려본다는 뜻이다), 진부하거나 구체화하기 어렵거나 기대와 다른 효과를 내는 아이디어를 버린다. 처음 그림책 작가들을 취재할 때, 작가의 서랍에 보관된 수많은 스케치들, 원화 B컷들, 견본책들이 너무나 아깝게 느껴졌다.” 208p.


에디터라는 직무상 카피 쓰는 일이 많은 나는 문장을 짧게 쓰는 것의 어려움을 참 잘 알고 있어서 공감이 갔다. 선택되지 못한 카피들의 무덤이 지금 내 메모장에 한가득 있다. 글 한 편을 쓸 때도 형용사나 부사를 덜어내기가 가장 어렵다. 더 안 꾸미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일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결국 군더더기를 덕지덕지 붙여 장황하게 늘어놓게 되는 일도 그래서다. 그림책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고 나니 그들이 30~50쪽 내외로 핵심적인 이야기만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덜어냈을지, 그렇게 걸러진 이야기들은 얼마나 정수 같은 것일지 궁금해졌다.

 

 

 

2. 그림책은 어린이들만 읽는 것이다?


 

나처럼 그림책은 아이들만 읽는 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 많나 보다. 구매력 있는 어른들이 사지 않으니 가뜩이나 좋지 않은 출판 시장에, 그림책 시장은 더 안 좋다는 것이다. 그림책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의 씨앗은 카테고리의 분류부터 심어졌다. 그림책은 아동 도서 시장의 카테고리 아래에 있다. 아동 도서 시장은 아동 문학, 전승문학, 전기, 학습만화, 논픽션지식 등으로 나뉘고, 아동 문학의 하위 카테고리에 그림책이 놓인다.

 

최혜진 작가에 따르면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이 국제적으로 권위 있는 상을 휩쓸기 시작한 2010년대 중반에도 ‘그림책 작가는 1쇄 작가'라는 자조적 농담이 오갔다고 한다. 게다가 다른 소설, 시, 회화, 사진 등의 분야에 비해 그림책 창작자에 대한 연구나 지원 제도도 미흡하다고.

 

그림책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용감하게 바라보며 어른들이 잃어버린 용기를 발견하도록 돕는다.

 

“모든 심리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계속 무언가를 시도하고 배운다. 넘어지고, 망치고, 혼나고, 울어도 세계를 알아가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체념의 문장은 어린이의 것이 아니다. 아이는 세계를 믿는다. 믿기 때문에 냉소하지 않고 성장한다. (...) 다음에 올 사람에게 세계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려 노력하는 그림책이 모두에게유효한 예술 장르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복잡하고 거대하고 낯선 세계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내느라 고군분투할 때, 어떤 가치를 믿고 붙들어야 할지 막막할 때, 그림책은 아름다운 은유로 다시 한번 믿어볼 용기, 일어날 용기를 북돋워준다.” p.15


이 책은 그림책에 관한 억울한 오해를 풀어주기 위해 작정하고 제대로 만든 그림책 작가 특집 인터뷰집이기도 하지만 그림을 놓지 않는 어른들의 노련한 지혜와 용기가 담긴 책이기도 하다. 생계를 위한 활동이 필수인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하는 힘은 무엇일까? 하는 물음에서 그림책 작가들 10명과의 인터뷰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돌파하는 힘'이라는 공통된 주제 아래에 '과정', '의문',' '자립' 등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법한 키워드로 각각의 인터뷰가 진행된다.

 

결혼 후 경제적인 이유로 시댁살이를 하면서 집안 곳곳을 그리며 그림책이라는 돌파구를 찾은 권윤덕 작가의 핵심 키워드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 용기를 내는 방법'으로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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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경우의 수 앞에서 자기 느낌대로 첫걸음을 떼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에요. 다만 한 획을 긋고 나면 다음은 조금 쉬워지지요.” p.28

 

 

 

3. 동화책의 세상은 너무 평온하기만 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게 아기자기한 거북이 캐릭터로 세상을 은유해서 보여주는 유설화작가에게 이 질문이 돌아갔다. ‘동화나 그림책은 현실의 비극적인 면이나 잔혹한 면을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는 평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라고. 아래는 내 오해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동화나 그림책 장르를 향해 다큐나 르포처럼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지 않아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평한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동화나 그림책은 인생의 비참함이나 슬픔을 외면하지 않아요. 다만 아이들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눈높이를 맞추려고 노력할 뿐이에요. 현실의 냉혹함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도록, 받아들이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마음의 여지를 마련해주는 거예요.” p.66


반면 내용만 슬쩍 봐도 어둡고, 마음이 불편해지는 그림책도 있었다. 다음 세대에게 이 세계에 대한 신뢰를 주는 일은 ‘좋다고 여겨지는 일반적인 도식'을 배반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소윤경 작가에게서 알게 됐다. 세계는 때론 더럽고, 비참하고, 들춰보기에는 끔찍한 뒷모습이 있다. 소윤경 작가는 그림을 통해 ‘표면의 현실'을 서술한다. 이를테면 대표작 ⟪레스토랑⟫, ⟪호텔 파라다이스⟫에서는 다채로운 맛을 즐기는 일류 레스토랑의 접시 위에 올려져 있는 스테이크가 어떤 경로를 통해 공급되었는지 글이 외면하는 것을 그림을 통해 보여준다. “이게 정말 맛있는 건가?” 질문하며 다른 가능성에 대해 알려준다.

 

세계에 대한 신뢰를 주는 일은 끔찍한 현실을 알리고, 누군가는 이를 외면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 폭력적인 면을 보여줘도 괜찮을까? 소윤경 작가는 답한다.

 

“많은 어른이 현실을 솔직하게 묘사한 책에는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정작 아이들이 진짜 현실에서 만나는 폭력은 방치해요. 가정 폭력, 학교 폭력, 일상생활에서 어른들이 타인을 향해 내지르는 욕설과 분노, 유튜브에서 보는 적나라한 영상을 걱정해야 하죠."

 

*


이 책을 통해 나는 오랫동안 묵혀왔던 그림책에 관한 오해를 풀었다. 한 인터뷰이와 4시간 동안 인터뷰를 할 만큼 공들여 진행하고 편집한 인터뷰 내용도 좋지만, 최혜진 작가가 인터뷰 전후에 인터뷰이를 소개하고 인터뷰 소감을 두 페이지 내외로 정성들여 적은 부분에서 그림책에 대한 애정이 느껴져서 좋았다. 그림책에 대한 애정이라기 보다는 그림책 작가들이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애정이 더 맞는 설명일 것 같다. 조만간 책 속에 소개된 그림책 중 눈길이 머문 그림책 몇 권을 사러 가야겠다. 글로는 다 담지 못하는 세계를 표현한 그림을 오래오래 들여다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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