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인간성이 전하는 작은 희망 - 연극 태양

글 입력 2021.10.19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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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이성적인 판단력, 늙지 않는 건강한 몸으로 쾌적하고 세련된 삶을 살지만 밤에만 활동할 수 있음.

 

B. 감정적, 병에 취약하고 노화하는 몸, 가난하고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살지만 태양 아래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음.


당신의 선택은?

 


21세기 초, 바이오 테러로 인해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퍼졌다. 세계인구는 급감하고 사회경제기반은 무너져 세상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로부터 몇 년 후, 감염자 중 바이러스에 항체가 생긴 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보통의 인간보다 월등히 강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자외선에 취약해 밤에만 활동할 수 있었고 밤의 인간이라는 뜻으로 그들을 ‘녹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녹스의 인구는 점차 늘어나 평범한 인간의 수를 역전하고 사회의 지배층으로 부상한다.


그러던 어느 날 구인류, 큐리오가 사는 나가노 8구에서 녹스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주변의 녹스 자치구로부터 10년 간 경제 봉쇄를 당하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떠났고, 10년이 지난 뒤 봉쇄가 풀리며 다시 녹스와 큐리오는 교류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연극 태양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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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적인 세상처럼 보이지만



연극은 시종일관 이원적인 구도로 진행된다. 신인류인 녹스와 구인류 큐리오의 대비가 특히 두드러진다. 그들이 살고 있는 밤의 세계와 태양의 세계, 녹스의 이성적인 판단력과 감정적이고 거친 큐리오. 세련된 옷을 입고 로봇 같이 움직이는 녹스에 비해 큐리오는 거적때기같은 옷에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보인다. 그들의 세계를 정확히 나누는 다리와 검문소는 무대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어 그 대비가 더욱 명확히 느껴진다.


그 대비 안에서 녹스와 큐리오는 차별과 혐오 섞인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녹스인 세이지는 큐리오를 보고 "나는 도저히, 저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없어.”라고 말한다. 왕진의사로 나가노 8구에 갔던 카네다는 오랜 친구이자 큐리오인 소이지가 늙어버린 모습을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낸다. 녹스 살인사건의 범인인 카츠야는 녹스를 혐오하며 폭력적인 방법을 마을 사람들에게 종용하고 유는 밤의 인간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인지 의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나가노 8구에 사는 나이 어린 유와 데츠히코에게 추첨을 통해 녹스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녹스를 미워하는 유는 추첨에 관심이 없고 녹스가 되고 싶은 데츠히코는 추첨에 당첨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관객들은 연극에서 보여주는 이원적인 구도 안에서 무의식적으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유와 데츠히코가 맞닥뜨린 상황은 녹스와 큐리오라는 선택지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자신이라면 신인류인 녹스를 선택할 것인지, 그래도 태양 아래에서 살아갈 수 있는 큐리오로 계속 남을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글의 서문에 적은 두 가지 선택지는 유와 데츠히코에게 주어진 선택이자 관객이 마주한 갈등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되면서 이 이분법적 사고는 점차 힘을 잃는다. 정확히 둘로 나뉘어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 균열을 내는 사람이 있다. 녹스 자치구와 나가노 8구의 검문소에서 근무하는 후지타다. 후지타는 경계에 머무는 사람이다. 그가 검문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후지타는 다른 녹스처럼 큐리오를 차별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녹스이지만 서로를 혐오하고 차별하는 주변 인물들 속에서 녹스도, 큐리오도 아닌 경계인처럼 그려진다. 그는 큐리오의 인간성이 만들어내는 예술적인 면모를 오히려 선망하고 큐리오인 데츠히코와 친구가 된다. 그렇게 검문소는 단절된 두 세계를 잇는 교류의 장으로 변모한다.




결국 본질은, 인간.



후지타는 데츠히코에게 이렇게 말한다.


 

“난 차별 안 해. 그러니까 이렇게 너랑 있지. 우린 다를 게 없어.”

 


우린 다를 게 없다는 말. 후지타의 말은 대척점에 놓인 듯한 녹스와 큐리오의 대립을 한순간에 무너뜨린다. 그러니까 결국 우린 모두 인간이라는 것,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언뜻 보기엔 녹스는 우월하고 큐리오는 하등한 존재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완벽하게만 보이는 녹스에게도 결점은 있다. 태양 아래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생식 기능이 떨어져 큐리오 자치구에서 몰래 어린 아이를 사오며 인구수를 겨우 유지하고 있기도 하다. 큐리오도 열등하지만은 않다. 시혜적인 관점으로 큐리오를 바라보는 녹스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예술만큼은 아름답다 말한다. 시간의 제약없이 태양 아래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큐리오 뿐이다.


인간적이란 말에 대해 다시 고찰해본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시 도전하는 무모함, 소중한 이를 위해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감내하는 마음, 불안과 괴로움의 감정을 예술로 표현해내는 아름다움. 비효율, 불완전, 어리석음으로 대변되는 인간성이 만들어내는 것들은 삶을 찬란히 비춘다.


작가 마에카와 토모히로가 완벽해보이는 신인류 녹스에게 자외선에 약하다는 취약점을 부여한 것도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인간인 이상, 불완전하다는 것 말이다.

 

*

 

연극 태양은 2011년이 초연이었다. 그리고 2021년 현재, 초연 때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바이오 테러라는 설정은 우리에게 피부에 와 닿는 현실이 되었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등장하고 세상이 뒤집혔다. 인종 차별은 더욱 극심해졌고 빈부격차는 생존을 위협한다. 정부 지원금 여부와 백신 접종 여부, 부작용에 고통 받는 사람들 등 다양한 층위의 계층이 새로 등장했다. 은근한 차별과 혐오, 반목이 재생산 되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 2021년의 연극 태양은 단순히 SF 연극이라 치부하기 어려워 보인다.


연극은 녹스인 카네다가 친구이자 큐리오인 소이지와 함께 태양을 바라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카네다는 이렇게 말했다. “태양을 등지고 살면 안 돼.” 오랜 친구조차 경멸하던 그가 이런 선택을 하게 된 이유는 결국 인간이라면 이 모든 불완전함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


수백 개의 갈래로 갈라진 우리들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지금의 모든 반목이 끝나고 화합하는 날이 찾아 오기는 할까. 아무래도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불가능할 것 같다. 희망보단 절망에 기대고 싶은 현실이다. 그렇지만 연극 태양이 전하는 희망의 불씨가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믿어보고 싶다. 우리는 불가능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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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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