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현실과 꿈이 사귄다면: 라라랜드 [영화]

카페에서 영화 마시기, 여섯 번째 잔.
글 입력 2021.10.1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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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겨울,

낭만으로 가득 차 있던

어린 나에게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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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국제영화제가 얼마 전에 폐막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시즌만 되면 나는 곧잘 추억에 잠긴다. 그것은 우습게도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추억은 아니다. 내가 추억하는 것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니라 부산국제영화제가 매년 개최되는 바로 그 장소, '영화의 전당'이다.

 

2016년 말, 나는 고등학교 2학년 진급을 앞두고 한 영화광 친구와 어울리고 있었다. 10인 1실, 2층 침대 다섯 개가 놓인 허름한 기숙사 방 안에서 그 친구는 2층을 썼고 나는 1층을 썼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좁아 터진 2층 침대 위에서 무릎을 모아 노트북 겸 탭을 올려 놓고 영화를 봤었다. 그 친구와 나는 성격이 서로 상극이었기에 끝이 좋지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가 전수해준 취미 '영화 보기' 덕분에 나는 2017년을 자퇴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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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말 새로이 형성된 이 취미 덕분에 나는 2017년 한 해를 죄다 영화로 채웠다. 공교롭게도 일주일에 한 번 가던 수학 학원이 해운대 센텀시티부근, 영화의 전당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닥치는 대로 봤다. 친구가 나에게 보여준 영화들이 죄다 마이너한 예술영화들이었기에 나도 자연히 상업영화스럽지 않은 영화만 골라서 보게 됐다. 영화의 전당에서 주는 예쁜 티켓을 모으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취미가 되어갔다. 기억이 휘발되는 게 아쉬워 어두운 극장 한 구석에서 감상이 떠오를 때마다 티켓북에 노트테이킹을 하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생뚱맞게도 그 수많은 독특한 작품들에도 불구, 17살의 내가 가장 위로를 얻었던 영화이자 가장 많은 관람 횟수(N차)를 달성했던 영화는 바로 라라랜드였다.

 

 

 

'LA LA LAND'(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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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라라랜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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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돌란’은 이동 극단 배우였던 이모의 영향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연기를 시작한 배우 지망생이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틈틈이 오디션을 보곤 하지만 결과는 늘 좋지 않다. 인맥을 쌓아 보려 친구들과 사교 파티를 찾았다가 현실에 실망하고 돌아오는 길, 그녀는 거리에서 피아노 선율을 듣고 한 재즈 바에 홀린 듯 들어가 바 주인에게 해고당하는 피아니스트 ‘세바스찬’과 만난다.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그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던 그들은 다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서로 각자의 꿈을 이야기하고 들어주며 가까워진다.


세바스찬과 미아는 비슷한 듯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미아는 배우로서 성공하고자 사교 모임에도 가고, 오디션을 찾는 등 노력한다. 세바스찬 역시 본인이 사랑해 마지않는 클래식한 재즈를 보전하기 위해 창업을 하려던 남자다. 이들은 첫 만남부터 서로에게 과도한 허세를 부린다. 특히 셉이 재즈바 고용주의 명령을 받고도 “제 합의 하에 내린 결정이죠.” 라고 말하는 부분은 웃기다 못해 찌질해 보이기까지 하다. “부탁이에요”라고 말해야만 차키를 가져다주고, 좋은 풍경을 두고도 “별로네요”라고 말하는 등 이들은 서로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마치 반어법같은 밀고 당기기를 한다.

 

한참 뒤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미아와 셉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셉은 여자친구에게 재즈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설명해주면서 재즈의 매력을 설득하려고 노력하는, 허세 가득하지만 인간적으로 다정하고 낭만적인 남자다. 미아 역시 피아노 선율을 듣고 (출세를 위해 사귄 듯한) 남자 친구 가족과의 모임을 뛰쳐나와 셉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낭만을 좋아하는 여자다.

 

 

 

현실과 꿈이 사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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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현실'과 '꿈'의 연애담을 다룬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서로 다른 듯 같은 남녀 주인공은 각각 현실 속 자아와 순수한 꿈을 상징한다. 미아는 '휴학'하고 꿈을 좇아 잠시 도시에 머물고 있는 인물이며, 셉은 어렸을 적부터 꿈꾸던 재즈 바를 개업하려다가 사기를 당한 전적이 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인물이다. 다시 말해 미아는 꿈을 꾸는 현실 속 인물을, 셉은 그 꿈 자체를 상징한다.


미아가 사교 모임(현실)을 포기하고 셉(꿈)을 선택함으로써 시작된 두 사람의 관계는, 미아가 셉을 선택하느라 방치한 현실에 부딪히면서 자연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미아는 부모님과의 통화에서 은연중에 수입이 불안정한 셉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고, 셉은 그것을 듣고 키이스에게 찾아가 계약함으로써 현실과 타협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현실과 타협해 대중적인 성공만을 쫓게 된 셉을 의외로 미아가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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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시선이 뭐가 중요하냐고 이야기하던 셉은 자신이 "드디어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며 행복하다고 말한다. 미아는 변해버린 셉에 대하여 반감을 드러내며 싸우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 장면을 변해가는 꿈과 그래도 그 꿈이 지켜지기를 바라는 현실의 자아가 대립하는 것으로 보았다. 특히 이 부분에서 배경에 깔리던 노래가 끊기는 모습은 마치 꿈을 깬 듯한 효과를 준다.

 

설상가상으로 관계 초기에 사교모임을 박차고 나와 셉이 있는 극장으로 향해 주었던 미아와 달리, 셉은 촬영 스케줄 때문에 미아의 연극에 참석하지 못한다. 촬영장에서 마네킹처럼 포즈를 주문받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미아와의 추억이 담긴 곡을 연주하면서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는다. 뒤늦게 자리를 박차고 나와 극장에 도착하지만 때는 늦었다. 상처받은 현실 속 자아(미아)는 변해버린 꿈(셉)을 마주하곤 “이곳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야”라며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버린다. 현실과 이상이 갈라서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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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미아와 헤어진 셉은 연예인 생활을 청산하고 피아노 반주자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미아의 연극을 본 오디션 관계자의 캐스팅 전화를 대신 받게 된다. 이미 헤어진 후지만 그는 기꺼이 미아네 집을 찾아간다. 그는 여전히 미아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늘 그랬듯 크게 클락션을 울려서 미아를 불러낸 셉은 자신에게 재능이 없다며 비관적으로 대답하는 그녀를 달래어 기어코 오디션을 보게 만든다. 그리고 고향 집은 어떻게 찾았냐는 미아의 질문에 셉은 그저 무심하게 “집 앞에 도서관이 있댔잖아”라고 대꾸한다. 이것은 셉이 미아의 작은 말 하나도 놓친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미래를 회상하다



그렇다면 이 꿈♥현실 커플의 연애담은 어떤 엔딩을 맞이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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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자길 사랑할거야”라며 셉과 그리피스 공원에서 헤어진 미아는 5년 후 톱스타가 된다. 그녀는 5년 전 대사와 달리, 셉을 완전히 잊고 다른 남자와 가정을 이루어 행복하게 산다. 셉과의 시간 동안 바라왔던 '꿈'을 이룬 뒤에는 그것을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여 결국 '현실'로 복귀한 셈이다. 반면 셉은 헤어진 후 자신의 꿈을 이루어 재즈 바의 사장이 되어 영업을 이어감으로써 꿈을 이어간다. 그리고 이 커플은 시간을 건너, 첫 만남 당시처럼 우연히 셉의 재즈 바에서 재회한다.

 

이때, 두 사람은 ‘일어났어야 했던 미래’를 상상한다. 두 사람의 상상 속에서는 미아의 극장을 꽉 메운 관객들과 가정을 이룬 둘의 행복한 모습이 빛바랜 필름처럼, 그리고 모형처럼 지나간다. 여기서 빛바랜 색감은 보통 인물들이 과거를 떠올릴 때 사용되는 연출이며, 과도하게 단순화된 모형들은 꿈이 가진 초현실적인 이미지를 보여줄 때 사용되는 연출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장면을 '미래 회상'이라고 즐겨 부른다. 셉이 있었어야 할 자리, 즉 왔어야 했지만 오지 않은 미래를 보여주는 이 잔인한 장면에서 관객들은 눈으로는 두 사람의 해피엔딩을 보고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새드엔딩을 느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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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꽤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라라랜드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영화'로 손꼽혀 왔다. 해피 엔딩을 달성하지 못했음에도 이렇게 큰 사랑을 받는 영화는 드물다. 나는 라라랜드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우리 모두가 마음 한 켠에 간직하고 있는 '꿈과의 연애담'에서 찾는다.

 

인간은 저마다 '꿈'과 사귀어 본 경험이 있다. 그것이 첫사랑이든, 공부든, 음악이든, 운동이든 수없이 실패하면서도 그저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좋아서 뭐라도 해보려 애를 썼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꿈'과의 씁쓸한 이별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별 후에 그 '꿈'을 잊은 채 다음 꿈으로 넘어가거나, 꿈꾸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채 삶을 이어간다. 라라랜드는 이 지점을 매우 날카롭게 후벼 파는 영화다.

 

라라랜드는 색감이 강렬하여 매우 동화적이라는 평가를 곧잘 받지만, 사실 그것이 담고 있는 주제는 영화의 색감만큼이나 선명(vivid)하고 현실적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꿈과 현실이 사귀면 그 결말은 항상 '미래 회상'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실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존재들이며 꿈은 현실에 발을 붙이면 죽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설령 꿈이 우리를 너무나도 사랑해서 현실에 발을 붙이게 된다고 하여도, 그가 현실 차원으로 내려오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꿈'이 아니게 되며 우리에게 흥미를 끌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한다. 자신을 사랑해서 현실과 타협한 셉에게 미아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우리는 직접 보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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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실과 꿈이 영원히 행복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미래'뿐이다. 그리고 이 '미래'는 문자 차원에서 말하는 미래와는 속성이 다르다. 이 '미래'는 일반적인 미래와 달리 우리에게 도래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과거에 가까운 성질을 띤다. 올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 미래를 꿈꿀 수 없으며, 단지 회상할 뿐이다. 그렇기에 이 '미래 회상'은 꿈과 현실의 연애담에 있어 아이러니하게도 해피 엔딩이자 새드 엔딩이다. 라라랜드의 결말은 이 지점에서 사람들에게 큰 여운을 남긴다.

 

글을 쓰다 보니 왜 2017년의 내가 이 영화를 볼 때마다 왜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었는지 이제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2017년의 나는 '입시를 통한 성공'이라는 꿈과 한창 열애 중이었기에, 내 연애담의 결말 역시 저렇게 되리라는 것을 은연중에 눈치챘던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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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나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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