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흑과 백, 빛과 어둠 (2) [영화]

영화 <콜드 워>(파벨 파블리코프스키, 2018)
글 입력 2021.10.22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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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과 백, 빛과 어둠> (1)과 이어집니다


 

첫 번째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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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폴란드, 전후의 혼란 속에서 민속 악단의 예술 감독 빅토르는 악단의 단원을 뽑는 오디션에서 줄라를 만난다. 단지 먹고살 길을 찾기 위해 악단에 지원한 그녀에겐 대단한 재능은 없었지만, 그녀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느낀 빅토르는 그녀를 단원으로 추천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예술적 소양을 키우며 민속 음악을 보존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빅토르와 달리 불우한 가정에서 자란 줄라는 예술과 음악에 큰 뜻이 없었다. 빅토르에게 음악이 삶의 목적이라면. 그녀에게는 삶의 수단인 셈이다. 두 사람의 삶과 가치관에는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간극이 있었다.

 

악단은 첫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며 명성을 얻었지만, 공동 창립자인 카치마레크(보리스 스직)가 국가의 지원을 받기 위해 공연 레퍼토리에 공산주의를 찬양가를 넣기 시작하면서 체제 선전의 수단으로 전락한다. 예술의 순수함과 자유로움을 동경했던 빅토르는 이념의 논리에 매몰된 악단에 염증을 느끼지만, 줄라에게 악단의 노선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돈만 준다면 극단이 선전에 이용되든 예술을 하든 알 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둘의 분리를 예고하는 첫 번째 균열이었다.

 

두 사람의 ‘첫 번째 빛’인 밀회 장면은 상기한 균열을 시각화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빅토르는 줄라가 카치마레크에게 그의 행적을 보고하는 조건으로 단원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를 버려둔 채 어디론가 향한다.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빅토르는 수직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어두운 숲을 향해 걸어가고, ‘당신에게 해가 되는 내용은 말하지 않았는데 뭐가 문제’냐며, 시대의 질서를 적당히 따르는 삶의 방식을 체화한 줄라는 금속처럼 밝게 빛나는 개천에 몸을 던지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다. 예술과 자유라는 목표를 가진 빅토르에게는 지금의 억압적인 삶 그 이상이 존재하지만, 줄라는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아만 있으면 될 뿐이다. 빛과 어둠, 수직과 수평이라는 대립적인 이미지로 두 사람의 차이를 시각화하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빅토르는 어떻게든 자신의 빛을, 그가 사랑하는 줄라를 자신의 어둠에 가둬놓으려 한다. 그는 그녀에게 함께 망명을 택할 것을 종용하지만, 그녀에게 다른 나라로의 이동은 자신의 삶을 불안정하게 만들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어떻게든 될 것이라 말하는 무책임한 그의 낙관 앞에서, 자신의 재능이 그렇게 뛰어나지 않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대답을 회피한다. 결국 빅토르는 홀로 프랑스로 떠나고, 줄라는 악단에 남는다. 조국에 남기를 선택한 그녀가 악단에서 칼 같은 군무를 추며 공산주의 찬양가를 부르는 동안, 빅토르는 그의 소원대로 자유로운 재즈를 연주하며 다자연애를 즐겼다.

 

 

 

두 번째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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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후, 빅토르의 작업실 문이 열리며 줄라가 나타난다. 문이 열리면서 어두운 공간 안에 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장면은 이전까지 두 사람이 만나던 방식과 확연히 다르다. 그녀는 빅토르를 위해 이탈리아 남자와 결혼하여 아예 폴란드를 떠나왔다. 빛이 들지 않는 밀실이나 밤거리와 같은 어두운 공간에 줄라가 숨어드는 식으로 만났던 그들의 지난날을 생각하면, 빅토르의 밀실에 쨍한 빛이 들어오는 장면은 굉장히 새롭다. 두 사람은 밀회 장면 이후 처음으로 쏟아지는 빛 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파리의 오래된 건물 사이를 거닐며 두 사람은 ‘자유’가 그들에게 가져다줄 앞으로의 행복을 그리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빅토르는 어떻게든 자신의 자유 안에 줄라를 집어넣으려 했고, 그 자유 속에서 그녀는 자유롭지 못했다. 줄라는 빅토르의 강요로 어두컴컴한 라이브 클럽에서 재즈 식으로 편곡된 폴란드 민요를 불러야 했고, 공산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끼고 진짜 음악을 하고자 자유의 나라로 도망쳐 온 가수, 말하자면 폴란드에서 온 에디트 피아프가 되어야 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빅토르의 방만큼이나 기울어져 있었지만, 줄라는 그를 향한 사랑 하나로 타국에서의 삶을 견뎠다. 그녀에게 재즈는 무질서한 소음이었고, 은유는 허세에 불과했으며, 다자연애는 헤퍼 보였다.

 

줄라는 빅토르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보길 바랐다. 과거 아버지를 죽였다는 소문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는 자신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지만, 자유의 나라는 또 다른 억압으로 가득할 뿐이었다. 참다못한 그녀는 빅토르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며 그가 뭔가를 깨닫길 바랐지만, 빅토르는 그녀가 자신만큼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의 자유는 그녀를 속박하고, 그녀의 자유는 그녀를 망가뜨릴 뿐이었다. 결국 지칠 대로 지친 줄라는 말없이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세 번째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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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는 줄라를 만나기 위해 폴란드로 다시 망명하고, 국가를 배신한 죄로 15년의 노동교화형을 받는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며 그녀에게 마음의 짐을 지웠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여전히 이기적이지만, 지금껏 자신의 질서에 줄라를 맞추려 하며 손에 쥔 어떤 것도 놓지 않으려 했던 빅토르가 그녀를 위해 처음으로 자신이 이룬 것을 내려놓는 장면이다.

 

빅토르를 만나기 위해 수용소로 찾아온 줄라는 그를 기다리겠다고 말하며, 그를 수용소에서 빼내기 위해 카치마레크와 결혼하여 아이까지 낳는다. 몇 년 후 빅토르는 그녀와 카치마레크의 도움으로 겨우 수용소를 빠져나오지만, 손가락이 흉하게 일그러지고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진 그는 다시 음악을 할 수 없는 몸이 된다. 모든 걸 잃은 두 사람은 여행을 떠나고, 빛이 드는 예배당에서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올린다.

 

흥미롭게도 이 부분은 영화 초반부에 나왔던 예배당 장면과 정확하게 대비된다(아마 같은 장소로 보인다). 영화의 시작 부분에서 카치마레크는 예배당 안에서 벽에 그려진 이콘(성화)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하늘로 옮기고, 화면은 순서대로 인물-이콘-하늘을 담는다. 반대로 마지막 부분에서는 하늘-이콘-인물(빅토르와 줄라) 순으로 화면에 담긴다. 카치마레크에게 종교적 성화는 이념적 이상 아래에 존재하는 허상이었지만, 두 사람에게 성화는 모든 걸 잃은 그들의 마지막을 관조하는 주체인 셈이다. 성화의 시선으로 주례를 대신하며 결혼식을 마친 두 사람은 동반자살을 위해 약을 먹는다.

 

죽음이 찾아오길 기다리며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멀리 하늘을 바라본다. 흑백의 화면 속에서 해가 지기 직전의 하늘은 빛과 어둠을 한데 머금은 오묘한 회색을 뿜어낸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섞이지 못했던 두 사람의 빛과 어둠이 처음으로 하나가 되는, 황혼의 시간이다. 살아 숨 쉬는 한 남아있는 단 한 줌의 가능성까지 전부 내려놓고 나서야,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처연한 눈으로 한참이나 먼 곳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다른 쪽의 풍경을 보기 위해 자리를 옮긴다. 카메라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고 텅 빈 벤치를 비춘다. 영화 내내 그들을 가둬 두었던 정사각형의 프레임을 두 사람이 벗어나는 장면과 함께, 영화는 끝이 난다.

 

공간의 이동은 이들에게 삶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전쟁의 광기가 지나간 자리에 차갑게 내려앉은 것들은 삶의 터전에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이념을 선명하게 양각한다. 장소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던 시대적 배경 아래, ‘이동’은 그들의 의도가 어쨌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개인적인 신념의 표출로 읽혔다. 맞은편 벤치로 향하는 그들 삶의 마지막 이동의 동기가 그저 ‘저쪽의 경치가 더 좋다’는 지극히 단순한 이유인 것은, 세계를 탈색해 존재의 물성만 남긴 이 영화에 더없이 어울리는 결말이 아닐까 싶다.

 

 

[박호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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