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시험대에 올려진 인생 [영화]

영화 <아워바디>, 한가람 감독, 2019년 개봉
글 입력 2021.10.21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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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차 행정고시생 자영. 번번이 시험에 떨어지면서 모든 의욕을 소진해버린 듯하다.
 
주변 인물들은 그런 그녀의 삶에 제각기 참견을 보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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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의 오래된 남자친구

 
 
경수는 자영과의 기계적인 섹스 후 "공무원은 못 돼도 사람답게 살아야하지 않겠냐"며 연민과 비난이 뒤섞인 눈초리를 보낸다. 그리곤 오래전부터 벗어나길 원했던 것처럼 황급히 자영을 떠난다. 자영 또한 그를 붙잡지 않는다. 이미 결말을 예상했다는 듯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한다. 감정도, 감각도 없이 거칠기만 한 숨소리가 훑고 간 자영의 집엔 공허하고 차가운 공기만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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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의 엄마

 
 
자영의 엄마는 좋은 대학을 나왔음에도 아직까지 번듯한 직장을 가지지 못한 자영을 원망한다. 남들처럼만 살라고 매번 재촉하고 책망한다. 백수보다는 취업준비생, 취준생보다는 비정규직, 비정규직보다는 정규직, 일반 정규직보다는 공무원이 낫다는 식으로 자영을 숨막히게 한다. 이를 벗어난 길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애초에 알고 싶지도 않은 것처럼 '4대보험'의 세계로 자영을 욱여넣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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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영의 친구

 
 
민지는 31살이 되도록 아무것도 하고 있지않은 자영을 보고 선심쓰듯 알바자리를 준다. 취업-승진-결혼이라는 사회적 퀘스트를 클리어한 자신과 달리 목표-노력-달성이라는 보편적 코스에 욕심도 미련도 없어보이는 자영이 왠지 거슬린다.
 
고시생활을 관두고 달리기를 하고 있다는 자영에게 민지는 "운동해서 대회라도 나가게?" 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자영은 너무도 태연하게 "그럴려고 하는 거 아닌데"라고 대답한다. 성취가 목적이 아닌 '그냥 하는' 행위들은 민지의 세계에서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현실의 논리에 익숙한 민지는 자영을 이해할 수 없다. "부럽다. 현실감각 없어서."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지점에서, 민지의 열등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삶의 노선을 제멋대로 이탈해버리는 자영에게, 민지는 깊은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골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렇게라도 자신의 처지가 낫다는 사실을 확인받고 싶은 듯하다.
 
그럼에도 자영의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 계속되자 민지는 정상성에 편입되기 위해 노력했던 자신의 과거가 모두 부정당하는 기분으로 자영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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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동료 희정

 
 
희정은 같은 처지라고 생각했던 자영이 고대 출신이라는 걸 전해듣고 묘한 배신감을 느낀다. "신입이 24살인데" 자기가 인턴에 지원할 수 있겠냐는 자영에 희정은 "뭐 어때요"라며 속편하게 응수한다. 희정이 자영에게 인턴에 지원해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나이'라는 강력한 조건으로 이미 자영을 이기고 있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자영이, '고대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이어린' 자신을 앞지를까봐 두렵다. 두 조건 사이의 저울질에서 누가 승리를 거둘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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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동호회에 만난 현주

 
현주는 작가를 꿈꾸지만 재능 탓인지 자신이 원하는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없다. 집에 쌓인 수많은 원고들이 그 남모를 열정을 말해주고 있으나 현주는 어느 순간부터 가능성을 체념한 듯 보인다. 로또가 당첨되면 평생의 운을 다쓴거같아서 무서울거 같다는 자영의 말에, 현주는 "한번이라도 쓸 수 있다면 좋은거 아닐까"라고 대답한다. 그 속에서, 단한번이라도 출판의 기회가 찾아와주기를 바라는 현주의 간절함이 비춰진다.
 
이렇듯 작가 데뷔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주가 찾은 타협점이 바로 출판사에서 근무하는 것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좋은 직업과 집 그리고 건강한 몸을 가진 현주는 일견 자영의 주변인들이 그토록 선망하는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삶'의 궤도에 들어선 듯 보인다.
 
그러나 영화 내내 그 이면, 그러니까 그녀의 처절한 고독함이 암시된다. 좋은 집에 살지만 그 내부는 어둡고 썰렁하며 좋은 몸을 가졌지만 유지 혹은 더 좋은 몸을 위해 무서울정도로 달리기에 집착한다. 달리고 달릴수록 무엇을 위한 것인지 점점 희미해지고, 그렇게 달리다 현주는 거짓말처럼 죽어버린다.
 
규범에 숨어 자영을 손가락질하기 바빴던 다른 인물들과 달리 늘 스스로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겨누는 듯 했던 현주는 그렇게 순식간에 화면에서 지워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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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자영

 
 
자영은 상식과 비상식, 현실과 이상 등의 이분법을 가로질러 행동하는 인물이다. 플랜B를 고려하지 않은 채 고시와 정규직 시험을 포기하는 것, 현주의 성적 판타지를 자신의 것으로 실현하는 것, 죽은 현주의 집에 가서 자신의 몸을 거울에 비춰보는 것 등 쉽게 규명할 수 없는 욕망들을 스스럼없이 실현한다.
 
자영에게 있어 행위에 대한 타당한 이유나, 옳고그름의 기준은 중요하지 않다. '한국사회에 살면서 남의 욕망을 학습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넋두리에 비웃음을 날리듯, 자영은 그저 자기가 욕망하는 새로운 길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지극히 헬조선적인 인간군상들을 다룬 <아워바디> 속에서 자영만이 거침없이 고유의 빛을 뿜어낸다. 31살이 되도록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 그러나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하고 투명한 인간. 고학력 무직이라도, 불안정한 청춘이라도 고정된 트랙 밖으로 내달리는 자영이가 멋있게 느껴진다.
 
 
[유여온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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