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차가운 겨울 속 포근한 향기, 머스키 마일드

노을 섞인 구름이 주는 편안함을 느껴보고 싶다면
글 입력 2021.10.1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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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 처음이란 기억에 오래 남는 법이다. 내가 내 첫 향수를 만난 날도 그렇다. 나는 아직도 그날을 기억할 수 있다.


그때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사촌 언니를 따라서 백화점 구경을 갔었는데, 그날따라 화장품이 진열된 1층에서 종합 향수 코너가 눈에 띄었다. 마침 그즈음 나는 궁금했던 향수가 있었다. 그 시절 좋아했던 아이돌이 사용하는 향수라고 소문이 났던 제품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향이 나는지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드럭 스토어에도 널리고 널린 게 그 제품인데, 그때는 그 먼 백화점에서 그 향수를 만난 게 무슨 운명 같았더랬다.


직원 분이 시향지에 향수를 뿌려 건네주셨을 때, 뭔가를 느꼈다. 아, 이건 완벽하게 내 취향이다. 정말이었다. 좋아했던 아이돌의 향수라서가 아니고 (실제로 그 소문은 거짓으로 판명이 났다.) 정말 내 마음에 쏙 드는 향이었다. 처음으로 취향의 향수를 만났던 경험은 기억에 오래 남았다.


원래 향이 인간의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다고, 그동안 내 코는 그 향을 오래도 기억했다. 길을 걷다가 그 향이 나는 것 같다 싶으면 알아챌 정도였다. 특히 비 오는 여름날 그 향을 자주 맡았던 것 같다. 성인이 되었을 때, 나의 첫 향수로 그 향수를 선물 받았다. 처음으로 생긴 나의 향수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이라니. 이보다 기분 좋은 선물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 향수의 바틀을 버리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그 향 다음으로 내 마음에 꼭 드는 향을 만나지 못했다. 향에 깊은 조예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렇다고 내 후각이 예민한 편도 아니다. 단지 내가 향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한 사람이라서 그렇다.


나는 좋아하는 향과 그렇지 않은 향이 뚜렷하다. 예를 들면, 비누 향은 굉장히 좋아하지만 베이비 파우더 향은 좋아하지 않는다. 단 향을 선호하지 않는 반면 시트러스 향은 좋아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짙은 머스크 향을 좋아하지 않는다. 장미랑 머스크 향은 유독 싫어해서 제품 이름에 언급되기만 해도 우선 피하고 보는 편이다.


그랬던 내가, 펄스테이의 머스키 마일드라는 향수를 시향해보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향수 패키지를 열기 전부터는 물론이고 향수를 뿌린 후 첫 숨을 들이쉬기까지도 망설였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이름에서부터 머스크 향이 뿜어져 나오는 향수를 도대체 왜?


이유는 단순했다. 더 이상 머스크 향을 피할 수 없어서였다. 시중에 판매되는 대부분의 향수와 바디로션, 핸드크림 등 향이 나는 제품에는 전부 머스크 향이 들어간다. 내가 좋아하는 향의 핸드크림에도 머스크가 들어간다. 심지어는. 앞서 언급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의 베이스 노트에도 머스크가 포함된다.


처음에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에서도 머스크 향이 났다고? 하지만 전혀 거슬리지 않았는데. 내가 머스크 향을 좋아했었나? 그렇지만 그건 분명 아니었다. 머스크 향을 단독으로 맡으면 여전히 인상이 찌푸려진다. 아무튼, 나는 이제 머스크를 마주해야만 했다.


아무래도 향의 조합이 결과적인 향기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머스크가 들어갔어도 충분히 내가 좋아하는 향이 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나는 머스크라는 글자만 보면 무조건 피했다. 머스크가 넘쳐나는 현대 향 사회에서 언제까지고 그럴 수는 없다는 걸 깨닫자,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이름부터 머스크 향이 가득한 그 향수를.

 

 

 

향기가 머무르는 곳, 펄스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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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스테이는 perfume과 stay가 합쳐진 말로, 1인 조향사 펄스(pers)로부터 설립되었다. 현재는 한국에서 활동하는 여러 조향사들이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펄스테이는 향을 선택하는 일이 나만의 자유를 찾아 즐기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그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용기가 있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선물해준다.


실제로 향은 내가 있는 곳 어디에든 존재한다. 내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든, 내 몸에 뿌리는 향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향을 통해 자유를 선물한다는 펄스테이의 모토는 인상적이었다.


머스키 마일드는 그런 펄스테이가 차가운 겨울날, 노을에 물든 구름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한 향수이다. 주황빛 구름들이 선사하는 포근한 향을 구현해낸 머스키 마일드는 펄스테이의 시그니처 향이기도 하다. 펄스테이는 머스키 마일드를 통해 머스크를 시트러스를 품은 따뜻함, 달콤함, 분내음 등으로 나타내면서, 겨울이 가진 따뜻함과 섬세함을 표현한다.


탑 노트엔 만다린과 블랙 커런트가, 미들 노트에는 오렌지 플라워와 튜베로즈, 화이트 로즈 자스민이 향을 연출하고, 베이스로는 화이트 머스크와 베티버, 바닐라가 따뜻함을 더한다. 향수의 노트를 보자 나는 알 수 없는 호기심에 휩싸였다. 좋아하는 만다린과 오렌지 플라워, 싫어하는 머스크와 로즈, 바닐라.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의 총 집합체였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전부 섞어둔 이 향수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향이 날까, 싫어하는 향이 날까.

 

 

 

겨울을 맡을 수 있다면 이런 향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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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키지는 단출했다. 바틀도 군더더기 없는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그러면서도 단정한 모양새를 하고 있는 게, 화려함을 배제하여 향기에 집중시키려는 펄스테이의 의도가 느껴졌다.


향수를 손목에 뿌리고, 코 가까이 가져다 댄 후 숨을 들이쉬었다. 첫 숨에 느껴진 건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었다. 코끝을 기분 좋게 강타하는 시원하고도 가벼운 향이 훅 들어왔다. 상큼한 향이 어느 정도 날아간 후에는 파우더리한 바닐라 향이 느껴졌다. 머스크 향과 바닐라가 섞인 향이었다. 마지막에는 은은하고 조금은 묵직한 나무 향으로 향이 마무리되었다.


처음 탑 노트부터 베이스 노트까지 맡아본 후 들었던 감정은 오묘함이었다. 이게 왜 좋지? 분명 머스크와 바닐라 향임에도 불구하고 과하지 않아서 그런지 거북스러운 느낌이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은근한 단 향이 올라오는데도 그게 다른 향들과 조화롭게 어울렸다. 내가 싫어하는 향들이 느껴지는데도 내가 이 향수에 대해 내린 종합적인 평가는 분명한 호(好)였다. 극호와 불호가 적절하게 어우러지면 호가 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머스크의 영향인지 향이 생각보다 묵직해서 겨울에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절로 두꺼운 머플러의 촉감이 느껴지는 향이었다. 이번 겨울, 이 향수를 뿌리고 나가면 정말 포근한 구름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에 단정한 코트 차림이 떠올랐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지만, 마냥 풀어진 느낌은 분명 아니었다. 단정하고 잘 정돈된 기분이 함께 느껴졌다.


첫 시향은 집에서 혼자 뿌려보았던 것이었고, 두 번째 시향은 아르바이트 출근길을 준비하면서였다. 문득 머스키 마일드가 눈에 들어와 외출하는 겸 뿌려보았는데, 향기가 방 안에 퍼지자마자 단정한 셔츠로 갈아입고 싶어졌다. 향수가 풍기는 단정하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옷에서도 주고 싶었다.


그날의 출근길은 은은한 머스크 향부터 차분한 셔츠까지 사실 나에게는 낯선 것 투성이였다. 그런데 그게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향기 안에 그 모든 요소들이 하나로 묶여 그 자체로 내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사람을 보았을 때 특정 향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처럼, 좋은 향은 그 향이 가지는 이미지대로 변하고 싶게 만들기도 하는 모양이다.

 

 

 

또 하나 추가된 취향의 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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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키 마일드는 내 취향의 범주를 넓혀주었다. 머스크라는 단어에 지레 겁먹고 향을 맡아보지도 않았다면 은은한 머스크 향과 상큼함이 어우러진 머스키 마일드를 뿌려볼 기회도 없었을 것이다. 시트러스와 머스크의 합이 생각보다 마음에 든다는 것도, 나도 가끔은 포멀한 옷차림을 하고 싶어진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무엇이든 속단하면 안 된다고, 그 어느 것보다 확고한 줄 알았던 내 취향도 속단은 금물이기 마찬가지였나 보다.


앞으로도 나는 수많은 갈림길에 서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섣부른 속단으로 새로운 경험의 기회를 놓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머스키 마일드는 무엇보다 상큼한 첫 향과 달달한 중간 향, 살짝은 묵직한 마지막 향이 공존한다는 다양성이 그 매력이다. 다양한 향이 서로를 보완하며 매력을 극대화하고 있으니, 노트 중에서 좋아하는 향이 두 개 이상 포함되어 있다면 시도해보는 것도 좋을 같다.


아무튼 나는, 머스키 마일드와 함께 이번 겨울을 포근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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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시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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