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공간과 장소 [영화]

영화 <더 파더>(플로리앙 젤레르, 2020)
글 입력 2021.11.12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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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학자 이-푸 투안은 저서 <공간과 장소>에서 두 개념(공간/장소)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공간은 장소보다 추상적인 개념이며, 공간이 객관적인 추상성을 지닌다면 장소는 공간이 주관적 체험과 합쳐진 구체성을 지닌다. 즉 장소라는 개념의 핵심은 그 공간을 점유한 인간이 부여하는 ‘시간성’이다. 바꿔 말하면 그 시간성이 붕괴하는 순간, 장소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마는 셈이다.


영화 <더 파더>는 가장 익숙한 장소가 점차 미지의 공간으로 변하는 공포를 그린다. 치매를 앓는 주인공 안소니의 기억이 점차 사라짐에 따라 (그가 인식하는) 집의 구조는 하루아침에 바뀌고, 함께 사는 가족들은 때로 전혀 모르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안소니는 자신의 집이 공간으로 전락하는 것에 애써 저항하지만, 병은 속절없이 그의 기억을 좀먹는다. 그가 영화 내내 자신의 손목시계에 집착하는 모습은 자신의 시간성을, 나아가 집이라는 장소를 지켜내려는 애처로운 노력이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안소니는 자꾸만 그의 시계를 잃어버린다.

 

집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인 동시에 안소니의 경험과 기억으로 축조된 가상이자 그의 또 다른 형태다. 즉 그가 집이라는 공간에서 경험한 모든 것이 장소의 일부다. 집의 구조뿐 아니라 집에 있는 물건과 소품, 심지어는 거기에 있는 사람들도 장소에 포함된다. 안소니의 상황에 따라 집의 내부 구조가 바뀌고, 물건들의 위치나 상태가 달라지고, 가족들의 모습이 변하는 것은 모두 그의 장소가 변화하고 해체되는 과정이다. 이 영화에서 집은 일종의 유기체이자 또 다른 주인공인 셈이다.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을 제외하면 철저하게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여준다. 작품의 원전이 플로리앙 젤레르 감독 본인의 희곡인 만큼 연극적인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데, 영화가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는 만큼 희곡 연출의 방법론은 유의미한 성과를 보인다. 오늘날 프랑스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기도 한 감독은 치밀하게 설계한 세트와 인물의 심리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품, 그리고 복잡하고 흥미로운 각본으로 제한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을 몰입감 있게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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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긴박한 클래식 음악과 함께 안소니의 딸 앤이 그의 집으로 향하는 장면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무슨 일이 생긴 듯 서둘러 집에 들어온 앤은 복잡한 집 안을 누비며 안소니를 찾는다. 방에서 헤드폰을 낀 채 음악을 듣느라 앤의 외침을 듣지 못하는 안소니. 앤이 거칠게 방문을 열자 안소니는 헤드폰을 벗고 앤을 바라본다. 안소니가 헤드폰을 벗을 때 음악도 끊기는데, 앤의 불안한 심리를 드러내는 것 같았던 음악이 그저 안소니가 편안한 자세로 감상하던 음악이라는 사실은 두 사람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낸다. 사건이 전개될 공간의 구조와 인물의 관계를 담아낸 짧은 오프닝은 공간의 (실질적) 주도권이 안소니에게 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관객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안소니의 정신이 온전치 못하며 영화에 등장하는 집 또한 그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특히 안소니가 자신의 딸을 알아보지 못하는 장면에서 감독은 딸의 얼굴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연출을 이용해 그의 병세가 꽤 심하다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이후 영화는 몇 개의 스틸 샷으로 집의 내부를 보여주는데, 기이하게도 집의 구조는 그 전과 조금 달라져 있다. 중요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식의 연출은 연극의 막을 대신하는 요소다. 막이 내릴 때마다 집에는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나는데, 첫 번째 막이 끝나면 따뜻한 베이지 톤이었던 집의 내부는 어느새 전체적으로 파랗게 바뀐다.

 

파란색은 그의 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색채다. 영화는 파란색을 기본으로 깔고 붉은 계열의 색으로 포인트를 준 화면을 주로 사용한다. 두 색깔은 당연하게도 대비되는 의미를 지니는데, 파란색은 나약함과 죽음을 의미하고, 붉은색은 권위나 존엄함의 상징으로서 파랑에서 벗어나는, 혹은 파란색을 감추는 식으로 사용된다. 예컨대 주인공 안소니는 잠자리에 들 때나 혼자 있을 때는 파란색 옷을 입지만, 자신의 존엄을 보여야 하는 순간에는 붉은색 외피로 파란색을 감춘다. 새로운 간병인 앞에서 애써 자신의 병세를 감출 때도 그는 붉은 가운으로 파란 셔츠를 가리고 있다. 안소니의 병세가 심해지기 전까지는 딸 앤과 그녀의 남편이 파란 옷을 입고 있는 것도 (가장으로서) 자신이 두 사람보다 위에 있어야 한다는 안소니의 생각을 반영하는 장치로 보인다.

 

파란색의 소품들이 작중에서 어떻게 다뤄지는지를 살펴보면 파란색의 의미는 좀 더 분명해진다. 예컨대 영화의 초반부에는 안소니가 파란색의 비닐봉지에서 물건을 꺼낸 후 비닐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신의 주머니에 넣는 장면이 있는데, 내용물이 없는 파란 비닐봉지는 기억을 잃은 채 나약한 껍데기만 남은 자신의 처지를 은유한다. 이외에도 간병인 로라가 ‘파랑이 알약’을 드실 시간이라고 말하자 ‘자신을 장애아 취급하지 말라’며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는 장면은 안소니에게 파랑이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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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안소니가 자신의 나약함과 다가오는 죽음을 조금씩 받아들이는 과정인 후반부는 그가 자신의 붉은색을 빼앗기는 과정이기도 하다. 병세가 심해지면서 안소니는 붉은 스웨터를 혼자서 입지 못해 딸 앤의 도움을 받는다. 또한 딸 내외가 자신 때문에 싸우는 것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그는 붉은 옷을 입은 채 파란 옷을 입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데, 그의 권위와 자존심이 딸의 미래를 불안하게 한다는 것을 깨달은 안소니는 말없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두 번째 막이 끝나는 이 지점에서 영화는 다시 한번 집의 내부를 보여준다. 한층 어두워진 집 안, 벽에 걸려 있다가 바닥에 떨어진 그림, 책이 빠져 있는 책장은 안소니의 상태를 은유한다. 이후 병세가 더욱 심해진 안소니는 붉은 겉옷을 걸치지 않은 채, 파란 잠옷 차림으로 사람들을 만난다.

 

흥미롭게도 이 시점부터 딸 앤은 파란색 계열의 옷을 잘 입지 않는다. 앤서니가 나오지 않는 장면(안소니의 시점에서 바라본 그의 집이 인식과 경험으로 축조된 가상의 장소라면, 그가 화면에 등장하지 않을 때 그의 집은 객관적인 현실 또는 외부 세계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에서 앤은 노란색 옷을 입기도 하고, 파란 잠옷 차림의 앤서니와 아침 식사를 하는 장면에서는 하얀색 옷을 입기도 한다. 또한 앤의 남편(이지만 안소니의 눈에 그는 때로 요양원의 남자 간호사로 보인다)이 안소니의 뺨을 때리는 장면에서 그는 전과 달리 검은색 옷을 입고 등장하는데, 상기한 요소들은 이 집에서 안소니의 지위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단서다.

 

이어지는 네 번째 막. 텅 비어버린 집을 어둠이 새파랗게 물들일 때 잠에서 깬 안소니는 그동안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던 방의 문을 열고, 영화에서 가장 극단적인 파란색을 마주한다. 그의 눈앞에는 사고로 죽은 둘째 딸이 입원해 있었던 병원의 풍경이 펼쳐진다. 급하게 걸친 붉은색의 가운마저 끈적한 핏빛으로 만드는 파랑 속에서, 안소니는 애써 외면했던 둘째 딸의 죽음을 다시 경험한다. 잊고 싶었던 것은 잊지 못하고, 자신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기억하지 못하는 혼란 속에서 그가 정신을 차린 곳은 한적한 요양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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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와 함께 들어온 앤은 붉은색 코트를, 안소니는 파란 잠옷(환자복)을 입은 채 영화 초반부의 대화를 그대로 반복한다. 그러나 대화의 주도권은 처음과 다르게 딸에게 있다. 앤은 결국 자신의 삶을 위해 요양원에 아버지를 맡긴 후 집으로 향한다. 요양원을 떠나는 그녀의 모습을 담은 풀샷은 앞서 다뤘던 영화적 요소들을 집약한다. 파란색의 입구를 사방에서 감싸는 붉은색 건물과 깨어진 얼굴처럼 생긴 조각상을 등지고 걸어 나오는 앤의 눈에는 아버지를 버렸다는 죄책감과 그에게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뒤섞인다.

 

영화의 마지막, 하얀 티셔츠 차림의 안소니는 그의 방에 들어온 간호사에게 독백 같은 질문을 던진다. 붉은색의 권위도, 파란색의 나약함마저도 잃어버린 그는 매일같이 반복하던 ‘너는 누구냐’는 질문 대신, ‘나는 대체 누구냐’는 질문을 던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잘게 깨어진 기억의 파편마저 풍화하여 흩어지자, 그는 속절없이 허물어지며 어머니를 찾는다. 간호사에게 안긴 채 우는 안소니를 비추던 카메라는 천천히 창문을 향해 움직인다. 카메라는 불투명한 창문을,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프레임을 넘어 나뭇잎 사이에 숨은 한 줌 하늘을 화면에 담는다.

 

*

 

본문에서 다룬 것 외에도 영화는 다양한 장치를 이용해 인물의 상황을 치밀하게 시각화한다. 기록된 내용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다가 점점 닳아 가면서 원음을 상실하는 CD로 인물의 상태를 은유하기도 하고, 조명을 활용하여 미묘하게 변하는 인물의 심리 상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안소니의 조각난 기억들이 제멋대로 합쳐지고 떨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 같은 각본도 빼놓을 수 없다. 인물의 대화는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변주되고, 같은 상황 안에서 시제가 미묘하게 뒤틀리기도 한다. 쉼 없이 뒤틀리면서도 전체적인 맥락은 감추지 않는 각본은 관객이 안소니의 입장에서 혼란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영화 내의 사건이 안소니의 어떤 기억들이 섞인 것인지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 영화를 크리스토퍼 놀란의 <메멘토>(2000)처럼 사건의 선후 관계를 집요하게 파악하는 방향으로 독해하는 것을 권하지는 않는다. 영화의 핵심은 반복되고 파편화된 자신의 기억에서 길을 잃은 주인공의 공포와 혼란을 함께 느끼는 것이기에, 장면을 분석하여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한 영화에서 신경질적인 중년, 나약한 노년, 유년기의 아이를 모두 보여주며 필멸의 삶을 압축하는 안소니 홉킨스의 연기와 통제가 불가능한 이를 부양하는 자의 현실적인 아픔과 고뇌를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눈물로 담담하게 묘사하는 올리비아 콜먼의 섬세한 연기. 두 사람의 상반되는 에너지에 한껏 몰입하는 것이 이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컬쳐리스트 박호연.jpg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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