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하트 쿠키와 핫 초콜릿 [영화]

하트 쿠키를 사게 만드는 사람과 핫 초콜릿 같은 사랑. <버팔로 66>
글 입력 2021.11.10 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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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평생 어린아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 아이 같은 두 사람이 있다. 사랑을 받아 본 적도, 제대로 줘 본 적도 없는 아이 같은 남자와 아이 같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여자. 세상 풍파를 모두 맞아 본 듯한 피곤하고 날카로운 눈을 가진 남자는 첫사랑에 빠진 아이로 변한다. 1998년 작 <버팔로 66>은 지금 보아도 세련된 색감과 연출 안에서, 진한 키스신 한번 없이 사랑의 순수함과 설레임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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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남자 주인공 ‘빌리 브라운’이 감옥에서 출소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빌리의 걸음걸이를 보여주는 롱 숏, 소변이 급해 화장실을 찾아보지만 결국 찾지 못하는 빌리의 신경질적인 표정을 보여주는 클로즈업으로 이루어진 오프닝 시퀀스는 빌리의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성격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에 큰돈을 건 내기에서 진 주인공 빌리는, 같은 쪽에 내기를 걸었던 사람들을 대신해 무고하게 감옥에 들어간다. 인생살이 잘 풀리는 것 하나 없는데, 화장실을 가는 일마저 본인 뜻대로 되지 않는 빌리의 삭막한 심정을 대변하듯, 영화 초반의 화면은 대체로 회색 조의 색감을 띈다.


차마 부모님께 내기에서 지고 돈이 없어 감옥에 갔다고 말할 수 없었던 빌리는, 수감 생활 내내 부모님께 거짓 편지를 보낸다. 결혼해 잘살고 있는 ‘척’을 했던 빌리는, 출소 후 부모님과의 전화 통화에서 가상의 신부를 직접 만나보고 싶어 하는 부모님에 난처함과 부담스러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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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잡한 심정으로 전화를 마무리한 빌리는 짜증을 내며 공중전화가 있는 건물을 나서려던 참에, 발레 수업을 마치고 건물 밖으로 나가던 레일라와 마주친다. 빌리는 충동적으로 레일라를 납치해 도로변에 주차된 차에 밀어 넣는다. (물론 이 차는 빌리의 차가 아니다)


빌리는 레일라에게 자신이 소변을 보고 올 때까지 차 핸들에 팔을 올리고 있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황당한 요구를 하고, 돌아온 뒤에는 레일라에게 자신의 아내 역할을 하고 부모님을 함께 만나러 가야 한다고 말한다. 빌리의 신경질적인 모습과 협박은 위협적이라기보다 어린아이가 떼쓰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도망갈 법도 하지만 레일라는 빌리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가죽 부츠에 낡은 재킷을 입고, 신경질적이며 가진 것은 없으면서 자존심만 세고,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남자와 파란 아이섀도우를 칠하고 하늘색 원피스를 입은 어딘가 맹해 보이는 큰 눈의 금발 여자는 도통 어울리지 않는 뜬금없는 조합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조금 이상한 동행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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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는 우여곡절 끝에 레일라와 함께 부모님 댁을 찾는다. 빌리의 가정은 정상적이지 않다. 빌리의 어머니는 풋볼 경기만 광적으로 시청하며 빌리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는다. 영화의 제목인 <버팔로 66>은 빌리의 어머니가 우승할 거라고 응원하던 미식축구팀인 ‘버팔로 빌즈’의 1966년 슈퍼볼 경기 결승에서 따온 것이다. (버팔로 빌즈는 해당 경기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빌리의 아버지는 과거에 가수였지만, 빌리에게는 냉정하기만 하다. 본인에게 무관심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빌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전해 받은 적 없으며, 당연히 남들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다. 빌리의 어머니, 아버지, 빌리, 레일라가 둘러앉은 식탁에서의 대화 장면은 다소 특이한 방식의 쇼트 바이 쇼트로 촬영되었는데, 이를 통해 빌리가 느끼는 답답함과 침울한 심정이 강조된다.


레일라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야 할 집에서조차 사랑과 관심을 받지 못하는 빌리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큰 관심이 없는 빌리의 부모 앞에서도 레일라는 열심히 빌리를 칭찬한다. 그날 처음 만난 빌리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레일라는 빌리는 다정하고 친절한 최고의 남자라며 빌리가 평생 들어본 적 없던 칭찬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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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 66>의 장면 중 가장 잘 알려진 장면인 포토 부스 신에서, 다정한 부부인 척 부모님께 보낼 사진을 찍자는 빌리의 말에 레일라는 빌리의 이마에 뽀뽀한다. 하지만 빌리는 화들짝 놀라며 레일라를 밀어내며 뭐 하는 짓이냐고 타박하며 사진을 다시 찍자고 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빌리의 내면이 어린 소년 시절에서 성장하지 못했음을 엿볼 수 있다.


성인의 연애에서 스킨십은 곧 사랑과 직결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이 주는 떨림만으로 충분했던 소년과 소녀는 성장하여 사랑에는 떨림 그 이상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스킨십이란 곧 상대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닿고자 하는 순수한 욕구를 반영한 한 차원 높은 사랑의 행위이다. 하지만 사랑해본 적 없는 빌리에게 스킨십이란 너무나도 낯선 감각이다. 레일라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낯선 행위에 거부감을 먼저 보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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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버팔로 66>에서 빌리와 레일라 사이의 진한 스킨십 장면이 단 한 신도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빌리와 레일라는 저녁이 되어 함께 호텔에 투숙하게 된다. 빌리는 레일라에게 자신은 다른 사람과 함께 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빌리에게 ‘욕실’은 곧 자신의 마음이다. 평생 외로웠던 빌리이기에, 욕실에 타인을 위한 자리를 내 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일라는 이 경계를 허문다. 욕조 안에 외로이 앉아 있는 빌리의 맞은편에 레일라가 들어가 앉는다. 쇼트 속에서 빌리와 레일라는 서로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모나고 신경질적인 성격 속에 숨어있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본 레일라는 결국 빌리에게서 소년을 끄집어낸다. 욕조에서 나온 후 서로 마주 본 상태로 누워있다가 팔을 베고 두 사람이 잠드는 장면은 관객이 여느 영화의 러브신보다도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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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팔로 66>의 후반부 5분은 달콤하고 사랑스럽다. 무고하게 옥살이를 한 빌리는 자신을 감옥에 가게 한 이를 찾아 죽이려고 한다. 수소문 끝에 그를 발견한 빌리는 한 스트립 클럽에서 초라하고 외로워 보이는 거구의 남자를 마주한다. 영화 내내 세상을 향한 방향 없는 분노에 휩싸여 있던 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죽이려 한 남자를 마주한 순간 분노를 잃는다.


어쩌면 빌리는 남자의 모습에서 외로웠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외롭기에 세상을 미워했던 빌리는 더는 외로워하지 않는 자신을 자각한다.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이라는 감정을 스스로 자각한 빌리는 공중전화 부스로 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엄청 예쁘고 착한 여자가 자신을 좋아해 준다며 들떠서 자랑한다.

 

영화 초반 부모님에게 거짓으로 꾸민 말을 전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공중전화는 이제 사랑에 빠진 이의 감정을 친구에게 자랑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사랑으로 인해 삶을 살아갈 의지가 생긴 빌리는 친구에게 버리려 했던 자신의 물건을 그대로 놔두라고 소리친 뒤, 레일라가 먹고 싶다고 했던 핫 초콜릿을 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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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진 이의 눈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스크린 속에는 영화 초반부 신경질적이었던 빌리는 사라지고, 핫 초콜릿을 주문한 후 옆에 놓인 하트 쿠키를 눈여겨보는 남자가 있다. 귀여운 하트 쿠키를 보며 이런 건 누가 만들었을까요? 라고 물은 빌리는, 하트 쿠키도 하나 주문한다.

 

빌리는 하트 쿠키 한 개를 주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게에 앉아있던 중년의 남성에게도 여자친구에게 주라며 하트 쿠키를 사 준다. 경쾌한 발걸음으로 가게를 나가는 장면에서 빌리의 품에 레일라가 안겨있는 장면으로 전환되며 영화는 끝난다.


<버팔로 66>은 우리가 잊고 있던 사랑의 본질을 생각해보게 한다. 사실 사랑은 참 단순한 것이다. 나를 바꾸고 절대 할 일없을 것만 같았던 유치한 행동을 하게 하는 것. 빌리와 레일라는 하트 쿠키를 사고 싶게 만드는 사람과 하는 달콤한 핫 초콜릿 같은 사랑을 꿈꾸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빌리’ 같은 이들에게 ‘레일라’와 같은 존재는 이상적인 사랑의 모습이다. 레일라는 모난 내 속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고독한 나에게 사랑을 주어, 결국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이다. <버팔로 66>은 세상의 모든 ‘빌리’로 하여금 사랑을 믿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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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람을 구원한다고 하지 않는가. 사실 구원이라는 건 별다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혼자만 존재했던 외로운 세계에 타인이 함께한다는 것, 그리고 이로 인해 누군가를 위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로운 나를 끌어내는 모든 행동이 차가웠던 삶에서의 구원이다.


<버팔로 66>의 감독인 빈센트 갈로는 배우이자 감독, 모델로 이 영화의 감독을 맡은 동시에 주인공 ‘빌리’ 역을 맡아 연기에도 참여했다. 빈센트 갈로의 감각적인 연출기법과 레일라 역의 크리스티나 리치의 사랑스러운 연기가 더해진 이 영화는 150만 달러라는 저예산으로 촬영되었고, 배우들 역시 매우 적은 출연료나 무급으로 출연하였으며, 그런데도 부족한 예산으로 인해 몇몇 장면은 빈센트 갈로가 성장한 버팔로의 본가에서 촬영해야 했다.


춥고 공허한 겨울, <버팔로 66>은 따뜻한 핫 초콜릿 같은 영화다. 추워지는 날씨만큼 공허해지는 우리의 마음에 빌리와 레일라의 이야기는 온기를 건넨다. 하트 쿠키와 핫 초콜릿 같은 달콤함이 필요하다면 함께 <버팔로 66>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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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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